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네 _ 앙코르와트Ⅱ
박남준시인
앙코르와트, 사원의 도시라는 이 열대 밀림의 숲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사원들이 있을 것이라고도 한다. 빠듯한 일정에 쫓겨 버스에 올라타야만 하는 내 눈에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을 싸들고 여유롭게 여행을 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부러워 보인다.
타프롬 사원을 뒤로하고 수평선의 바다와 같은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톨레삽 호수로 갔다. 물을 떠나서는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것인가. 물위에 떠 있는 마을, 수상 족이라 부르는 거기에는 학교가 물위에 떠있었다.
경찰서가 물위에 떠있었고 만물상 방물장수가 배를 타고 이 집 저 집의 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있었으며 지리산 악양의 우리 마을에는 트럭을 타고 녹음기를 틀어대며 다니는 식료품 장사가 작은 배안 가득 채소를 싣고 노를 저어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었다.
먼 물에 나가 그물을 걷어 돌아오는 어부가, 어느 열대의 숲에 들어가 불을 지필 죽은 나뭇가지들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무꾼의 쪽배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할아버지와 손녀가,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가, 삶이 다 하는 날까지 이렇게 함께 노 저어 가리. 아내와 남편이, 해거름의 호수 위에 물결을 이루며 톨레삽은 원시의 생기로 가득하다.
큰 비가 오거나 홍수가 난 강물이, 저수지가 저런 빛을 띄우리라. 꾸정꾸정한 흙탕물, 거기 한쪽에서 투망을 치며 고기를 잡고 바로 그 건너편에서는 목욕을 하고 또 그 옆에서는 빨래를 하고 다른 한쪽의 배에서는 용변을 보고 물을 길어 쌀을 씻고,
처음엔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렇게 위생관념이 없이 지저분하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그 꾸밈없이 밝은 모습들에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도대체 깨끗하고 더럽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신은 온갖 더럽고 추한 오물 속에 빠져 세상을 기만하고 위선과 이기심의 아집 속에 살며 겉모습만 깨끗한 척,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의 행태야말로 도리질을 쳐야하는 것이 아닌가.
예닐곱이나 먹었을까. 조그만 계집아이가 조막만한 동생을 쪽배에 태워 친구 집이라도 놀러 가는 것인지 노를 저어 가고 있다.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사진기를 연신 눌러대는 이방인의 관광객을 태운 큰 배가 일으키는 물살에 그 작은 배가 휘청거린다.
조그만 계집아이가 노를 젓다말고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손짓한다. 더 조막만한 사내아이가 뱃바닥에 납죽 엎드린다. 조그만 계집아이는 뱃머리에 기도를 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기우뚱기우뚱 둥실둥실 노 저어 간다. 한 점 동요가 없다. 경건하다. 동생을 싣고 저 작은 쪽배를 일상처럼 저어 가는 일이 바로 기도이리라.
오늘은 어디쯤 닻을 내려 내일을 맞이할까. 부랄 친구 개똥이네 집 옆으로 갈까. 아니면 알콩달콩 백년손님 처갓집 옆으로 갈까. 땅거미 어두워지는 물길에 물위의 집을 배에 끌고 통통통통 통통배가 이사를 간다.
그 물위의 집들, 방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환한 전기 불이, 샤워 실이, 침대가,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얼기설기 나무판자와 갈대로 벽과 지붕을 엮고 방의 한쪽에 솥을 걸고 불을 피워 일용할 음식을 짓고 부모와 자식들이 손자며느리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얼굴 표정들이 환하다니. 안내원의 말을 들으니 세계적으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마을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네온의 아스팔트와 고층아파트와 손가락을 까딱이면 지구 저 반대편으로까지 금세 나의 모든 섹스까지 송신할 수 있는 컴퓨터와 냉장고와 자동차가 행복의 척도는 아닐 것이다.
톨레삽, 물위의 외딴집, 그 외딴 집의 하늘위로 노을이 고요하다. 저 내일로 가는 하루의 고요 속에 모든 욕망의 뼈를 묻고 나도 깃들고 싶었다.
새벽 5시 30분 아직은 어두운 길을 걸어 앙코르와트에 들어섰다. 여명이 가까워질수록 사원의 밀림으로부터 새들의 노래가 날아오른다. 남방 찌르레기의 소리가, 저녁 무렵이면 내가 모악산방에서 듣던 흰배지빠귀나 검은지빠귀의 아름다운 노래와 같은 새들의 노래가 동이 터 오는 사원의 뜰에 내려앉고 있었다.
사원의 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 외국들이 대부분인 거기 사람들은 저마다 명상에 잠기거나 먼동의 풍경 속으로 삼매경에 든 듯 고요하다. 그때,
사원의 돔들이 크고 작은 윤곽을 드러낼수록 발자국 소리, 큰소리로 귀가 따갑도록 이름을 부르거나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낯선 외국어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모국어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들려오는 그 반가운 모국어들이 낮 뜨겁기만 했다.
앙코르와트에서 뜨는 해는 삼층의 석조전각 위에 솟은 5개의 돔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일출의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곳에는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잔인하리 만치 도발적인 붉은 수련이 연못을 이루고 있다.
저 수련의 붉은 핏빛을 보고 베트남의 한 시인은 그런 시를 썼다. 비 온 뒤 흙탕물의 웅덩이에 피어난 붉은 수련이 땅 구덩이에 내팽겨진 채 학살당한 누이의 죽음을 보는 듯 했다는,
그 누이동생의 영혼이 수련으로 피어났으리란 시. 문득 그 수련이란 시가 떠올랐다. 앙코르와트의 캄보디아나 베트남, 내 조국의 아픈 근현대사가 그와 어찌 다르다하겠는가.
해가 뜨고있다. 지평선의 밀림위로, 사원의 돔 위로 태양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사원의 내부는 말 할 것도 없고 외부까지 어느 한 곳 쌓아올린 돌들마다 장엄한 힌두설화가 새겨져 있지 않는 곳이 없다.
그 긴 사원의 회랑과 회랑이 이어지는 곳마다 아름다운 힌두의 선녀가 부끄러움 없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면 아름다운 배필을 만난다고 한다. 그녀의 젖가슴은 무수한 이들의 손길에 어루만져지며 검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이며 얼굴,
그리고 잘록한 허리어림까지 쓰다듬어본다.
천년 전 이 조각을 새겨 넣으며
잔영처럼 떠나지 않던
어느 장인의 가슴속에도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여인의 모습이 두 눈에 떠나지 않았으리라.
회랑을 돌고 돌아 삼층, 고소공포증마저 일게 하는 급경사의 계단을 올랐다. 앙코르와트 돔의 가장 높은 곳이며 영화 속의 어느 섬, 라파이아와 같은 세상의 중심에 나는 서 있는 것인가.
그 아래 펼쳐진 열대밀림의 숲과 빛에 의해 굴절되며 변해가는 사원의 사암빛깔들이 고요한 수면 위에 빗방울이 튀어 오르듯 거대한 파장이 되어 몰려왔다.
저항할 틈도 없이 나는 일시에 잠식당한다. 마음속 저 무저의 심연까지 웅크린 어둠들이 몰려나가는 듯하다. 잠시 그 풍경의 삼매에 들었다. 하루종일 거기 눕거나 혹은 앉아 있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여기 이 앙코르와트에 머물며 살고 싶었다.
이제 다시 올 수 없겠지. 뒤돌아볼 수 없었다. 나 이번 생에서의 인연이 오늘 여기에 다 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며 탑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다. 꼭 다시.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그리하여 뒤돌아보았다. 햇살아래 거기 힌두의 선녀,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