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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 |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마이산이 낳은 세계를 들어올린 작은 거인의 마을
(2014-02-14 17:20:07)

마이산이 낳은 세계를 들어올린 작은 거인의 마을
글_이흥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작은 거인, 역도선수 전병관의 고향마을이다.

60억 중 가장 힘이 센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을입구 당산나무는 불룩불룩한 역도선수의 팔과 다리를 닮은 듯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옛부터 “살아있는 마령사람 열명이 죽은 강정사람 한명을 못 당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그렇게 기운들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회관에서는 겨우내 남자들만 적어도 15명 정도가 회관에 모여 삼태기도 만들고, 화투도 치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요즘에는 화투(The war of flowers)가 ‘고스톱’으로 통일(?)되었지만, 옛날에는 민화투, 육백, 나이롱뽕, 버티기, 도리지꼬땡 등과 혼자서 하루의 운세를 점쳐보는 표(흔히 사투리로 “패”라 한다.) 띠기를 한다. 칠성패, 갑오패, 쌀미자(米)패 등 다양했었는데, 이 마을 노인정에서는 이런 옛 화투놀이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중 거의 잊혀져가는 민화투에는 3단 4약이 있다. 초약, 풍약, 똥약, 비약은 각각 20점씩이고, 홍단. 청단, 구사는 각각 30점이다. 4명이서 2명씩 짝을 지어치고, 일정한 점수를 정해, 먼저 그 점수를 딴 팀이 이긴다.

호남정맥의 마이산 줄기가 광대봉으로 이어지면서 멈춘 산등성이 끝에 강정마을이 있다. 마령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금도 80여 호가 살고 있다. 섬진강 상류의 산간분지에 마을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여름에 홍수가 나면, “잘못하면 송장 찾으러 하동까지 간다”는 말이 이 마을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다.

마이산의 기운을 받는 명당마을이지만, 마을 앞에 들이 많아 농사를 지으려면 항상 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마을 앞쪽에 있는 내동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낼 때 청용이 그려진 용대기(龍大旗)를 들고 내동산 꼭대기까지 뛰어올라 갔는데, 맨 먼저 올라 간 마을에 물이 맨 먼저 든다고 생각해서, 각 마을 청년들이 있는 힘을 다해 내동산에 올라갔다고 한다.

깃발 왼쪽에
創始 道光 十五年 三月日, 甲子 七月 日 修補, 全北 鎭安 馬靈 江亭里 龍大旗.
라고 쓰여 있다.

청나라 연호인 道光 1년은 1821년이므로, 용대기 제작연대는 도광 15년 즉 1835년에 해당된다. 즉, 170여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갑자년 7월에 보수 되었다고 했는데, 원래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써 넣었다. 밑에 있던 글자, 대정 13년은 1924년이다. “묻지마라 甲子年”生들이 태어난 해이다. 1835년에 제작된 것을 1924년에 보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러군데가 헤어져서 구멍이 나고 마을회관 창고에 보관이 되 있어 시급히 보수와 보존대책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용대기는 청용한마리가 머리위쪽에 여의주를 쥐고, 하얀 구름 속에서 비상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용머리 위에는 용 형상의 머리와 꼬리에 털이 난 청거북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용꼬리 위쪽에는 큰 잉어 한마리가 살아있는 듯이 그려져 있다.

용, 거북 그리고 잉어 등은 모두 농사짓는 데 가장 필요한 물과 연관이 있다. 이런 동물문양을 기에 그려 넣어 항상 물이 넉넉하기를 빌며, 만두레와 기우제 때 사용을 했다고 진안군 의회의원이 송정엽의원이 증언을 해주었다.

또 마을에 농기(農旗)가 있다. 중앙에 ‘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쓰여진 농기는, 광복 18주년 마령면 체육대회에서 농악부문 1등을 하여 받은 기(旗)다. 18주년 광복절은 1963년이므로 44년이나 되었지만 보관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보흥사 계곡에서 내려온 조그만 계곡 중간에서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고샅길이 있다. 이 길을 중심으로 마을 위쪽에는 천안 전씨가 아래쪽은 연안 송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래서 영산사와 영계서원은 천안 전씨 조상들을 비롯한 분들을 모신 사당이고, 구산서원과 수선루는 연안 송씨들 사당이다. 수선루는 섬진강변 절벽위 바위 사이에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마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한 장면을 연상케 하고, 누각에서 보는 풍경은 한폭의 수묵화 같다.

산과 강이 다 푸르다 하여 쌍벽루(雙碧樓)라 칭한 누각은 참봉 전영선이 1942년 건립한 누정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절벽 바위 쪽 서까래가 썩고 기둥이 곧 무너질 듯 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청’이 곧 훼손될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마을은 영계서원(靈溪書院) 영산사(靈山祠), 오현사(五賢祠)가 있고, 쌍벽루(雙碧樓), 완월루(玩月樓), 수선루(睡仙樓) 등 서원 1곳, 사당 2곳, 루각 3곳의 조선시대 유교문화유적과 광대봉 아래 보흥사에는 고려시대 조성된 탑이 1기 있다. 당산나무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전희준 가옥 등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마을은 아주 드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당이나 누각이 번질번질하기 보다는 박제처럼 생명력이 없이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착찹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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