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지역축제는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것
권오성 축제평론가
<전주풍남제>(이하 풍남제)의 앞날이 안개 속에 휩싸였다. 겉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지만, 전주시는 올해 축제 예산을 확정한 상태이고 내부적으로는 이미 봄·가을로 분산 개최하는 방안까지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일부 문화예술인들은 개최 시기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경우 풍남제를 아예 폐기하는 것과 같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전주시가 축제 예산의 대부분을 감당한다는 구실로 풍남제의 미래를 독단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장담컨대 안팎으로 상당한 후유증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저간의 사정은 이제 차츰 알아간다 치고, 어찌됐든 전주시민의 ‘명절’과도 다름없는 풍남제가 이렇게까지 애처로운 처지에 몰린 건 슬픈 일이다. 달리 보면, 이는 튼실하지 못한 전주 문화예술의 토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 같아 영 입맛이 씁쓸하다. 전주시가 예향과 전통의 중심도시라고 대내외적으로 표방하면서도, 정작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대동한마당의 축제조차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란 사뭇 충격적이다.
물론 아무리 유서 깊은 축제라도 ‘현재’와 소통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내용과 형식을 달리 할 방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아예 축제 명칭에서부터 개최 시기와 장소까지 완전 새롭게 고려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축제의 내용과 형식도 시대와 취향에 맞게 변화해야 마땅하다.
시민적 공감대 형성이 전제 조건
그렇지만 이 와중에서 제전위원회를 비롯한 주최 측이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건, 가장 먼저 시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또한 관련 문화예술계 모두가 수렴한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전주시민의 대동제로서 반세기 동안 이어온 풍남제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의견도 최대한 수렴해야 옳다. 그동안 이런 자리가 부족했다면, 주최 측은 충분히 자성하면서 차제라도 자주 공개 논의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전주의 어느 축제가 안 그렇겠냐마는 그 중에서도 풍남제는 가장 시민 지향적인 축제이다. 단오날 청포물에 머리를 감고 치러지기 시작한 축제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풍남제가 전주 시민의 정서와 일상사가 담겨 있는 축제라는 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풍남제가 정체성 및 발전 방향과 연관해서 많은 관심을 받아왔으며, 한편으로는 여러 논란과 비판의 주요 표적이 된 점도 있다. 필자 또한 지난 해 축제를 보고 나서 꽤나 비판적인 심경을 내비친 적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축제 주최 측의 분발과 내적 쇄신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었다.
크게 보면 풍남제의 고민은 전주시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무색무취의 주민화합형 축제’들이 공통으로 고심하고 있는 과제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주지하듯이 전국적으로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수많은 ‘전통 축제’들이 시대의 변화와 문화적 흐름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어떤 축제는 쓸쓸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그렇지 않은 다른 축제들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 명목으로 새롭게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시도들은 대개 민간 중심의 지역 내 문화 역량으로 이뤄졌다기보다는 대부분 지자체가 주도하여 위로부터 내려오는 변화였다. 그래서 속성으로 축제를 ‘재배’한 만큼 자생력을 키울 문화적 동력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젠 관의 지원 없이는 개최조차 하지 못하는 허약하지 짝이 없는 축제가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과 흐름 속에서 치러지는 수많은 지역축제들이 시사하는 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조금만 여유를 갖고 사안별로 여러 축제들을 차분히 검토해 본다면 의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렴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단초 하나쯤 제공해 주지 못할까? 말이 길었다.
시민과 함께 변화하는 축제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물론 축제의 변신도 역시 무죄이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강원감영제>는 ‘원주치악제’가 원주시의 특화된 주제로 변신을 꾀한 경우이다. 2005년 기존의 구태의연한 축제를 재설계해서 내놓은 건 강원도의 옛 감영 터를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축제였다. 관찰사 고유제 및 순력행차, 수문병 교대식, 감영 체험, 전통무예 시범, 기로연회와 음풍농월, 향시 및 전통 시장의 재현, 강원 전통 민속놀이 등이 주요 행사로 부각되었다. 동시에 원주시는 국내에선 유일하게 보존된 감영터를 복원하는 중에 있다.
2004년 ‘온양문화제’에서 명칭을 바꿔 치러진 <아산성웅이순신축제>는 충무공을 소재로 한 교육적 효과, 문화예술축제로 전환 모색, 관광 아산의 이미지 기여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기존 축제와 차별화할 수 있는 전략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온양온천’과 ‘이충무공’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시도는 결국 과도한 욕심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올해부터는 민간 주도의 축제위원회를 구성하여 축제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한다.
위의 두 축제는 기존의 특색 없는 종합 축제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주제를 부여하고, 지역적 정체성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꾀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쉽게 간과해 버린 점이 있는데, 지역 주민이 대부분 관객으로 전락하여 대동제와 같은 난장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시민의 화합을 위해 치러졌던 축제의 전통이 특정 주제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빛을 잃고 만 것이다.
그렇다 보니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는 많아졌을지는 몰라도 자기 동네에서 작정하고 신명나게 놀아볼 기회는 더욱 어려워졌다. 본질적으로 서로의 이해가 상충하지 않음에도 이런 결과를 낳은 건 자명하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축제를 전국적인 문화상품으로 포장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지역민보다는 외지인이 더욱 축제에 흥겨워하는 풍경은 왠지 낯설지 않은가!
이에 반해 시민이 체계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서귀포의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년 가을로 12회째를 마친 <서귀포칠십리축제>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십이동 마당놀이’이다. 서귀포시 12개 동의 고유한 문화유산(놀이/설화/제사)을 발굴, 해당 동민들이 직접 무대에 나서 연행을 한다. 좀더 보완해야 할 부분이 없진 않지만, 지역의 고유문화가 축제 속에서 역동적으로 복원되는 과정은 모범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해양문화체험 행사도 곁들여 관광객을 유도하고 있다. 전체적인 축제의 짜임새가 완결된 편은 아니지만, 칠십리 대행진을 비롯하여 지역민과 함께 하고 이를 관광객의 볼거리로 부각시키는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옛 남제주군 5개 읍·면이 처음으로 참가해 지역을 상징하는 민속놀이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하니 거듭되는 진화가 부럽다.
어쨌든 지역축제의 새로운 변신과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게 열려져 있다. 거기에서 시민을 중심에 두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분명한 건, 진정으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축제는 지자체의 성급한 성과 중심적 사고나 문화예술인의 일상에서 벗어난 고고한 창작과는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민·관의 조화가 축제의 성패를 좌우한다
풍남제와는 축제의 성격이 사뭇 다르지만, 2001년부터 시작한 <남양주세계야외공연축제>(2005년부터 <세계야외공연축제경기>로 명칭 변경)는 경기도 북부 일원에서 제법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주가를 높이는 공연예술축제였다. 특히 북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치러지는 자연친화적인 야외 공연은 당시로선 주목할 만한 기획이었다.
하지만 2003년 불과 개최 2개월여를 앞두고 축제 예산의 집행을 달리 하겠다는 남양주시의 입장 변화로 커다란 내홍을 겪었다. ‘시민이 배제된 연극인 중심의 축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축제추진협의회를 꾸리겠다는 시의 입장과 이는 ‘애초 시민과 민간 전문가가 만든 축제’를 훼손하는 관료적 발상에 다름 아니라는 범시민대책위원회의 시각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축제는 파행적이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치러졌다.
이 과정에서 축제 명칭을 둘러싼 논란, 시민단체 및 예술단체간 대립과 갈등 등 여러 후유증을 남겼다. 결국 남양주시는 축제의 성공적 개최를 통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고, 축제도 규모에 맞게 안정적인 재원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
사실 이러한 파행의 이면에는 민관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과 축제를 바라보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친소관계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축제 예산이 들쭉날쭉한 지원 체계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예술 감독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과 적극 소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지역민의 참여가 활발하고 많은 시민이 기꺼워하는 축제라면 지자체도 그리 쉽게 반대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파행적 운영은 집행위원장을 해촉하면서 불거진 부천시의 독단적인 행정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기존 집행 주체들이 부천시민들을 소홀히 한 게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자체의 농간에 영화제가 맥없이 무너지고 시민들의 상당수는 팔짱을 끼거나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분명 문화예술인들이 시민들과 소통하기보다 자신의 영역 확보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기적인 처세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 <부평풍물대축제>는 민관의 협력체계가 비교적 훌륭한 사례이다. 부평구청의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행정지원단’과 ‘운영국’은 축제의 실질적인 준비 주체인 ‘기획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구청은 예산의 대부분을 지원하지만 전권은 추진위원회에 일임하며, 예산과 관련한 행정적인 지원 이외에는 담당 공무원들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 구청 공무원 전원이 원활한 축제 운영을 위해 애를 쓴다. 물론 이러한 체계는 지난 10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작년에 벌써 76회째를 맞이한 <남원춘향제>는 그동안 춘향제의 주축이 되어왔던 춘향문화선양회의 내분으로 2002년부터 심각한 몸살을 앓았다. 결국은 남원시가 완전 주도하여 축제를 치르기도 했고, 한때는 문화부가 지정하는 ‘문화관광축제’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아직도 선양회의 내부 갈등이 잠복해 있지만, 위기의식의 발로인지 다행히 작년부터는 내홍을 어느 정도 잠재우면서 약간의 변화(체험 행사 확대, 야시장의 축소)를 시도하고 있다.
요컨대 지자체의 예산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축제는 민관의 긴밀한 협력 체계가 굳건하지 못하면 언제고 좌초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관의 ‘팔길이 원칙’(직접적인 관여보다 팔 길이의 거리를 두고 지원)에 무작정 호소하는 차원에 그칠 게 아니라, 나름의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꾸준히 마련해 놓아야 한다. 풍남제도 예산의 절반 정도는 제전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감당한다면, 얼마든지 추진력을 갖고 주도적인 역할을 해낼 것이다.
풍남제를 제대로 고민하려면 이 지면의 몇 배는 있어야 하겠지만 지면이 제한된 관계로 이만 줄여야 할 듯하다. 필자만의 사견을 덧붙인다면, 앞으로 풍남제는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계승하고, 전국화의 욕심보다는 전주 시민의 정서와 문화를 담아내며, 아울러 다른 축제와 연계하면서 전주를 방문하는 외지인을 유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어쩌면 풍남제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은 전주 문화예술인의 저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부디 풍남제가 지금의 시련을 딛고 명실상부한 전통도시의 힘을 보여주는 신명나는 축제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권오성/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노어과를 졸업했다. 문화연대 축제모니터링단에서 일했다. 현재 전북 익산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역 축제 및 문화와 관련한 비평적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지역 축제의 다양한 문화적 자산과 사회 통합적 기능, 축제 문화를 매개로 한 사회의 변화 가능성도 탐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