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김일무선 “이 동네 내 손 안간 테레비가 없제”
최정학기자
전주한옥마을의 동학혁명기념관 앞, 일명 은행나무길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마치 1980년대 어디쯤에선가 시계바늘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한옥마을 곳곳이 변화의 물결로 일렁이고 있지만, 아직 이곳엔 작고 낡은 가게들이 세월의 더께를 얹고 길옆 곳곳에 앉아 있다. 그 중에서도 골목 귀퉁이 허름한 건물에 ‘김일무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작은 가게가 눈에 띈다. 간판 아래엔 낡은 유리창이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덜컹덜컹 소리를 낼 것처럼 달려 있다.
가게 안에 들어가자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어디쯤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낡은 전자제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Goldstar’ 상표를 달고 있는 제품들도 많다.
“1967년 전주 중앙동에 있는 금성센터에서 처음 기사일을 시작했어. 그러다가 1974년에 태조로에 전파상을 차렸지. 그때 우리 가게 옆에 사진관이며 구두방, 세탁소, 자전차포도 있고 길 건너 앞에는 고기집도 있었고 모도 있었어.”
‘김일무선’을 연지 33년, 한옥마을의 변화와 함께 가게도 이곳저곳을 돌다가 2년 전쯤 이곳에 자리 잡게 됐다. 하지만, 주인아저씨의 손때 뭍은 장비들이며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 전자제품,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다.
“가게 이름이 재밌지? 내 이름이 김일환이여. 가게 이름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아는 형님이 내 이름에서 ‘환’자만 빼라고 하면서 지어준거여. 그때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이가 한창 날리고 있었거든. 1974년도에 김일이라면 대단했지. 역도산도 있었지만, 역도산은 그 전이고. 역도산 제자가 김일이란 말이여. 근데 김일이가 일본가서 막 이기고 다니니까 맥없이 좋은거여. 박치기로 이기믄 난리가 났제. 김일 경기한다고 하면 테레비도 말도 못하게 팔렸어. 앉아서 쉴 시간도 없었으니까.”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의 얘기다.
“테레비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서로 막 살라고 했었제. 그래도 도지사랑 기관장들은 필히 줘야잖아. 물량은 귀하고. 그래서 나머지 갖고 사람들이 제비뽑기해서 가져가고 그랬제.”
하지만, 김일환 씨가 가장 재미있었던 때는 따로 있다.
“진공관 테레비를 트랜지스터로 바꿀 때가 젤로 좋았지. 당시 테레비가 다 진공관이었는데, 트랜지스터가 나온거여. 진공관을 빼고 트랜지스터로 바꿔 넣으면 전기도 적게 먹고 깨끗하게 잘 나온 게 많이들 고쳤제. 직원을 세네명씩 데리고 일했지. 그때에는 전주에만 해도 전파사가 180군데가 넘었었어. 그래도 내 나이가 올해 예순일곱인데 전주에 나만큼 오래한 사람은 없을 것이여.”
오래한 이유도 있지만, 텔레비전 수리 하나만큼은 김일환 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한창때에는 전주는 물론이고 진안, 김제, 남원 등 각 지역의 업자들이 김일환 씨에게 수리를 의뢰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전자제품수리점들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옛날에는 밥통 하나 고쳐주믄 얼마, 선풍기 하나 고쳐주믄 얼마 해서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워낙 싼 중국산이 들어오면서 누가 고쳐 쓸라고를 안해. 선풍기 하나 고칠려면 만오천 원 정도 드는데, 중국산 선풍기 하나에 3만원이 채 안가. 누가 고쳐 쓸라고 할 것이여. 그래도 중국산이 겉으로는 빤질빤질해도 오래 못가서 고장나, 여기 있는 것들이 국산인데 오래되았어도 요즘 나오는 중국산보다 훨씬 좋아.”
물건 고쳐 쓰는 사람은 드물어도 김일환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9시면 문을 열어 오후 5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3년 전에 풍을 맞았어. 그래서 작은 것들은 손이 떨려서 하도 못하고 해봐야 큰 것들이나 조금씩 해. 그래도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빠지는 날 없이 나와서 문을 열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이것밖에 없고, 집에 쭈구리고 앉아 있음 뭐허겄어. 여기가 말하자믄 나한테는 쉬는 장소라고 보믄 되제. 친구들도 왔다갔다하고. 뭐라도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운동도 되고 좋아. 이 일을 하고 있으면 치매라는 것이 없어. 계속 생각을 해야 하니까.”
요즘 ‘김일무선’에는 물건을 고치러 오는 사람보다는 한옥마을에 들른 방문객들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이 더 잦다. 한옥마을에 가서 ‘김일무선’을 보거든 구경만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흥정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하다. 비록 낡았지만, 김일환 씨가 수리한 ‘쌩쌩한’ 물건들이 무척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