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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 | [ 명인명장]
"광산에 돌아 댕기는 것이 꿈에도 자꾸 흘려 보여" -2
(2014-02-14 17:02:40)

어떻게 안죽고 살았는가 몰라

그리가지고 거기서 인자 노산을 갔어 노산. 거기에 신사군하고 그께 민주주의라고 않고 뭐라 그러냐 중국군이제 중국군. 낮에는 노산에가 중국군이 와있고, 밤에는 신사군이 와있고. 그래요. 분열이 되아. 그리서 헐 수가 없어. 거기서 먹고 살수가 없어 도로 빠꾸를 해서 포로 생활을 인자 나온것이요. 그래가지고 광복군은 인자, 친구들이 있잖아요. 친구들이 그리서 친구들은 따라온 사램도 있고, 거가 머문 사램도 있고 그랬지요. 모도 죽었구만 인제. 몇사램 죽었는디. 그 뒤로 사램들은 나와서 다 관직에 가가지고 다 생활을 잘했어, 그란디 나는 못갔어. 그 사램들은 그냥 광복군 생활을 오래했고, 게 나보고 같이 가자고한걸 나는 못갔어. 집 살림살이가 여의치 못해가지고.

그리가지고, 저 식사해결이 안되잖아요. 광복군 생활 할 적에. 그저 그때 뭐냐 금구를 주석이라고 했거든. 김구. 그분을 만나도하고, 그때 몇번 만났지. 그 거도 분열이 되아가지고. 참 백범 선생이 애를 쓴 사램이여. 참 많이 애를 쓰고, 독립투사고 애를 많이 쓰신 분입니다.
그 생활을 오래했으믄 여기 지금 못왔을지도 몰라요. 죽었을지도 모르제. 싸우고 죽고. 안되믄 지금으로 말하믄 우격다짐으로 막 싸우고. 광복군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참 애로운 생활이에요. 힘들어요.

그때는 인자 기억을 못혀. 이것은 내가 집이서 한복을 한 벌 갖고 왔는디, 옛날 집이서 면배로 만든 쪼그만 반바지를 갖고 왔는디, 거그다가 몰래 숨겨서 온것이요. 고거는 내가 생명이라고 찡궈가지고 왔는디. 요것만 요것만. 사램 뜻이제. 말하자믄.

일본놈이 중국사램 많이 죽였어. 그냥 밤에가믄 밤에 행군하믄, 그냥 포리가 그냥 등께등께해서 보믄 시체가 나와서, 늘 행군한디, 뭍는 방도도 없고 그냥 내비려 방치해두고. 소죽었제, 사램죽었제, 말, 군마 죽었제. 일본놈들이 못먹을 때는 군마도 잡아먹어. 말고기도 먹어봤어.
노산은 구강옆에가 있거든 구강, 아홉구자 물강자. 구강옆에가믄 보여 그냥. 양자강에서, 우리가 가는 양자강이 이렇게 쫍은 데가 있거든, 이렇게 여기서 한 삼미타 거기를 뛰어야 노산을 가게되아. 거그를 못뛰는 물에 빠져죽어. 쫍은데는 물이 짙고, 너룬데는 물이 나찼거든. 그 양자강 거그를 어떻게 갔던가 몰라. 그냥 끄꼬 갖던가벼. 친구가 있응게. 양자강은 물이 흙물이거든 흙물. 그래가지고 인자, 좁고 너른데 가서는. 그때 어떻게 안죽고 살았는가 모르겄어. 죽자사자항게 몰라.

해방된 뒤에 포로가 되았지 인자. 아 일제가 해체가 되아서 해방된게 아니겄소. 아 그때 우리는 몰랐당게. 인자 어떻게 알았는고허믄, 일본놈이 총있잖에 총에 마크가 있었거든. 일본 사쿠라 마크가 있었는디 그걸 전부 갈라고 그러더라고, “돌로 전부 갈아라.” 그때 해방된 줄을 알았어. 그때. 마크를 갈라고 해방됐단 소리는 않고. 그때 쌈을 얼마나 많이 했는디. 해방된 뒤에도 쌈을 많이 했어요. 나올라믄 뭐냐 중국놈이 막고 있잖아. 다 죽일라고. 아 어쨌든 일본군인게. 아 일본군아녀. 그래 아 싸움이 많았어, 작전이 많았었어.


그놈을 끄꼬 동네를 세바쿠를 돌았어

우리 친구가 하나 있는디, 내가 “우리 친구 아무개를 오라고해라, 일본놈들 느그들 따메, 나를 여그서 죽여라. 고향을 가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잖냐.” 그놈들이 친구를 데려왔더라고, “이사램이 미쳤냐고”. 이사램이 미쳤냐고, 허허. 그 사램이 적절허니 그냥 “그런가도 모르겄다”고. 미쳤냐고했어 미쳤냐고.

아 여기서도 장수경찰서도 살살 피해가믄 모르는디, 멍청하게 그 사램들 욕허고, 아저 그 사램들 밀적꾼을 뚜뜨러브렀네. 밀쩍꾼을 어쩌고 뚜드렀는고허믄. 하도 그래싸서 요밑에 그사램 밭하고 우리밭허고 경개선이 있는디. 밭을 요 울타리를 막거든. 서로 못가게. 나는 그때에 열아홉살 묵었고, 그 사램은 부잔디, 여그 저 뭐냐 밸장같이 잘해놓고 살았거든 근디 그사램이 그 밀정이여. 그놈을 끄꼬 동네를 세바쿠를 돌았어 내가. 힘도 그때는 내가 좋았어. 그놈이 근디 옷도 옛날 명주바지라고 있잖아, 그리 고추대를, 먹는 고추. 고리 옛날에는 따묵고 나서 베거든. 그럼 등걸이 있잖아. 글로 끄꼬 댕겼어.

이놈이 우리 한국을, 조선사램을 반대하고 일본을, 이 친일파다 이놈을 죽여버릴란디, 여러이 보라고 내가 끄꼬 댕겼어. 동네사램들 다 알아 우리나이엔 다 알아. 소문이 나서 다 알지. 장수사램 다 알아. 아 그래가지고 그놈을 그리놨으니 온전하겄어. 그리서 인자 잽혀갔어 잽혀가서. “니가 그랬냐?” 그래서 “아 그렇다. 아 일본 나쁜놈 아니냐, 아 우리나라가 따로 있는디 이놈 나쁜놈 아니냐” 그랬더니, 지방에서 연판장을 올렸어. 그 청년을 죽이서는 안된다. 그리가지고 연판장을 올리고 벌금, 그때돈으로 쌀로 말이여 팔십몇가마닌가. 돈도 없잖아, 팔십몇가미니가 더되아. 근디 아버지가 그걸 다 물어냈다고 빚내고 동내에서 말하자믄 겆어줬어. 그러고 풀려나왔어. 많이 맞고, 많이 맞았구만. 역경을, 내 역경이라는거는 ‘역경의 계절’이라 쓰다가 못썼당게. 걸 써놓고, 자식들이 여가 있으믄 뜰러보고 그거이 모범은 안되지만은.

내가 지금도 상당히 지금 정부에 대한 생각이 많은디. 지금 우리나라 땅을 다 팔아먹잖아. 생각해보시오. 여 우리나라사램은 낭중에 외국놈한테 가서 고용살이 해야되아. 아 은행같은거 다 고용살이 줘버리믄 안되아. 그걸 그렇게 정치를 하믄 안되아 그걸 줘서는 안되거든. 가급적이믄 덜주고 우리가 살아날 길을, 덜묵고 배를 좀 곪고 그리 살아야되요. 그것이 씰때없는 내 고집이고 씰때없는 내 마음이요. 아 지금 잘 먹고 잘 사는디 뭔소리냐고 말이여. 그래 지금 이렇게 된다면, 지금 지구촌아녀 지구촌. 이것이 서구문화가 백년이나 이백년 뒤에는 후퇴하는 거나 또 다시 돌아와요. 내 마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지금 중국이 왕성해가거든 중국이. 중국인 멍청하고 잘한건 아녀. 근디 중국에서 일본 국민은 일등국민, 중국은 이등국민, 우리 한국사램은 삼등국민 그래가꼬 포로생활을 했거든. 그런디 참 멍청한 것이 중국사램이다 이것이여. 멍청하고 모르것는 것이 중국이여. 중국은 집을 어떻게 집을 짓는고 허니 사대문을 열어놓고, 네반데 문을 내놓고 전부 다 막혀버렸어. 그리고 큰 판자로 싸가지고 문을 만들아. 그래 못들어가게. 때부술라믄 말이여 몇 사램이 와서 돌로 말이여 때리부수고 하는데 시간이 걸려. 그래가꼬 들왔다 하믄 도망가니라고, 일본놈들이 들왔다하믄 도망가니라고. 그란데서 생활했어요. 참. 쓸때없는 얘기했네, 쓸때없는 얘기했어.

다 죽었다 그랬지

그래 밤에는 도망가고 낮에는 밥묵고 살고, 애 먹었지. 아 중국, 일본놈 씨를 말린다고 그랬어 씨를 말린다고, 중국민족 얘기를 들어보믄 일본 씨를 말려야한다고. 근디 우리나라가 일본놈 앞서질 못하겄소인, 앞서질 못하겄어, 좀 앞서야겄는디. 앞서야겄는디. 우리는 죽어도 후손들이 얼매나 고통을 받겠는가.

광복군은 조직이 있거든. 조직이 있어서 인자. 중국사램이 아니믄 광복군 활동도 못해요. 중국사램이 도와줘서 광복군 생활을 하지. 어 뭐 금구주석이고 이청천 장군이고 못혀, 생활을 못혀, 아 먹을게 있어야 생활을 허지. 중국사램이 후원해주고 연락해주고 그니까 생활을 하지 못혀. 그믄, 들왔다가그라 밥멕여주고, 중국사램 덕 많이 봤어요. 밥 얻어묵고. 또 우리 한국애국지사들이 아님 못혀, 우리 애국지사들이 뒷돈을 대주니까 전부 뒷돈을 대주니까.  

광복군에도 조직이 있어가지고 명령에 움직여야지 명령에 안움직이믄 안되아, 밥이라도 얻어묵어야 항게. 광복군생활을 헌다고하지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간 사램도 많아. 사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게. 요새 그런 소래해선 안되지 안되지만은 사실은 그려 사실은. 애국지사들이 많이 있는디, 지사들은 굶고도 많이 하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램들은 그랬었어.  

해방 생활을 아까 말과 같이 한 약 이년. 그렁게 여기 연도를 보믄 알지마는 내가 갑신년에 가가지고 병을년에 들왔응께. 에 뭐냐 포로생활을 한 일년 한 폭이죠. 일년, 일년은 안되았을랑가. 그래가지고 뒤늦게사 귀국 했지요. 그래 실은 없는거, 다 죽었다그랬지 다 왔는디 안온게. 연락도 안되고. 스물시살 때 들왔는가. 스물시살. 잘 기억이 안나지만은, 일구사삼년 구월달에 끌려가서 그리가지고 일구사육년에 돌아왔구만.

그전에 인자 어채피 한학을 하다가 시절을 배신을 하믄 안되겄다 싶어서, 지금 같으믄 초등핵교를 갔지요. 그때는 보통핵교라 그랬어. 근디 일년이믄 출석일이 단 두달도 못되아. 근디 성적이 우수했어. 그리서 최씨 문중에서 잘 좀 뒤를 받자해서 보내야겄다. 그래 종중에서 모금을 히가지고 했는디. 내가 집 사정따메 못갔습니다. 집사정따메. 집이가 나 아니믄 먹고 살수가 없는디. 그서 그 글이. 그리 모도 지어논 글이 있지요. 그때에 지어논 글이 있지요. 그때야 글을 좀 했으니까. 그때야 주경야독을 했으니까. 지금도 한학이라믄 내가, 그냥 너만은 다 뵌다 헙니다. 한학이라믄, 쪼끔 알아요.

그렁게 한학을 배운게 “저놈은 정신이 틀린 놈이다” 늘 갖다가 불러싸 늘. 그래 내가 저 장수경찰서 조회를 했더든 “내 서류를 좀 봐도라” 했는디, “없다그려”, 거 뭔소리냐, 찾아본다고 한디 없어졌다네. 없어졌다그려. 왜 찾을라고했냐하믄, 하도 그 장형사라고, 장가란 놈이 형사가 하나 있는디 귀찮게 굴어서 그놈 자손이 어떻게 좀 되았는가 볼라고, 이 뭐 복수는 못허고 어떻게 되았는가 좀 볼라고 조회를 했는디, 그 안나온구만.

옛날에 죽검이라고 죽검. 대로 맨든 죽검이 있는디. 그거이, 하도 때려 싸믄 여가 피가잽혀가지고 딱 들어앵겨버려. 집이가서 “너 오늘 당하지 않앴냐”, “괜찮습니다.” 아 그런디 옷을 벳겨봉게 여가 인자 옷이 딱 붙어있잖아요. 피허고 절여가지고. 울기도 많이 울고, 나라없는 설움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에 많이 겪었어.


참 귀중한 물건으로 알았는디

공장은 삼대가 더 되았지 인자, 우리 손자가 손자가 헌다고 하면, 우리 아들이 나이가 칠십이 다되았거든, 내가 아를 둘 나놓고갔었어. 십오세, 십오세에 결혼을 했어. 아를 둘 나놓고 갔었어. 그리서 그 아들이 지금 육십팔세, 육십여섯이냐, 경신생인게, 그 아들이 지금 허고있응게 삼대여. 근디 그밑이는 안헌댜. 안한댜. 나는 이걸 꼭해야한다고 하는디, 안한댜. 그 전에 이 사업은 보통이 아니고 애로웠어요. 역경 속에서 애로웠습니다.

옛날은 이 손으로 이르케 가동을 하고 벨트같은 것이 없어가지고, 옛날은 칡을 껍데기를 벳겨가지고 칡을 영거가지고 나무또 짜가지고 거기다 해가지고 돌렸거든요. 손으로 사람이 손으로. 그럼 이해가 되요? 먼말인지 이해가 되요? 지금은 기계가 뿌레라고 있잖에. 뿌레. 지금은 이게 막 돌아가는데, 옛날엔 이런 벨트 같은 것이 없응게, 돌린 것이 없응게. 짚으로 하믄 그냥 막 떨어져버리고, 칡을 벳겨가지고 그놈을 따가지고, 꽁꽁 따가지고 찡궈서 그놈을 돌리믄 따라 돌아가거든. 그리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선고께서 좀 심이 들었지요.

나는 따라만 다녔지만은, 내 선고께서 그걸 창업을 하시느라고. 그리서 수공예로, 그러고 인자 기계도 주물로 한 것은 큰 놈으로 해야 돌아가거든, 주물로, 작은 놈은 심이 없응게 큰놈으로 움직여야 돌아가는디, 사램이 돌렸어 사램이. 사람이 둘이 돌리고 하나는 대주고, 허허참 거 우스운 소리지 지금 생각하므는. 사실이지만, 거참 고시절에 얘기요 허허 들어봐. 이것을 찡궈놓고 한사람은 손을 이리 잡고 있고, 한 사람은 또 기냥 돌리고, 참 그러믄 칡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아 거 몇번 돌리믄 떨어질 거 아니요. 그렇게해서 한개 두개 깎았어요. 이래가지고 글 연마해서.

그러믄 그때와 현재, 그리서 비교해서 참으로 귀중한 물건으로 알았거든. 저거 귀중하다. 지금은 막 이렇게해서 기계로 막 나오잖아요. 그렁게 지금 헐 일이있고, 지금도 수공예로허면 사업이 번창할턴디, 우리 아들은 귀찮다고 안할다고 그려. 누가 와서 그짓하냐고 안할라고 그려요. 느그할아버지께서 창업하신일이니 이것을 우리가 먹고 살고, 또 한국에서 참 대접받고 그랬습니다. 그리서 이걸 계속을 해야겄다. 그런디 안할라고그려.


돌이 하도 이상스럽고 안터징게

그렁게로, 에 일구, 내가 이삼년 생잉게로, 삼삼년이나 되었겄소. 삼삼년, 오래됐죠인. 그 전에 증조할아버지께서 좀 했거든. 아버지께서는 인자 그걸 연마하셨지마은, 창업은. 그, 돌이 뭔지도 모르잖아요. 돌이. 돌로 그런걸 맹글지를 모르잖아요. 그 돌을 깎아 써봉게, 안터지고 불을 때도 안터징게 이거 쓰겄다.

산에 산구갱 가셨다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금부도사여, 금부도사거든요. 그리서 인자 낙향했거든. 몰려가. 지금 같으먼 정부제. 그때로는 대궐안서 걸려가지고, 좌우간 충신은 걸리잖아요. 아부한놈이나 살제. 바른말 허다가, 그때에 그 양반 말씀이, ‘사램을 팔아냉기고 팔고 사는 것은 안된다’ 그 상소를 올렸거든. 그다 걸렸어. 그래 걸려가지고 꼼짝없이 떨어져나가가지고 온다는 것이 남원으로 와가지고 여기로 들왔어요.

그래 먹을 것이, 먹을 것이 없잖아요. 그서 인자 그냥반이 들와가지고 아들 데리고 산에가서 바람도 쐬러 간 것이지만은, 먹을 것을 인자, 나물이나 캐러간 것인지 모르제, 먹고 살라고. 그러다가 저물어서, 날이 저물어서 산에 자게 되았는디. 인자 불을 놓고 잘거 아니요. 그 돌 옆에 놓고 있는디, 돌이 하도 이상스럽고 돌이 안터징게. 금부도사도 희한한 것이 돌솥이 되겄다. 그리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요. 그러지요.

그런디, 말하자믄 그간에 심도 들고 쪼끔 뭐 한다 하신다고 고생도 허고 그랬지요인. 그러고 하루에 식사를 다 세끄니를 못먹고 말이요. 두끈이나 한끄니 그냥 그저 산에 가서 나물 캐서 먹고 그라고 살았지요. 아 누가 자기가 일을 잘히도 못먹고 산디. 아 저, 관직하다 내리와서 뭐 할거 있어? 갖다주믄 먹고 그란하믄, 굶고 그랬어요. 내 직접 본 건 아니지. 할아버지니까. 그렁게 내가 맹글적에 전부 처음이요. 전부 처음이여 그렁게 어떤 사램이 할줄 모르고, 뭐 우리볶에 못헌걸로 알았제. 그런 얘기 허도 못허고, 허믄 “우리것인디 왜 느그가 하냐?” 허도 못허고 그랬지.


곱돌생활은 내가 자부를 혀

이 곱돌 생활은 내가 그냥 자부를 혀, 근디 지금 우리 아들은 그게 쪼까 아쉽구만, 좀 기계도 돌려야한디. 그러고 그 점차 돈많은 사램들이 크게 하니까 그사램들 크게 한걸 쫓아는 가서는 안되거든, 옛날대로 그냥 그대로 하믄 되는디,

귀찮하고 사램들 다루기가 젤로 힘든가벼 사램들 다루는 것이. 요새 머냐 그란해도 돈벌이가 쌨는디, 여기는 말여 급여도 많이 안주고. 여기 많이 있을 때는 한 이백명 같이 데리꼬 있었거든 내가. 그때 성황하고, 잘될라고 했는데, 차차 인자 기계가 나서 사램을 줄이고, 광산을 내가 직영을 했는디, 광산에 말이 많잖아요. 까탈스러워 뭐냐 여기 허가문제라던가 여러 가지 문제라던가 차차 손이 떨어지지요. 근디 그것이 아니믄, 내 생활은 생활할 수가 없어. 지금도 내가 젊으믄 헐 것이 많어. 그런디 사램들이 볼적이는 저사램이 노욕이 났다고 노욕. 늙은 욕심이 났다고 그럴 것이여. 능력이 없고, 그러나 사실은 그걸 우리 아들이 꼭 히야겄는디. 근디 손자들은 말이여 안시킨다고그려.

손자들이 많거든 손자들이 큰아들에게도 손자들이 서이가 있고, 서이. 세사램이 나서 다 식견이 즈그가 알만큼 다 운영할 수 있는 식견을 가졌는디, 그러나 안시킬라그려. 안시킬라그러고.  

상당히 힘이 들었지요. 이 그렁게로 머시냐 그 인자 그때 수송, 손으로 수작업 때는 가친 때는 따라만 봤고, 내 선고께서 심이 들었지요. 심이 들었어. 공장도 멀어, 멀어. 질 좋을띠 걸어가믄 한시간, 딱 한시간 걸리네. 내가 젊어서 올라간디는 40분, 내려온디는 35분. 그래 꼭 걸어댕겼어. 매일. 매일 댕기고. 어떨때는 눈이 이렇게 오는게 아니라, 이렇게 와, 눈을 밟어대믄 폭 빠져. 그리도 꼭 갔었어, 수를 냈어. 꼭 갔었어.

그란해도 그때만해도 석산이는, 광산에는 가시랑철이라는게 있었어, 가시랑철. 가시랑철이라는 것이 요시같으믄 철을 두개를 놓고 위에다가 구르마를 놓고 구르마 끄꼬 댕긴거, 그래 독을 끌어내고 잡독을 끌어내고 독을 추려가꼬 오제. 그렁게 산이 인자 현재는 많은 일을 해야 독이 나오지만, 그때는 쪼금 파믄 독이 나왔으니까.

지금도 돌구녕에 들어가믄 이렇게 방이 있어 방이. 방이 있는디 저번이 가봤더니, 내가 하도 궁금해서 차를 몰고 가봤단 말여. 근디 길이 사나와. 차를 버리고 갔었는디. 그냥 먼디서 쳐다보고만 왔어. 거가 머시 있는고하먼, 막사가 둘 있거든, 옛날 말로 숙사. 숙사가 인자 우리 직원들이 사는디, 나하는 끄트리에 가서는 한 이백명 되았으니까, 한 백명 씩 백오십명 이백명, 한창때는 이백명 있을 때가 있어.

지금 가본게 막사가 폐허해 가지고있대. 없어진건 없어졌지마는 그냥 그대로 살아있던게 있더라고. 그래 내가 나이만 젊으믄 전부 정리를 다시한다고 싹 정리를 깨깟히 하고, 옛날거 뭐 남이 볼 수 있게. 나도 일 하나안하나 말이여.

공장에는 열댓명 한 이십명 되았어. 돌띠어내는게 그리 힘이 들었어. 흙을 지어내고 잡석을 지어내야 돌을 띠어오니까. 그때는 광이 두갠디, 갑호공있고 을호공이 있었거든, 갑을해서. 그러고 감독이 셋이고, 그래 감독이 있고 화약주임이 있고 발파주임이 있고, 그리 있거든. 저 발파남포 기사가 있고. 그래 어떻게보믄 쇠덩어리를 놓고 정으로 때려서 굴을 뚫어, 굴을 뚫어가지고 거기다가 화약을 댕기고 불을 피거든.

돈따메 그렇게 못허고 확 불어나덜 못허고 불어나덜 못했어. 그래 요새 산출을 해봤고, 그 인자 그 우리 아들이 허니까 잘하도 못허고 사실은 돈이 수입도 안되고. 그때 일본 때는 돈을 많이 줬는디.

석기값을 많이 받았어, 그리고 내가 일본놈을 안좋아혀. 일본사램을. 내가 반일파거든 그리서 일본놈한티는 석기대를 많이 받았어, 돈을 많이 받고 우리 한국사램은 덜 받고. 값이 차이가 있어, 일본사램은 배를 더 받었어. 요새는 일본사램이 돈을 많이 안줘, 쪼깨 줘. 요새는 일본 사램이 아조 인색혀. 그때는 일본사램이 그 참 순했어, 허잔대로하고, 나 허잔대로 하고. 지금은 안그려.

개발도 많이 했지. 약탕기도하고 도구통도하고 이름이 여러 가지여 약탕기 절구통 화로, 화로를 젤 많이 썼거든, 화로 다듬돌, 뭐냐 절구통 인자 그다음에 인공으로할 때 그런거 많이 ?어. 그렁게로 없는게 없이 다했제. 화로 절구통, 냄비 뭐 약탕관, 예술품을 좀 많이 했제. 지금도 저쪽에 가믄 있는디, 그 예술품이 그저 신문에 보믄 나와있제. 내가 저 전시를 한번 할라고 했었거든 전시를, 그런 것이 지금도 전시를 하믄 그 작품이 한 백점 이상이 있응게. 문제가 있어서 결국은 실내하나를 차지하고 있제.


부지렁무지렁한 짓을 많이 지냈지만은

다 잃어버렸구먼, 어떤 때는 작업은 안되고, 사램은 그때는 사램이 지금보다 좀 수월헌, 많은 폭이여 전부 인력으로 했으까. 음력으로 정월초하루날도 일을 했어. 음력으로 정월초하루날. 주문와가지고 일본이서 와가지고 안가고 그러므는 별수없이 해줬어. 그래 그 직원들이 참 감사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믄 참 감사하고, 지금 생각해보믄 그 사램들 죽었는디, 비를 하나 세워줘야 내가 옳아. 참 고마웠어, 어떻게 누가 정월초하루날 일을 해준가. 누가해줘 요세상에. 내가 한말이믄 그냥 다해줬어.

실은 석기를 많이 안한 것은 내가 확장을 해서 많이 안했기 때문에 모도 버려진것이여. 내가 해버렸으믄 다른사램도 못허지요. 그때 법인을 해가지고 장수군에 법인이 구성됐었고, 사단법인 장수석기거든요. 장수석기조합, 사단법인 장수석기조합. 지금도 그래 장수석기하믄 나를 알지.

인자 우리아들이 혀, 우리아들이. 근디 한 십년가량 애를 썼는디 그머 조합장인가 뭔가 한다고 그거하다가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또 좀 했제. 그렁게 작년 4월 17일인가 그저 정년을 했거든 우리 애가 퇴임을 했어.

그뒤에 다시 또 보고, 그전에도 계속 한 십년하다가. 전부 원래 글을 하는 집안이라서 그때에는 장수군에 대핵교 나온 사램이 한 세명 정도. 장수군 군내에서 세명 정도. 지금 아마 대핵교 안나온 사램이 없을걸. 다 지금 대핵교 나왔지. 그때 학교를 보내가지고 머냐, 좀 어떻게 허다가 결국에 이일을 붙들게 되았제.

그 우리 아들도 얘길했는디, “지금 젊은 사램들이 현명해서 잘합니다. 한말하믄 두말않고 그럽니다” 해서. “너는 왜 못허느냐.” 근디 요새 애로운 점은 내가 공장을 허니까 그 공장을 우리 손자헌티 주믄, 아 개발해서 딴 사램도 허는디, 아 허던 일인게 찾는 사램이 많아. 찾는 사램이 참말로 많아 많은디, 어째서 거기 맡겨 주믄 잘헐수도 있고 못헐 수도 있잖아. 근데 아 지금 시키지도 않고 있다고 현재. 아 그걸 시키지 않고, 안시켜.

근디 우리아가 지금도 하긴허고 있는디, 어제 주문도 오덩만. 근디 그 심을 안써. 마음씨가 너무 고지식허고 융통성이 없어 우리아들이. 그래가지고 하나에 하나 밖에 몰라 하나에 둘도 모르고 셋도 몰라. 그리서는 장사는 안되요. 장사는 안되아. 그저 공과를 나왔거든 공과를 공과를 나왔는디. 공대에 공과를 나왔는디. 좀, 넘에 실수않고.

애로가 있다믄 돈도 많이 필요가 없었는디, 광산을 인자 채토, 흙을 파내고 잡석을 패내고 그래야거든. 사램이 많이 들거든 사램이 많이 들어. 돈이 거가 다 들거든. 돈이 모자라가지고 애를 먹고 돌을 못파낼 때가 많이 있었어. 그래 내가 결국 크게 히버렸으믄, 다른 사램이 뭐 허도 못허거든. 근데 내가 못해버링게 그 양을 못댕게 여기저기서 막 여그저그서 너도나도 물땡기 개땡이 쇠땡이 다나왔제. 이쪽에 많아, 많이 나왔어. 근데 돌아 나빠. 돌이 여기 돌만으로 쓴것도 아니고 저기 저뭐 강원도 돌도 나온다 충청도 돌이 나온다. 돌이 안좋은 것이 나와가지고 석기 이미지가 안좋아.

그래 그때에는 주문이 오믄, 버스로 갖다 날라야되아, 버스로. 뭐 차로 한차가 넘친게 버스로 갖다 날리고 들고 날리고 운반도 하고. 또 묶어 논 것은 옛날엔 이런 노끈이 없었어. 전부 새내끼. 새끼를 꽈가지고 날리고. 그놈 안되고 그놈 모지라믄 칡을 써가지고. 참나 지금 생각해보믄 지금 누가 그런거 듣도 안고 그런 일이 있으까 싶으요 지금. 새끼, 짚으로, 새내끼로. 새끼줄을 놓고 또 한쪽이는 새끼줄을 꼬고 그랬지요.

그 역사는 부지렁무지렁한 짓을 많이 지냈지만은 다 잃어버리고. 인자 요새는 꿈을 꾸믄 내가 저번에 글을 배운 꿈. 저 산에 가서 그 돌아댕기는 꿈. 그런 꿈을 많이 꾸구만. 그래 그전에 내가 데리고 있던 직원도 다 죽었거든 많이 죽었어. 그 직원들이 늘 같이 지금도 와서 반겨하고 같이 만나고. 그 죽을라고 그러나 생각했는디 그 늘그런게 그 죽는거 아니구만 죽는건 아니여. 그새 그것이 싹 영상이 되서 나오더만, 그것이 꿈에 흘러보여. 꿈에 내말 잘듣고 참 내말 잘들어. 시긴대로. 시긴대로.

그러고 인자, 돌이 내려가믄 멀리 내려가잖아 둥그르면. 그런것도 인자 가시랑철, 그 말하자믄 지금 철도 있잖어 그걸 가시랑철이라 그려. 작은 것은 가시랑철이라 그려. 산에는 그걸 썼지. 그래서 인자 아까 그걸 하면서 내가 지방의원을 하면서 인자 쪼깨 도움을 받았고.  
우리아들이 인자 그런 것을 사실 간섭을 하면 싫어한 기운이 있더만, 싫어해. 젊은 사램들이 자꾸 잔소리해싸니까. 가믄 “자꾸 청소를 잘해라”, 잔소리를 하러 가거든 긍게 그래서 그거를 눈채를 채고는 이번에 서울에 가서 한 두달 있다 온 것은 이것저것 관여를 안히야겄다.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 지금 시대가 문명을 촉구하는 시댄디, 옛날, 그런디 그렇도 안더라고 내가 보믄, 지금도 젊은 사램 멍청한 사램 쌨어. 멍청한 사램 쌨어 보믄.


하루 내 한 개나 할똥말똥 처음에 했었소

그때에는 그냥 평범하니 돌을 가따 가공한게 아니고, 기계가 그때는 없으니까 도롱대를 크게 만들어가지고 무쇠로 만들어가지고 무쇠로, 둥그럼허게 원형을 만들어가지고 그놈을 사램은 돌리고 또 한쪽이는 칼을 채워가지고 붙잡고 기계를 집어가지고 있고, 그렇게 한 세사램이 한조가 되아 가지고 하루내 한개나 할똥말똥 그러게 처음에 했었소.

그러다가 그것도 역시 안되아서 그 머냐 지금은 기계를 돌리는디 벨트가 있고 벨트를 전기로 막 돌아가지만은, 그 시절에는 암껏도 없어서 칡으로 엮어가지고 그 벨트를 맨들어가지고 돌려다가 그러다가 인자 얼만큼 진도가 되아서 그러믄 그 벨트를 어따한고하믄, 물레방아 물방아에다가 물방아는 방아찢는거이라 양쪽에가 누른것만있지, 나무를 누른것만 있지 도롱대는 없거든. 도롱대를 이런 둥그런 원형을 구르마겉이 만들어가지고 그놈을, 그 수차가 돌아간디 가운데 심보에다가 맨들어가지고, 가운데 물은 돌아가고 가상에다가 심보를 이렇게 맨들어가지고 찡궈가지고 원동에다가 찡근다고 원동에가 찡궈가지고 물이 돌아가믄 그것도 같이 돌아. 그래가지고 가공을 시작했었소.

그러다가, 그래가지고 한 십년가량 십년, 이십년가량 그거하다가 그다음에 인자 발동기라고해서 옛날 기계발동기, 발동기라믄, 발동기 손으로 움직여가지고 돌려, 그라믄 돌아가. 그놈을 너가지고 그놈으로 인자 원동기에 달아가지고 가공을 해봤소. 그래 기계로 해서 기계로 한다는 것이제. 그것을 시작해가지고. 그래서 한 십년, 십년 더있다가 인자 전기가 들왔지요. 전기. 십년. 그래 아이고 한 전기가 들온지가 몇십년 안되아. 전기가 인자 들와서 그러믄 공장에는 불을, 남포등이라고했어, 남포등. 그 불을 써놓고 그렇게 했어요.

인자 그리고 그렇게 인자 해가지고 연마하는 것은 전부 손으로 돌려가지고 손으로 문대가지고 손으로 했지요. 마광은.
인자 처음엔 특별한건 안하고 솥, 말하자믄 밥해먹은 솥이라던가 약다리는 약탕관을 젤로 처음번 했고. 솥을 만들고, 그다음에 인자, 또 모형이 나오면 모형을 허고, 그전에는 긍게 뭐 불고기판이다 이런거 암껏도 없었고, 처음에 약탕만 맨들어서 한 십년이나 맨들다가 그러다가 인자 그다음에 뭐냐 솥을 맨들고, 그다음에 인자 전기가 들왔단말이여 전기가.

전기가 들와서 전기로 인자 거 말하자믄, 소위 기계화한 것이지 손으로 인자 수작업을 손으로 대고 인자 기계만 돌아가믄 되게코롬 되았지. 그리가지고 현재까지 헌거지. 그러다가 전기가 들와가지고 또 한 십년, 아 역사가 오래되았네 나혼자라도, 몇 십년잉게, 한 십년 더했었을거여. 한 십년 더있다가, 인자 기계가 허다가 자동으로 돌아가게 자동으로.


산에 질이 없어서 지게로 지고와야 혀

그러다가 인자, 원석은 원자재는 사램이 한개두개 돌을 떼다가. 돌을 어떻게 띠었는고 허믄, 옛날에 남포라고 있었어 남포. 화약을 너가지고 쿵 구녁을 뚫어가지고 거그다가 화약을 너고. 돌을 뚫어가지고 거그다 화약을 쟁여가지고 화약을 쟁인 뒤에 불을대면, 사램 피우고 댕기믄, 그리 막 빵허고 남포가 “남포야”그러거든 그러믄 거그서 막 떨어져.

거그서 떨어진놈 가지고 만들지. 그전에 손으로 찍어가지고 만들었고. 벽산에서 돌이 붙었으믄, 정으로 하나둘 찍어가지고 만들어서 인자 만들었는디. 그 뒤에는 남포, 남포를 대가지고 떨어지믄 고놈으로 하고, 또 조사서하고. 공장으로 어떻게 갖고오냐 하믄, 그때 산에 질이 없어 지게로 지고 와야혀. 한앞에 두개나 한개 두개 짊어지고 마을로 내려가지고 수차, 물방아에다가 인자 해서 그렇게 만들기 시작했어요. 자세한 얘기가 앞두가 안맞는구만은, 얘기가 이것저것 혼돈 되가지고, 듣것소? 먼말인지 듣것어?

그리가지고 그놈을 인자 여자들은 그 머냐 마석을 허고, 마석이라건 돌을 갈아, 마석을 하고 남자는 기계로 깎고 가공, 가공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정으로, 그때만히도 인자 남자만 할줄 알았지 여자는 그거 못헐 걸로 알았거든. 그 우리 화약주임이, 화약주임이 있어. 불을 대다가 남포헐라믄 화약주임이 있어야혀.

화약은 일일이 하루쓰고 하루갖다 바쳐야하고 경찰서에다가. 난 인자 화약고를 지었지, 화약고를 지어가지고 내가 인자 계산만허고 쓰고, 썼다고 사용보고만 허고, 월말보고 허고, 저번에 일일보고허다가 난 월말보고허고 화약을 썼어. 그리가지고 시초가 그리된 것이여. 시초가 그렇게되서 인자 시작을 헌것이여.

그리가지고 인자 사램이 큰 인자 노인들이 담배를 진놈을 물고 말이여, 땅땅땅 정으로 찍어서 수작업. 걸 수작업이라고그려. 손으로 작업을 혀 이렇게 땅땅땅 뚜드려. 손으로 뚜러가지고 인자 그놈을 모형을 만들어가지고, 첨엔 모형을 맨들어가지고. 산에서 캐서 반가공, 거 쇠 땐단 말이여, 때가지고 운반, 지게로 지고와서, 인자 모형가공을 해가지고 맨드는 거여.
물품이 작아서 수량을 보급을 못했어

그리서 인자 몇십년 하다가. 나 혼자했어. 대한민국에 석재산업이란거이 없었어. 없었어. 지금 뭐 여기저기 쌔부렀잖아요. 에 뭐 비석도 만들고 쌔부렀지만은 그전엔 없었어. 그 인자 돌이 인자 만들 수 있다 헝게 후진들이 맨들어가지고 인자는 여그저그 쌨지요. 그 전엔 나 혼자가, 대한민국에 석공이라고허믄, 말하기 좀 미안한 말이지만은, 제일 처음에 나 한사램이여 나 한사램. 우리 부자간에 한사램이고 그렇게 했어. 그리가지고 머시냐, 처음엔 인자 아까 번복되구먼,

그렁게 원석을 캘라믄 산을 파야 돌이 나와, 흙을 파고 산을 파고 독을 내와가지고, 아까같이 모형대로 모양을 내고 하산하고 지게로 지어오고, 그래야지 모형을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가공을 시작했는디. 그때 고작해야 하루 세 개아니믄 두개도 허고 한개도 허고 세 개도 하고. 근데 그때에는 한개 맨들믄 그때 돈으로 한 삼백원이믄 만들었는디, 장사한 사램들이 갖다가 오천원을 받았다고. 한개에 오천원을 받았다고.

오천원 지금은 한 오십만원 될것이요. 그래가지고 그 돈을 나를 머냐 천원을 갖다주더라고 천원을 내 가서 장사 잘히서 이렇게 벌었다고. 그래가지고 뭣을 했냐 하믄 그 약을 다린디 하도 좋아서 많이 폴린다고. 근디 물품이 작아서 수량을 보급을 못했어. 그때 보급을 못했어. 그때 쌀한가마니에 한 천이백원 했는가나 모르겄네. 기억이 안낭구만. 천이백원 했는디, 천원 준게 쌀한가마니 줬단 말이여. 그리서 그것을 머냐,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고, 그래서 그사램이 많이 가져가고, 그러나 많이 맨들수가 없으니까.

맨들수 없으니까 가져가믄, 저번엔 천원주더니 또 이천원을 갖다주더라고, 하나 맨드는디 삼백원인디 이천원을 갖다주더라고. 아 그리서 그돈으로 쌀가마니나 팔고 쌀 몇가마니 팔고 그랬다고. 그래 상당히 도움을 받았다고.

그 뒤에 인자 집이 거시기항게 여러사램이 서로 이 석기 만든대를 찾들 못해서 찾을라믄 이 안사램이 중간에서 소개를 해주고 돈을 받고 알려줘. 그렇게 알았어. 참 옛날 담배묵는 시절이여. 호랭이가 담배묵는 시절이여. 그렇게허고, 그러다 인자, 기계로 인자 만들어가지고 샌반, 아 선반, 선반으로 인자 깎았는디, 손으로 깎은거이지, 선반으로 깎은 것이 한 이삼년허다가 인자 고작 자동기계로 헌 것은 한 십오년, 십오년 가량 되겄구만. 이 주위에 허는 사램들이 다 십오년 이후여 다. 그전은 없었어. 그래가지고 가공을 헌거지요.

마음은 하고 싶지만 몸이 늙어버린게

옛날이, 세사램이 하루 한개 만들때는, 한사램은 모형을 만들고, 정으로 찍어내고 그리가지고 손으로 해. 다 고곳이 모양이 말이어 우둘두툴 해지고, 그릇이 빤듯도 안허제. 그리가지고 인자 난중에는 한사램이 한개도 만들고, 인자 선반으로 한게, 선반으로 한게 셋만으로 세 개정도는 맨들었제.

그러다가 요 근자에 와서는 허믄, 하루에 한 오백개. 오백개도 가공을 허지. 천개는 못허고, 천개를 가공 한다고 허지만, 천개는 못허고 오백개 칠백개까지 했구만 내가. 자동화해서. 돌을 그냥 기계로 썰고, 기계로 만들어가지고. 오백개꺼정 맨들어봤구만.

그리도 인자 일본으로 내고 있는디, 처음에 일본사램이 많이 댕겼어. 그렁게 원래에 일본사램이 이걸 좋아하거든, 후라이팬이라고해. 후라이팬이라고 좋아해서. 옛날 그걸 만들면, 그 노무자를 면해줬어. “노무 가지말어라 느그 일꾼들은”, 그 후원도 받았어. 그렁게로 그래가지고 일본 사램은 후라이팬으로 그걸 좋아했거든, 그래 즈그나라로 많이 보냈거든. 그러 군에서도 지원을 좀하고, 지원을 좀했어. 지원을 한다는 것은 아까 노무자같은거 좀 안가게해주고. 그렁게 지금은 얘기가 안되는 소리제. 얘기가 안되는 소리여.

그래가지고, 작년까지도 사업을해서 수출을 허고 그랬는디. 몇만개. 일년이믄 이삼만개 수출을 하고 했는디. 우리아들이 허는 일이고, 나는 조금 거들어주고. 요새는 일본놈들이 그 많이, 많이 가져가. 많이 가져가고한디, 요새는 돌이 부실혀. 그전껀 돌이 안깨지고 좋았는디, 요새는 돌이 안좋아. 근디 인자 우리 광산에는 돌이 좋제 특별히. 그런데 인력이 없으니 가 띠어오덜 못허고 인자 많이 나온데서 돌을 갖다하믄 돌이 안좋아 그전겉이.

그래 기간에 일본놈도 많이 내한허고 기사도 좀 많이 허고 그럽디다. 왔다갔다. 그리서 지금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디. 지금 자서전은 머냐 그 인자 딴거 없고, 내가 살아온 길, 두 번채 그 경력관계라던가 여러관계 지상보도던가, 기사가 한 팔십건 되거든 방송한 것이 이십칠건이 되고 인자 그거 기사하고, 마무리가 된디. 시간이 없고 해서 인자 아들들 서울에다 맡겨놓고. 인자 내가 몸이 좀 늙어 버린게 좀 마음은 허고 싶고 마음은 어떻게 하고 싶지만은 전시는 좀 애려울 것 같어. 근디 모여논거 취합해논 것은 상당히 백여점 되거든요. 백여점 된디 전부 예술품만, 그냥 물품이 아니고 예술품만, 한 그렇게 될거에요. 인자 가보면 알지만은, 그나마 못헐거 같혀.

연령이 불안해서 어쩌다봉게 세월이 너무 험한거겉고, 흘러버려서 헐일을 다 못허고 아마 연령을 마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허고 있어요. 지금 마음은 내가 지금이라도 활발히 다른 것들도 좀 허고 그것도 좀 히야겄다 생각허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사램이 보더래도, 후임들이 보더래도 이런 것이라도 한번 만들면 괜찮겄다 이런 마음을 가져주면 좋지 않겠느냐. 석재는 대한민국에 내가 제일 처음에 시작했는디, 후생들에게 미안했다. 예술같은 것이라던가 작품같은 것이라던가 좀 미안허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커나온 길과 내 의지, 역사를 말한 것인게 후에 자손들이 보더래도 이런 사램이 있었고, 이런 조상이 있었구나 상기시키기 위해서 꼭 히야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서전이라는 거이 시간이 있고 상당히 힘이들더만, 초안을 잡아놨는디 초안을 잡아놓고 좀 모여놨는디, 그걸 인자 재료는 대개 그 기사해논거 말하자믄 기자들이 신문이나 잡지나 기사해논거, 또 방송헌거 필림을 한 사십 일곱갠가 그걸 모았거든요.

내가 해나온 역사를 필림을 필림을 방송필림을. 그리고 그다음에 인자 외국에서도 왔거든요 필림이 외국에서 필림이 오고. 그래서 그거하고, 글은 못썼고, 아까 기사한건 신문 그냥 도려놔서 오려 놔가지고 그거 있고 그랬습니다. 그래 내가 자신으로 글쓰는 것이 말을 잘 못허거든요 내가. 말을 이렇게 안해 내가 좀 똑똑한 사램인디, 또록또록허게 말하는 사램인디 말이 좀 어 어물버물어물버물 허잖아요. 정신은 있는거 같은디, 말을 허믄 제대로 발음과 듣는 사램이 하여금 어떻게 듣는가 이것도 잘 모르겄어요.

내가 저 옛날이는 직선적으로 언제라도 찾아가서 예기를 좀 허고 그랬거든요. 근디 지금 이렇게 해가지고 참 인생이 허무하구려, 인생이 허무하구려. 허허. 인생이 허무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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