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너무나 문학적인
베를린 천사의 시(1987년)
글_신귀백ㅣbutgood@hanmail.net
성긴 별들의 독일영화사
20세기 독일 문학에서 카프카, 토마스 만, 릴케, 브레히트, 하인리히 뷜 같은 문학의 전설이 한둘 아니나 영화 쪽은 손을 꼽기 쉽지 않다. 히틀러가 영화 문화의 죽음을 만든 것. 영화인들이 나찌에 대한 피신으로 해외망명 아니면 선전영화만을 찍어야 했기에. 내가 가진 책『세계영화사(잭 C 엘리스, 이론과 실천刊)』가 들려주는 독일영화 이야기는 1920년대의 무성영화시대 표현주의 영화가 갖는 서술적 양식적 진보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몇 페이지가 나오고 그 뒤는 잠잠하다. 저 유명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고다르와 브레송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누벨바그와는 달리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의 경우에는 내세울만한 작가가 별로 없기에. 다만 ‘아버지의 영화’를 비판한 오버하우젠 선언(1962)에 대해 몇 줄 서술할 뿐. 미국의 훈수 아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동안 독일은 제임스 딘 알랑 들롱 같은 스타를 생산하지도 못한데다 우리처럼 독일도 한때는 '향토영화'라는 이름의 새마을 영화 장르도 있었다 하니……
로드 무비, 길 위의 자식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 해방둥이 빔 벤더스는 뉴 저먼 시네마 2기 그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수. 전쟁에서 진 그의 애비는 종이었다. 마샬 플랜 아래 밤이 깊도록 미군방송이 들려주는 락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고 미국의 B급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애비를 버리고 그는 길을 떠나는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화 된 전범국가 독일을 사유하고자 떠난 곳이 바로 미국. 먹고 살기에 바빴던 애비와 역사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양키는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 시킨다'고 믿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길을 헤맨다. 그는 길 위에서 생각했고 길 가는 사람들을 찍었다. 미국에 대한 방랑인 <파리텍사스. 1984>의 트레비스는 나스타샤 킨스키를 찾아 텍사스를 헤매고 베를린의 천사는 동서분단의 인간 세계로의 길을 떠난다.
베를린 천사
이 영화는 독일말 원제 ‘베를린의 창공(Der Himmel Ueber Berlin)’처럼 모노크롬의 흑백 도시를 부감으로 잡으며 시작한다. 분단의 상징 잿빛 베를린의 부란덴부르크 문 전승기념탑 꼭대기에서 잡는 카메라는 천사의 눈일 테니. 흥미로운 것은 미국식 제목은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인데 반해 일본인들이 붙인 제목 ‘베를린 천사의 시(ベルリン·天使の詩)’이 더 그럴듯하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나 나올 정장 롱코트를 입은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과 카시엘은 베를린의 하늘 또 거리에서 사람들을 살핀다. 괴로움에 자살하는 사람의 어깨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머리를 수그린 채 걱정하는 사람을 위로하기도 한다. 참, 꽃미남도 아니고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처럼 꼭 다문 입의 중늙은이가 천사라니(인간의 속마음을 읽은 후에도 표정변화가 없어야 하니 그렇기도 하겠다)! 영원을 부유하던 어느 날, 다미엘은 망해가는 서커스 천막에서 닭의 깃털로 만든 가짜 날개를 달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인을 발견하곤 깊은 연민과 함께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변화 아니던가. '천사 같은 인간' 마리온(실제 벤더스가 사랑한 솔베이그)을 사랑하게 되자 이 천사 아저씨는 중력이 주는 자신의 무게와 현재를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랑은, 카페의 빈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고 싶게 만들고 부는 바람을 느끼고 싶어 하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실직과 고독에 빠진 산발머리 파마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천사는 '영원'한 시간 속에 떠다니느니 싸움을 해보고 술을 마시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싶어 한다. 아파보고 손때가 묻게 신문을 읽고 싶고 때론 거짓말도 해보고, 걸을 때 움직이는 뼈를 느끼고 싶어 하며 사과를 손에 쥐고 싶어 하던 천사 다미엘은 베를린을 부유하다 미국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난다.
영화촬영차 독일에 온 콜롬보 아저씨(아, 아버지에 대한 환멸과 동경의 환유라니!)를 만나는데 이 양반은 인간으로 환생한 전직 천사. 이 형사 아저씨가 우리가 부대끼며 사는 이 세상에 인간화 된 천사가 적지 않음을 알리는 순간, 영화는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다미엘이 천사로서의 생명을 끝내는 순간 화면이 흑백(천사의 시점에서 본 세상)에서 칼라(인간의 시점에서 본 세상)로 변하는 것. 이제 건방진 사내가 된 이 수호천사는 담배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방기의 유혹을 즐긴다. 소멸을 즐기는 것. 결국 줄에서 내려온 곡예사 마리온과 함께 선남선녀를 이룬다는 이야기..
영상미와 문학성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다스 이스트 킨트, 킨트 이스트로…" 시작되는 천사 다미엘이 들려주는 독백은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게 만든다. 질문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천사였다는 것인데, 피터 한트케가 쓴 '아이의 노래 (Song of Childhood)'라는 이 시는 보름달 같은 영화에 둥근 테두리를 만들어 오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틸트와 팬으로 주욱 훑어대는 촬영 감독 앙리 앙칼의 카메라 워킹은 한 곳을 진득하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이것저것을 순발력있게 노래하는 피터 한트케의 스타일과 잘 어울린다. 벤더스와 함께 쓴 이 시나리오가 그 유명한 희곡「관객모독」의 스타일과 형제간이란 것을 알게 되면 무릎을 칠 것이다.
영화 끝 무렵, 포츠담 광장 잡초밭에서 세상이 변화된 모습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는 노인의 입을 통해 인간들이 이야기를 잃어버렸음을 애석하게 서술하는 대목은 피터 한트케 식의 산만스러운 이야기의 나열(서사가 부족한)에 대한 자기변명 혹은 좋은 긴장으로 읽힌다. 벤더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운동과 정지를 통해 보여주는 화면과 시적인 대사만으로도 무작정 길 떠나는 천사 이야기라는 서사를 이끌어내는 힘을 보여주는데. 서사구조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이 대책 없는 천사가 보여주는 길 떠남은 싱거운 이야기일 것. 하지만 자잘한 풍경과 소도구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반추에 의한 영상미와 한트케가 들려주는 시에 찬찬히 눈과 귀를 기울이는 관객이라면 반드시 메모지를 준비하고 보아야 할 영화.
천사 혹은 천사였던 사람들
날개를 내려놓고 인간세의 길을 가는 천사 이야기의 에필로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든 전직 천사들에게 바침. 특히 야스지로, 프랑소와, 안드레에게" 하하, 귀엽다. 벤더스 자신도 천사였다는 말로 들린다. 선배 프랑소와 트뤼포(1932-1984)가 <400번의 구타>에서 보여준 바다에 대한 화답이고 말을 더듬던 존재론적 영화이론의 대가 앙드레 바쟁(1918-1958. 아, 마흔에!)에 대한 오마주일 것. 결국 벤더스가 내러티브보다 이미지로 전달하는 이러한 방식은 할리우드식 이야기 전달 관습보다는 <동경이야기>의 오즈 야스지로(1903-1963)식 영상 전달에 대한 존경 아니었을까.
길을 잃는 것은 아름다운 경험. 그러나 나는 이제 길을 잃지 않는다. 정양 선생님이 쓴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시도 그래서 썼을 것이다. 사막에서 돌아오지 않은 생땍쥐베리, 천원만 달라던 박봉우 시인, 작은키로 창부를 그린 로트렉, 그를 닮은 화가 손상기, 안동 흙집에 홀로 사시는 권정생 등 모두 대책 없이 길 떠난 사람들. 구십을 넘게 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세군도 영감님도 천사가 아니면 그토록 오래 노래를 했을까 싶다. 이 쿠바 음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독한 이도 전직 천사 빔 벤더스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다시 독일 영화사
귄터그라스의 <양철북>을 영화화 한 쉴렌도르프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만든 '뉴 저먼 시네마의 심장' 파스빈더 그리고 <아귀레 신의 분노>의 베르너 헤어쪼그가 기억할 만한 작가. 후일 작가주의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독일 영화는 <비욘드 사일런스>(1996)를 지나 게임에서 내러티브를 차용하고 테크노 음악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톰 티크베어의 <롤라 런(Lola rennt)>(1998)으로 간다. 파티 아킨 감독의 <미치고 싶을 때>도 볼만할 것. 황금곰상을 수여하는 베를린 영화제는 동구권이 무너진 후에도 계속 개최되는데 정치적인 면이 많이 퇴색되었기에 김기덕의 <사마리아>가 상을 탔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