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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문화와사람]
힘차고 막힘없는 붓놀림 -묵죽의 대가 이정직(李定稷)-
이철량/전북대학교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3 10:29:20)
전북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 전통회화에 있어 주된 소재는 산수였으나 그에 못지않게 사군자(四君子: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비롯한 기타 문인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인화의 발전은 물론 많은 서예인구에서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서예인구가 많다는 것은 이 고장의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속에서 문인사대부(文人四大夫)의 지식층이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조선조시대의 지식계층은 시를 직소 글씨를 쓰며 그림을 칠 수 있는 계층이었다. 물론 이 시대의 양반계층에서 과거를 통한 입신의 수단은 시, 서, 화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지식인치고 글씨를 하며 그림을 즐기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드넓은 곡창을 끼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려왔던 이지역이 서예와 그림이 발달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18세기부터 불기 시작한 남종화의 바람은 이곳 호남에서 큰 진리를 형성하였는데 모름지기 한국적 남종화풍이 다름 아닌 호남화풍을 말하고 있는 연유이다. 이 남종화풍은 전문적인 직업화가들에서 보다 사대부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한 여기(餘技)화가들에게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폭넓게 확산되고 발전되었다. 이는 남종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학적 정서와 조용한 자연관조가 지식계층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적 세계와 매우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남종화의 정신이 확산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닌 문인화의 확산으로도 말하여 진다. 왜냐하면 남종화와 문인화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전문적 기능을 요구하게 되는 산수화보다는 간략한 형식미를 즐길 수 있는 문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지식계층에서 특히 이런류의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된 데는 중국 송나라때부터 줄곧 견지해왔던 시서화 일체론(詩書畵 一體論)이 크게 작용하였다. 말하자면 글 짓고, 글씨쓰고, 그림 그리는 일은 본래하나다라는 인식이었다. 이런 연유로 상당히 적극적인 사대부들은 으레 글씨와 그림을 한 화폭에 함께 담아내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고 그렇게 하기에는 사군자나 화조화 등의 문인화가 가장 어울리는 주제였다. 전북에서는 누구를 비롯하여 사군자가 널리 보급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시기에서 부터인지 모르게 많은 사대부화가들에 의해 널리 애용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추정은 여기에 소개되는 이정직의 그림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정직은 1841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나고 1960년에 죽었다.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 필묵에 자신을 의탁하고 학문을 익히며 변혁기를 살다간 사대부 화가이다. 그가 이지역의 걸출한 인물이었음은 황매천(隍梅泉), 이해학(李海鶴)과 함께 호남에서 유명했던 삼재(三才)중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높은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이 출중했음을 말한다. 실제로 그의 대나무 그림은 매우 높은 품격을 갖고 있어 그가 그림에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류의 문인화, 특히 사군자 그림에서는 그리는 사람의 깊은 학문과 높은 인격을 요구하게 되어있어 이정직이 그림에서 보다 먼저 시문(詩文)에 더욱 풍부하고 심오한 깊이를 터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그는 향리에서 그저 글이나 읽었던 평범한 선비가 아니고 일찍이 중국 북경등지를 두루 여행하고 세상의 폭을 이해하였다. 그가 구한말의 혼란한 시대에 은둔자로서의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였음은 “연경산방(燕京山房)”이라는 북경을 여행한 감상을 글로 세상에 내놓아 당시인들에게 계몽적 자세를 보인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어떻든 이정직은 시구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선비로서의 기개를 보여주었던 당대의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로 지목된다. 이정직은 신평(新平)이씨로서 호를 석정(石亭)이라 하였다. 그의 그림은 주로 대나무를 중심으로 하여 그려진 사군자가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많지는 않았을 것이나 여타의 문인화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그의 대그림으로서 걸출한 것으로 단순하고 그려진 족자그림의 묵죽도(墨竹圖)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뛰어난 필치의 대그림 뿐만 아니라 그림 한 중앙에 마치 물 흐르듯 유려하게 써내려간 화제(畵題)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대는 본시 사군자(四君子)중에서도 기개와 절개가 곧은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타의 초목 중에서도 특히 대는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도 대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 아름다움과 고고한 선비의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구성은 그림 우측 하단에서 두줄기의 대가 X자형으로 교차되었고, 그 중 한 줄기가 우변을 타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고고하게 서있다. 그리고 마치 대줄기를 한쪽 편으로 잔뜩 밀어 붙이고 들어가 앉아 있는 모습의 화재글씨가 서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 줄기가 엮어낸 그림 하단부의 화면구성은 크고 작게 분할된 공간의 절묘한 비례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매우 단순한 그림임에도 전혀 단순해 보이지 않게 연출해 내고 있다. 팔자하포식(八字下抱式)과 개자형식(介字形式)으로 엮어진 댓잎도 크고 작게 혹은 모으고 벌려놓은 구성의 짜임새가 완벽하게 구사되었고 뿐만 아니라 그 필치가 정갈하면서도 고아(高雅)한 가히 대그림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같은 대그림으로서 다소 격조가 떨어지고 산만한 듯 보이는 다른 그림의 죽석도(竹石圖)에서도 이정직의 높은 운필의 구사력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대에서 보다 오히려 바위에 더욱 중심을 두고 제작한 듯하다. 화면에서 바위가 차지하는 부분의 비중이나 대담하고 힘 있는 필선의 기운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점으로 보아 풍상을 겪은 이끼 낀 모습의 바위에 내용을 담았던 듯하다. 힘차고 막힘없는 붓놀림으로 그려나간 이런류의 작품들은 이정직이 가장 즐겨 그렸고, 또한 이들 작품들을 통해 높은 화의(畵意)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다른 그림에서 보다 특히 묵죽에서 일가를 이루어낸 문인화가로 평가될 수 있는 점은 여기에 보이는 백로도(白鷺圖)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작품의 기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아마 그의 초창기 그림이거나 아니면 사군자류의 그림 외에 다른 소재는 흔히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두 마리의 백로의 자세나 동세의 표정이 매우 미숙하게 처리되었고 화면의 구성도 나열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떻든 작품은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으나 문인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요구되는 속기(俗氣)는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정직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왜냐하면 이정도의 작품으로 그에 대한 전체적 이해가 너무 부족하며 또한 그가 대그림에서 보이는 뛰어난 능력은 더욱 많은 자료를 통한 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어떻든 이정직은 이고장이 낳은 걸출한 사대부 화가였고 시서화 3절(詩書畵 三絶)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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