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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 | [문화시평]
쥐가 되어버린 사람들
(2014-02-14 16:57:51)

쥐가 되어버린 사람들
정초왕 | 전북대 독문과 교수


어린 시절의 쥐에 관한 기억들… ‘쥐 잡는 날’이 있었지. 잡은 쥐의 꼬리를 모아 제출하라는 학교 숙제도 있었고. 쥐 잡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 쥐약이 제일 나았어. 고양이나 강아지가 대신 먹고 죽어버리거나 자살용으로 사용되는 불상사도 벌어지긴 했지만, 쥐덫(쥐망)에 걸린 것들은 산 것을 쳐 죽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지.

가장 소름끼치던 것은 ‘끈끈이’에 걸려 갖은 몸부림을 치던 쥐에 관한 기억이야. 그러고 보니 한밤중 구멍 뚫린 천장에서 이불 위로 떨어진 쥐를 잡으려고 온 식구가 동원되었던 일도 있었지. 창고에 쌓아놓은 땔감용 나뭇단 사이에 이파리로 깔개를 고이 만들고 죽어 미이라가 된 쥐의 주검을 목도한 적도 있었어. 나뭇단을 다 치우자 도망도 못 친 새끼 쥐들이 꿈틀대던 것도 기억나는군. 쥐새끼도 새끼여서 그런지 나름대로 이쁜 구석도 없진 않았어…

지난 연말 창작극회의 연극 ‘쥐’를 보러가며 불쑥 떠오른 것들이다. 분명 쥐에 관한 연극일거라고 미루어 짐작해서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두 번은 속았다. 일부러(!) 사전지식 없이 자리에 앉은 나는 배우들의 분장을 보고 쥐를 의인화시켜 하는 이야기일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 이야기이다. 낡은 사설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는 한 가족 이야기. 어머니와 큰아들, 며느리, 작은아들과 딸, 이렇게 네 명이다. 난리 통에 홍수가 났는지 집안으로 스며드는 물을 지겹게 퍼내야 하고 먹을 것 구하기도 몹시 어렵다. 언제던가 자식들 장난감으로 토끼 두 마리를 구해온 적 있던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그것들이 어머니 손에 ‘탕’이 되고 만 뒤 훌쩍 집을 나가버렸다.

출산 준비 중인 며느리의 아이는 그 씨가 큰아들의 것인지 작은아들의 것인지 모호하다. 나중에 임신 사실이 알려지는 딸의 경우도 매한가지. 작은아들과 딸이 구해 온 먹이라고 웬 어리버리한 녀석을 데리고 들어올 때 두 번째 속았다. 동물 역할을 사람이 하는 것이겠거니 했더니 진짜 사람(사내아이)이었다.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이 사람들, 사람을 잡아먹고는 한 술 더 뜬다.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아달라고 방송국을 찾아온 아이의 어머니에게 그걸 또 대접하는 것이다. 이 아주머니, 걸려도 참 잘 못 걸렸다. 굳이 붙잡아두려는 이들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들을 찾겠다고 나가려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들의 살인(살해)의식의 제물이 되고 만다.

마지막에 작은아들과 딸은 나란히 누워 사랑을 속삭이면서, 극의 시작 즈음에 큰아들과 며느리가 나누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한다. 다른 두 사람은 어찌되었을까? 공연 팜플렛에 실린 ‘줄거리’에는 사람 잡아먹는 이야기가 빠져있다. 하기야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었을 테니.

대본을 읽어보니 공연 관람 시 무심히 지나쳤던 몇 가지 점들이 반추된다. 프롤로그처럼 기능하는 초두의 “희망의 소리, 라디오 파라다이스” 음악방송 멘트 중의 한 부분. “쥐! 그들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우리들의 거울에 비친 상처죠.” 결국 쥐나 다름없는, 또는 쥐가 되어버린 사람들 이야기… 이들에게서는 ‘아버지의 부재’가 현재의 삶을 초래한 주요인처럼 작용한다.

“곧 근엄하되 책임질 줄 아는 사람만이 지니는 호칭”, “그 주변에 언제나 풍성한 수확과 넉넉한 인심”이 있던, ‘먹 냄새 풍기는 방’에서 ‘책’읽는 걸 좋아하던 아버지의 상실.  그 이후 형제가 나누던 ‘그 고상한 고담준론’도 종적을 감추고, “책이란 게 한그루 마른 나무만 못한 시대”, 땔나무로 쓸 책이라도 남아있음을 다행으로 아는, 그저 ‘남루한 생’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인 이유’, ‘사랑, 뿌리, 믿음, 신념’도 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입에 발린 소리로 핏대 올리듯, 그저 수사로만, 혹은 기만의 도구로만 잔존하는 게 당연하리라. 입으로는 늘 ‘희망’을 말하지만 이들에게는 딸의 대사가 드러내주듯이 ‘앞날’에 대한 기대도 실상 없다. “물이 맨 날 차오르는데 왜 기를 쓰고 막으려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막아도 내일이면 또 올라올 텐데.”

그런데 이쯤 되면 이 작품이 과연 ‘(웃기는) 부조리극’일 수 있을까 싶어진다. 통상 “사건의 동기도 분명하지 않고, 또 인물의 행동도 잘 이해되는 것이 아닌” 부조리극과는 달리 이 작품은 ‘쥐가 된 인간’에 대한 너무도 직설적인(?) 은유가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웃기는 잔혹극’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인공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에도 그것을 웃고 즐길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점에서 ‘블랙유머’가 두드러진 것을 사실이다. 이것이 압권인 부분은 역시 ‘아이의 어머니’를 살해하며 추구하는 일종의 ‘살인의 미학’이다. 먹고 살기 바쁘지 않아 이른바 예술 활동을 ‘그 따위 짓’으로 폄하하지도 않을, ‘지금하곤 전혀 세상이 딴 판일지도’모를, 후세의 사람들이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하거나 글로 쓰게 될 수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이들은 ‘격식’에 맞추어 살인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개 돼지를 잡을 때도 다 잡는 순서와 방법이 있는데”).

창작극회의 이번 공연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거개가 신진들이다. 그럼에도 서투르거나 어색한 점이 없이 모두가 무난히 역할들을 수행해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극장 연극에 어울리게 대사의 강도를 조절하고 보다 섬세한 호흡을 이루어내었으면 좋았겠다. 깔끔하게 소품을 연출해낸 연출자의 능력도 높이 사주고 싶고 누구보다 뛰어난 배우 출신이니 앞날이 기대되는 신진들을 더 잘 담금질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부터이던가 가끔씩 머리를 스치던 ‘잡념’이 공연을 본 후 다시 한번 떠올랐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우선적으로 퇴출되어야 할 생명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쥐가 아니라― 인간일지도 몰라…


정초왕/ 성균관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브레히트’를 전공했다.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을 지냈으며, 전북대 교수로 있으면서 연극론과 영화의 이해, 독일 시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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