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돌 명장 최영식 "광산에 돌아 댕기는 것이 꿈에도 자꾸 흘려 보여"
구술_최영식 | 정리_최정학 | 사진_유백영
이상한 돌이 있습니다. 불을 피거나 열을 받아도 안 터지는 이상한 돌입니다. 아니, 오히려 열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것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장수곱돌입니다.
최영식 할아버지는 이 장수곱돌 만지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온 분입니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물레를 돌리던 시절부터, 물레방아와 선반을 이용하던 때, 그리고 거의 자동화가 되어 있는 현재까지 60여년의 세월을 장수곱돌과 함께 해왔습니다. 곱돌 제작 공정의 발전과 함께 세 사람이 하루 겨우 하나 ‘만들똥 말똥’하던 석기는 이제 하루 오백 개까지 만들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영식 할아버지의 곱돌에 대한 신념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몸은 너무 늙어버렸다는 최영식 할아버지는 요즘 꿈에서도 곱돌광산을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장수곱돌과 함께 한평생을 살아온 최영식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열일곱살부터서 아버지가하는 것을 봤거든
동네가, 태어난 디가 여그 바로 여급니다. 이삼년 삼월 이십사일. 그리서 인자, 어려선 한학을 연구했고, 아니 한학을 쪼금 배왔고, 그다음엔, 뭐냐 옛날엔 주경야독이라 그랬거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 배우고 그랬습니다 예.
부모님은 제 바로 선고께서 우당선생이라는 선생님이 있었어요. 우당선생. 집우자 우당선생 그냥반의 큰아들입니다. 제가. 그 냥반이 학자지요.
지금꺼지 여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그 농업에도 종사하고, 결국 이것에 종사하니까 내가 열일곱살부터서 아부지가 하는 것을 봤거든. 헌걸 보고 있다가 어찌께 할 수가 없어서 이걸 맡았는디. 그렁게 좀 오래 되았지요. 좀 오래되았어. 내가 지금 팔십네살, 팔십오센디, 말하자믄 좀 오래된 폭입니다. 오래된 펜이여. 좀 오래된 펜이어.
그렇게 인자 하다가 별수 없이 인자, 이걸 하다가, 일제시대에 군인을 가라고 그리싸서, 좀 그 반일 뭐 옛날 어른 말 듣고, 내 생일이 십이월 삼십일이요 내가 말을 좀 잘 못혀요. 말을 잘 못헌디. 십이월 삼십일인디.
내 원생일은 삼월 이십사일인데 십이월 삼십일이란, 그때 일본 사람이 일본 호적에다 입적을 안하믄, 뭐냐 그 포고령이 내렸어 포고령. 잡아 죽인다. 그래가지고 별 수 없이 십이월 삼십일에 되아가지고 음력으로 삼월 이십사일이믄 군인을 안간디, 십이월 삼십일일자는 군인을 갔었거든요. 그, 기간에 일본사람들한티 잽혀가가지고 좀 징역살이도 하고, 맞기도 하고 좀 맞고 많이 맞았지요 젊은 시절에. 맞고 도망을 가고, 또 인자 그때는 프락지가 있어가지고 늘 뒤를 댕기고 있었고. 그런 세상을 지냈습니다.
그래가지고 할 수 없이 군인을 갔어요. 징용, 징병. 스무살 때 갔십니다. 그래 아버님이 유치장생활을 오래 하셨고, 나따메. 내가 반일파라해가지고 많이 아버지가 장수유치장에 오래 좀 기셨고, 그담에 내가 군인 간 뒤에 풀려났지요.
내 형제간은 칠남매요 여자가 서이 남자가 너이. 그리서 그 뭐냐 옛날 그 계통적으로 유교사상이 짚어가지고 일본사람을 좀 반대를 해가지고 이 늘 댕기면서 어 뭐냐, 그뭐 일본놈 안좋다고 얘길했다던가 그런소릴 해가지고 끌려가서 갱찰에 끌려가서 유치장엘 가서 좀 생활하다가, 그담에 우리 자산이 소를 멕인다던가 또 뭐하믄 이놈들이 자꾸 뺏아가 우리야를 뺏아가. 아 소도 뺏아가. 소도 뺏아가고 이놈들이 뺏어가믄 끝나. 소도 뺏아가고 쌀도 쟁여노면 쌀도 이놈들이 그냥 실어가버려.
지금 말하자믄 옛날 두지라고 그랬거든. 모르게, 두지란 것이 두지라고 해가지고 묶어서 몰래 감차두믄 그냥 뺏어가고 그랬거든. 그러면 먹을 것이 없어가지고 어머니가 쑥을 뜯어다가 인자 먹고, 그러고 살았지요. 그리고 그 전에 칠남매를 같이 살다가 내가 장남인데, 내가 쪼끔 진학을 그때 상급핵교를 많이 못간 것은 내가 하다가 그만두고 만주가서 그놈들 피해서 만주가서 중학교를 했지. 만주 가서 만주 광동성 연길시에 가서 중학교를. 한 이년 했는가.
인자 그길로 끌려가부렀어
내가 그때에 우리 고장서는 청수장이란 사람이 청수장, 한장길이지 청수장이란 사람이 저기 갱찰서에 좀 근무를 했어요. 그 분에 덕택으로 거기서 피신을 하다가 역시 거그도 대한민국 국민이 여그와 숨어있는 사람을 찾아라 해가지고, 도로 인자 낭누 생활을 했지요. 낭누. 방랑생활. 방랑생활을 하다가 집이서는 인자 아버지를 “아들을 찾아내라 느그는 반일 사상놈들이다” 해서 게롭혀싸서.
하다하다 안되아서 내가 들어와서 아버님이 나오시고 나는 유치장에 되로 들어가고 그러게 생활했지. 그렁게로 그 가정, 가정풍파지요 풍파요. 하다못해 가축을 키우므는 밥을 제때 못줘가지고 죽은 적도 있고, 세상 말이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장수유치장 생활에서, 거그서, 거그하다가, 여 인자 그것도 시방사람이 아니면은 그걸 잘 모른디, 인자 거기인자 모도 그 끈나풀이 있어가지고 모도 알리는 놈들이 있거든,
그래가지고 헐수 없이 유치장에 들어강게 모도 인자 조금 풀려 온화해가지고 그리서 있다가 인자 그길로 군인에 끌려가부렀어. 그길로. 이 인자 그길로. 나오도 들어가도 못허고 인자 그길로. 장수군에서 제 일기, 제일 첫 번 사람이요. 군인으로서. 제일 첫뻔째 사람이여. 그래가지고 군인을 간 것이.
그래 그전에 인자 아버님이 오래 기셨으면,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 오래 기셨으면 내가 아주 호강을 할텐티 그도 못허고 인자 대를 이어서. 육십팔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아 나 군인에 간디, 아버님은 인자 “니가 나이 이십이, 이십이 되았으니, 널른데 가야한다 누가 묻도 말고 네 마음대로 해라” 그 한말씸 뿐이었어. 군인에 갈적에.
참 지독했어
그리서 끌려댕기느라고, 끌려댕기느라고 헐 수가 없잖아요. 어 끌려댕기느라고. 헐 시간이 시간 여유가 없어. 집안이 풍파가 되니까. 나만 나가므는 가족이 같이 묵고 살 사람이 없어. 아버님은 유교사상에 계시제.
내가 인자 뭐 쪼께씩해서 벌어먹고 사는디, 갈 수가 없잖아요. 가족을 부양을 같이 했지요. 그러다가 동생들이 인자 쪼께씩 큰게 심부름도 허고 인자 거들어줘서 같이허고 그리 생활했습니다 예.
그참 애매하지 그참 애매한 것이여. 산골, 산골이지 뭐 말도 아니지. 내 어머니께서 지독했어. 어머니께서. 나물 뜯어오고. 그리도 없이 살아도 얻어먹는 사램오믄 말이여 나너먹고, 호가 자선댕이요. 어머니를 자선당이라고 호를 지었어요. 어머니를 자선당이라고. 아버지는 우당이고, 어머니는 자선당. 그렁게 굶기를 많이 굵었지요인. 지금도 내가 식사하러 가믄, 밥을 냄기고 버리지 말라, 잉, 버리지 말고, 밥을 덜 쪼금 놓고, 그래서 먹제. 그 쓰레기 못나오게 합니다. 집이서도요.
그렁게로 별짓 다했어요 잉. 산나물도 캐고, 산나물도 캐고. 그리도 넘일은 안했소인. 그래도 너므 일은 안했어. 내가 자동해서 넘을 많이 시켰제. 사램을 많이 썼다고, 내가 어려서도. 넘일은 안했다고. 그리가지고, 그간에 고생은 많았소.
옛날 사대부 집이서는 그렇게 간다 그래가지고, 아내가 열일곱살 내가 열다섯 살, 그래 스무살에 아들하나 딸하나 남매를 나놓고 갔어. 근디, 그런 아들들을 내가 인자 징병서 돌아와서 의원생활을 했거든 의원, 지방의원 그때 쪼끔 딴 사램들보다 쪼금 뾰족한 사램이 되았어요. 그때 왜그런고하믄 무투표당선해서 삼선을 했습니다.
삼선을 삼선을 해가지고 그때 인자 자식들을 좀 가르쳐야겄다 싶어서, 나는 인자 구남매를 뒀는디, 사남오녀, 그래가지고 그냥 그저 학교를 다 마칠때까지 다 마쳐주고, 큰 아들만 집에 있고, 다른 놈들을 나가서 그냥 직업생활을 하고 있고, 딸 들은 다 못갈치고 딸들은 그냥 둘이나 갈치고. 그 영향이 오래가. 없는 사램은 그 없는 살림살이가 오래간다고. 일세에 잘살고 한건 아니여. 나는 인자 그냥 이태꺼점 모두 후원도해주고 해서 가르치고 했제.
활동은 많이 했는디, 따른 단시일내에 활동은 많이 했는디. 늙어서 인자 석기에 팍 뭍혀가지고 인자. 그전에 갈것인디 안갔어. 지금도 인자 내가 학교를 좀 가고 싶어요. 몸이 좀 나스믄 학교를 좀 가고싶어요. 학교를 못헌 것이, 내가 배운걸 다못배워서 좀 한시럽거든 지금도 가고 싶어요. “너 할일이 머시 하고싶냐” 하믄, “쫌 더배우고 싶다” 그러고 싶어요.
무더기꿈으로 포로가 된거여
그러고 인자 군인을 가서는, 군인에 가서도 때도 많이 썼어요. 막 욕을 허고 그랬습니다. 일본놈들한티. 그리도 일본놈은 너그러. 뭐 우리 한국사람을 때불고 그런벱이 없어요. 아 없어요. “내가 군인을 왔지마는 언제 보내줄래” 그러믄 “한 석달만 있으믄 보내준다” 걸 믿었어. 그래 대장한테 얘기했죠. 지금으로 말하믄 대장이라고 하믄 높은 대장도 많이 있지만은, 좌, 뭐 일본은 소좌, 이들이 대대장을 했거든. 이들한테 얘길하믄 이놈들이 보내준다 그려. 근데 하 이거 시간이 되아도 암말이 없어.
그래서 인자 지시한 사람은 상등병이여. 상등병. 상등병이 우리를 지도했거든요. 상등병보고 “내가 저번에 연대장한티 얘기하고 중대장한티 얘기하고 다 보내준다그랬다. 보내도라” 안된다고 얘길햐. 그래 또 갔어요. 가서 또 “보내도라.” 그래 암말도 안해. “배가 지금 잘 안댕기고 배가 풍파를 당해서 잘 안댕기니까 한달두달 있으면 가겠다.” 아 근디 또 시간이 되아도 안보내. 그때야 하 이거 내가 ‘속임수로구나.’ 그때부터 군인생활을 한 것이요 인자.
광복군은 그 뒤에뒤에 그 뒤에 일본 패망한 뒤에 중국가믄, 내 중국생활 했는디 중국가믄 신사군이 있어요. 신사군. 노산이라고 있는디, 그 산이서 한쪽이는 공산주의고 한쪽이는 민주주의고 이 노산이라고 따로 있는디. 이쪽이는 공산주의고 이쪽이는 그 뭐냐 미국식으로 민주주의고. 민주주의가 있는디. 도망을 잘가야지 잘못가믄 또 타작하거든. 그리서 그때 군인생활 한 뒤에, 해방 뒤에 인자 거기로 도망갔어.
우리는 해방이 된 뒤에 일년 뒤에 알았으니까. 중국 제48군에 포로생활을 했어요. 중국군에 배속되아가지고 포로생활을 했어. 안경대핵교서 해방되고 포로생활을 했어요. 수용소는 안경대핵교. 48군소속으로 안경대핵교에서.
그래 안경대핵교가 패쇄가 되아서, 일본놈 군영지로 되아있거든. 거그서 한국 한적사병, 한적사병 포로 관리소가 되았거든요. 늘 행군이었었어. 그렁게 한국에도 오래있었고, 무창에도 오래있었고, 한국, 무창, 강서성, 거가 있다가 난중에 되돌아와서 안경대핵교, 포로생활은 안경대핵교서 했습니다.
그렁게 우리는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뒤에도 한 반년쯤 있어야 항복했다는걸 알었어요. 그런 뒤에도 또 결국에 거기 끌려가가지고 수용생활을 했으니까. 그냥 온건 아니여. 수용생활하다가 돌아온거여. 일본놈 즈그가 포론디, 무더기꿈으로 포로가 된거여. 무더기꿈으로 포로생활이여. 내가 말이 좀 안되아서.
내가 그렁게 무안지구 작전참가를 했고, 무창하고 항구 합히서 무안지구라고 그래요. 그 작전에 참여를 했거든요. 일본군에. 그렁게 지금 생각해본다고허면, 중국사람들 싸울 것도 없이 뒤로 도망을 가버링게, 도망을 가버링게 싸울 것도 없이 점령허고 점령하고 자꾸 들어갔지요. 도망을 가버려 도망을 가버려. 싸우도 않고. 그렁게 그걸 다먹었제. 그렁게 일본놈들이 그걸 다 먹었제 일본인이 그거니 그걸 다먹었제 그걸 다 먹을새가 있소. 그 많은 지역을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