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문서를 통해 본 가족생활 '족보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홍성덕 | 전북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저널 편집위원
‘족보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시대 호적 기록들 우리가 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의료보험증 뭐 이 정도가 가족임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되는 공적인 자료들 일 것이고, 개인기록으로는 ‘족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과 내가 누구의 가족임을 드러내는 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찾는 것임은 물론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국가에 있어 개인과 가족에 대한 정보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 확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게을리 할 수 없는 책무이다. 조선시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매 3년마다 호적을 조사하여 호적대장에 기록 관리하게 된다. 고문서를 가지고 있는 집이라면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호적관련 문서들이다. 조선시대 호적업무는 쥐띠, 토끼띠, 닭띠, 말띠 해 등 3년마다 호적업무를 총괄하는 한성부에서 호적 작성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여 각 도를 거쳐 각 고을에 전달하면, 각 고을에서는 임시로 호적소를 설치하여 담당자를 선출하고 각 면리에 전령을 보내 호주들에게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호주가 자신의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관청에서는 3년전에 제출한 호적과 대조하여 1통은 호주에게 돌려주고, 1통은 호적대장을 작성하는데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이외에 관청에서 발급해준 호적이 있는데 이를 준호구라 한다. 말하자면 준호구는 요즘 주민등록등본처럼 관청에서 호주와 그 가족, 소유노비 등을 증명해주기 위해 발급한 공문서인 것이다.(사진1)
이러한 시스템 때문에 몇 장이라도 고문서를 가지고 있는 집에 반드시 호구단자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호적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신분을 알려 주는 표식[職役]이 기재되었다. 호주를 포함하여 호적에 기재된 사람들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아니면 노비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호적에서 호주와 그 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외조부 등 사조(四祖)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노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서 그 사조가 밝혀진 경우는 전혀 없다. 기껏해야 그 부모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전(上典)은 분명히 기록하여 소유관계를 명시하였고 부모가 노비라는 것을 밝혀 그들의 신분이 노비라는 것을 명시하였지만,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까지 기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과 세대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던 조선시대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세금의 부과 기준과 단위 책정에 관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별도의 출생신고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호적대장에 이름이 기입되면 사람으로 또는 노비처럼 재산으로서 그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호구단자가 3년마다 작성되므로 출생후 호적대장에 이름을 싣기까지는 경우에 따라서 3년이나 ‘무적’으로 살아야 했다. 요컨대 태어났다고 하여 모두 호적에 그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1804년부터 1840년까지 김상려가 작성한 11장의 호구단자를 보면, 상려는 아들 기두(基斗)를 호적에 올리지 않다가 손자 준석이 5세 된 1825년에서야 과부가 된 며느리와 함께 호적에 처음 사망한 사실을 올렸다. 이에 의한다면 기두는 죽을 때까지 군역을 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7세의 딸은 1804년의 호구단자에 한번 올린 뒤 이후의 호구단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호적이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것은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40여 년간 작성된 14장의 호구단자가 남아 있는 김재진의 경우 증손자 제(悌)를 6세 때에 호구단자에 이름을 올린 것이 가장 이르다. 대체로 10세 이전에는 호적에 싣지 않다가 16세 이전까지는 대부분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부인과 며느리를 제외한 여자의 이름을 호구단자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왜 이같은 현상들이 있는 것일까? 남자의 경우 16세 이전에 호적에 오르는 것은 16세 이상 성인남자는 호패를 패용해야 하고 아울러 군역(軍役)의 의무를 져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여자를 가급적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역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호적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조선후기의 호구파악 수준은 실제 인구의 40% 정도로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여성도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다. 호남기록문화시스템에서 여성이 호주인 호구단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786년 영광에 살던 과부 정씨도 호주로 등장했던 조선시대의 여성 가운데 하나였다. 본관이 나주였던 정씨는 염소면 임자도에 살던 최종화와 결혼하여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뜨자 그녀는 새로운 호구단자를 만들어 관청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녀가 작성한 호구단자에는 자신을 “유학 최종화가 죽어 대신하는 과부 정씨 나이 48 임술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호주였던 최종화가 사망하였으므로 이제 자신이 호주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정씨부인이 호주가 되었으므로 사부(四祖)도 당연히 정씨의 조상을 썼다. 부인이 비록 남편의 뒤를 이어 호주를 계승하였다고 하지만, 언제가는 다시 그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법으로 규정한 바는 아니지만 남편이 사망한 후 부인이 호주가 된 경우, 아들이 좀 나이가 들면 아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여성 호주와 관련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호주라는 말과 조선시대의 호주라는 말은 그 개념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서의 호주라는 말은 단순히 그 집의 대표자라는 의미에 불과하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라는 말을 가지고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를 논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노비도 호주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비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족보편찬과 고문서 인지하기 어렵겠지만 족보는 조선시대 이래로 정기적으로 출판되는 최대의 책이다. 지극히 제한적으로 배포ㆍ판매되는 이 책은 또한 거의 읽히지 않고 책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한번쯤 빛을 발하는 때가 있으니, 그 때는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이 과제를 받아왔을 때이다. 시조부터 현재 살아있는 후손들까지를 모두 망라하고 있는 족보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대변하고 있는 문화코드이다. 족보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착과 집착은 단순히 ‘가족’의 소중함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신분에 의해 사회ㆍ경제적 처지가 달라졌던 전근대 시대에 있어 족보 소장의 유무, 족보에 이름이 올라 있는지 아닌지의 판단은 내가 어느 집안의 후손이라는 나의 정체성 찾기 이전에 군역과 같은 세금의 납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강화되었다. 지금이야 100명을 모아 놓고 양반집안 출신이 아닌 사람 손들어 보라 하면 잘해야 한 두 사람정도이니, 모두가 양반이니 조선시대 그 많던 천민들은 일시에 사라져 버린 모양이다. 족보가 사회적으로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족보등재 여부에 의해서 초래되는 이익·불이익이 없어서인지, 집안의 족보가 있는지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는 족보가 있는지에 대한 인식은 많이 약해졌다. 이유야 어쨌든지 읽을 줄도 볼 줄도 모르는 족보를 놓고 자식들에게 너희는 뼈대 있는 양반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어른들이 있는 한 족보의 사회적 의미는 상실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족보는 흔히 30년(20년, 40년 50년 단위로도 함)마다 수정 증보하여 간행하는 데, 족보를 간행하는 것은 일족의 가장 큰 거사이기도 했다. 족보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위원회에서 전국에 흩어진 각 파에 족보제작의 사실을 통지하게 된다. 각 파에서는 그 일족 구성원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각 가족구성원들에 대한 명단을 제출받아 간행위원회에 제출한다. 전국에서 모인 자료들을 수합해서 이전에 제작된 족보들과 대조 확인하고 올라 있지 않은 사람들을 추가로 넣어 간행하게 된다.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족보에 이름을 올릴 때 명하전(名下錢, 單錢)을 납부해야만 하였다. 명하전의 금액은 종중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었지만, 삶이 넉넉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가지고 있던 땅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부담이었다. 1849년(헌종 15)에 고한두는 족보를 만들 때에 일족의 명하전을 낼 도리가 없어서 부득이 종답(宗畓) 6마지기를 팔았으며,(사진 5)
편찬업무를 맡고 있는 보소(譜所) 도유사들은 족보 편찬 비용의 납부를 독촉하기도 하였으며, 자금 확보가 용이하지 않아서 족보 편찬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빚에 쪼들려 부채 탕감을 종중에게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족보에 이름 등이 누락되어 송사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경자년에 병권이 조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조카가 속한 파의 사위 3인과 손자가 족보에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송사를 벌이려 하자, 족보 만드는 고충을 헤아리고 문중의 화복을 위해 쟁소를 중시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명하전을 몰래 거두어 유용하는 사례도 보이고 있다.
가족해체라는 말이 들리는 요즘 족보의 사회적 의미는 날로 희미해지고 있다. 더구나 족보에 이름을 올린다는 의미가 종중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제외한 사회경제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러나 본관과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는 한 가족과 종중의 기록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출생신고를 통해 올려지는 호적과 호적에 기록되는 본관과 성씨, 종중에서 제작하는 족보 등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호남지역 고문서의 보고
전라북도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왔던 유일한 지역이다. 전국 대학박물관 중 가장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전라도의 역사적 기록문화 전통을 사이버 공간에서 되살리는 “호남기록문화시스템(http://honam.chonbuk.ac.kr)”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서비스에 들어갔다.
호남기록문화시스템은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정보통신부에서 주관하는 국가지식정보자원사업의 예산(6억3천만원)을 받아 구축된 고문서 데이터베이스이다. 국가지식정보자원사업은 정보통신부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약 3천 5백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국가적으로 보존 및 이용가치가 높은 과학기술ㆍ역사ㆍ문화분야 등의 자료 2억7천만건을 DB로 구축하여 국민들에게 서비스 하는 정보화사업이다.
호남기록문화시스템은 전북대학교 박물관, 원광대학교 박물관, 전주역사박물관, 세덕각(부안 우반동 김씨 고문서) 등에 소장된 고문서 1만여점의 데이터베이스로, 조선시대 고문서 9,293점, 대한제국시기 고문서 377점, 일제시기 고문서 585점이 구축되어 일반인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고문서 DB뿐만 아니라 구축된 고문서를 이해하기 위한 용어사전은 물론 고문서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사이버고문서강좌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고문서에 담긴 역사적 사실이나 삶의 행태에 대한 콘텐츠 형식으로 꾸며지는 고문서향기와 조선시대 주민등록부에 해당하는 호구단자 등과 연계하여 이용자가 직접 가계도를 작성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개발을 완료하고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이제 누구든 호남지역의 고문서를 직접 보고 설명문을 읽어 호남지역 사람들을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호남기록문화시스템’에서는 전문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고문서 정보제공 시스템과는 달리 고문서의 접근 방법에 대한 다양한 분류체계를 도입하고, 한글제목 및 쉬운 설명(해제)를 통한 일반인들의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또한 검색결과의 엑셀저장기능, 해당 문서에 대한 관련문서 제공 등 이용자 편의성 및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호남기록문화시스템’에서는 일반적으로 디지털화자료를 서비스하는 다른 사이트와는 달리 고문서와 관련된 교육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고문서에 대한 용어설명, 고문서강좌, 고문서향기 등의 고문서 관련 교육시스템을 구축하여 고문서에 대한 기초연구자료와 관련 상식을 제공하고, 전문연구자를 위한 조사자료 및 연구보고서 등 고문서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서비스함으로 고문서 전문포털 사이트를 지향하고 있다.
고문서 기록에 대한 친근감을 위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가계기록인 호구단자를 가계도로 작성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사이트를 방문한 개개인들이 자신의 가계도를 아주 쉽게 작성할 수 있고, 출력ㆍ저장할 수 있도록 하여 학생 및 관련연구자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가계도 그리기는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족관계에 대한 교육자료 및 학문의 계보도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할 수 있다.
2. 양반이라고 어찌 돈을 외면할 것인가 유호석 _ 전북대강사
조선시대에 작성된 고문서들을 살펴 보느라면 당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는가를 이따금 느끼게 된다. 특히 경제생활면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컨대 유교사회에서 도덕군자를 자처하였던 양반층은 돈(경제)에는 초연한 채 학문에만 몰입하였다고들 얘기한다. 오죽하면 그들을 일컬어 독서인이라고 했겠는가? 과거를 준비하는 응시생의 경우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거의 모든 시간을 독서에 바쳤으며, 때로는 거의 평생을 과거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백면서생, 책상물림 -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경제에 전혀 문외한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일수록 돈을 아끼고 챙기기 마련이며, 없는 사람일수록 절약하기 마련이다.
양반 가운데 상당수는 지주였으며, 또 지주라고 하여도 보유 토지의 규모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지만, 그들은 그 토지를 유지하고 또 늘려나가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16세기에 살았던 호남의 대학자 유희춘(柳希春 : 1513~1577)이 대략 11년에 걸쳐서 매일같이 기록한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학자로서의 모습과는 또다른 이재(理財)에 밝은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남 출신으로 처가가 있는 담양에 둥지를 튼 그는 이들 두 지역에 적지 않은 농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땅을 물려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새로운 땅을 매입하거나 버려진 땅을 개간하면서 재산을 불려나갔다.
또 새 집을 짓고 수리시설인 보(洑)를 쌓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이밖에도 관으로부터 받은 녹봉과, 지방관과 친지들로부터 받은 각종 증여품과 이에 대한 답례품 등 집안에 나고드는 물건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꿩, 기러기, 문어에 이어 생선, 간장, 된장, 콩 등 식품은 물론 가위, 머리빗, 바늘, 부채 따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들이 등장하고 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이처럼 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들 신분의 유지를 위해서도 절대로 필요한 일이었다. 빈곤의 수렁에 빠지는 순간 우선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양반의 신분도 장차 추락할 위협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잔반(殘班)이라고도 불리웠던 몰락양반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돈 없는 설움이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쓰라린 것이지만, 그것이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의 몰락과 겹치게 되면 그 아픔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돈을 외면할 것인가?
양반이 아닌 평민이나 노비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을 주고서라도 양반의 신분이나 관직을 사려고 했던 많은 일화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돈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례로 박지원의 「양반전」은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부패와 위선을 꼬집은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양반이라는 신분조차 매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돈의 위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노비로서 노비를 소유했던 부자 노비들의 존재도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경제생활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은 우선 자신들의 모든 경제행위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남 간에는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친척이나 심지어 부부간,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 행위가 있을 경우 이를 문서로 남겼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문서 가운데 매매문서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서를 명문(明文)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낱장의 문서에는 당시 사람들의 경제관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들 매매문서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당시 경제생활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하자.
숙종 45년(1719)에 정홍립의 아내 이씨가 전라도 순창군 팔등면에 있던 논 2마지기를 최태제라는 사람에게 36냥을 받고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원래 이 논은 정홍립이 생전에 매입하여 경작해오다가 막내딸에게 물려주었던 것인데, 그 막내딸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초상을 치르게 된 이씨가 장례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 논을 처분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씨처럼 상채(喪債)를 짊어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것은 유교사회의 부산물이기도 하였지만, 연거푸 부모상을 당한 사람치고 상채 없는 사람이 없고 또 그로 인해 집안이 거덜나기도 하였던 사정을 생각하면, 적어도 오늘날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결코 달가운 관습이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문서를 찬찬히 살펴보자. 맨 앞에 문서의 작성연대와 매입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작성연대는 오늘날처럼 서기연대를 쓰지 않고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그것도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빌어서 썼다. 강희(康熙)는 중국 청나라 성조(聖祖) 때 사용하던 연호로, 강희 58년은 조선조 숙종 45년에 해당한다. 사대의 대상으로 삼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민간의 사적인 거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매입자의 이름이 여기에는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사실 그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였다. 다음으로 매매의 사유와 해당 논의 위치, 거래 가격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논주인(畓主)과 증인(證人), 증보(證保), 필집(筆執) 등 네 명의 이름이 연명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다 수결(手決) 즉 서명(signature)까지 해 놓고 있다. 여성인 이씨는 수결 대신 오른손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천민들의 경우에도 수결 대신 손을 그려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에서 필집은 실제로 문서를 작성한 사람을 가리킨다. 여성이 매매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 문서가 작성되던 당시의 정황을 떠올려 보면, 부동산 중개인의 입회 아래 부동산을 사고팔며 문서를 작성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매매문서에는 위에서 소개한 논 매매문서 외에, 밭 매매문서, 가옥 매매문서, 산지 매매문서, 노비 매매문서 등이 있었다. 그 중 가옥 매매문서를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고종 16년(1879)에 박생원댁 노(奴) 소봉돌이 상전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 연산현 백석면에 있던 3칸짜리 초가와 과실나무 등을 이생원댁 노 은손에게 25냥에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이 문서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매매의 거래 주체가 모두 노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봉돌이 초가의 임자가 아니었듯이 은손 또한 실제 매입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상전인 양반을 각기 대리한 사람들이었다. 상행위에 직접 나서기를 꺼려하였던 양반들은 흔히 자기 소유의 노나 마름 가운데 믿을만한 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거래에 나섰다. 이럴 경우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나서서 노비와 맞대면하면서 거래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문서에 기재된 발급자와 수급자의 신분은 대개는 일치되기 마련이었다.
상전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노비들은 으레 위임장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상전 이아무개가 자기 소유의 노 선남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신안면 영전리 달야동에 있는 자기 논 5마지기를 시가로 방매하라면서 써 준 위임장이다. 이를 패자(牌子)라고 하였다. 조선조 신분제 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독특한 상행위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소봉돌이 팔았던 초가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가자. 이 문서에는 집주인(家舍主)인 박생원 대신 그 노 소봉돌이 대신 서명하고 있는데 수결 대신에 손가락 마디 모양을 그려놓고 있다. 이것은 증인 겸 필집으로 참여한 권생원댁 노 천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천득은 노이기는 하였지만 한문으로 문서를 작성하였을 만큼 상당한 문자 해득력을 갖추었던 것이 눈에 띈다.
한편 이 문서에는 매매 사유를 ‘빈한(貧寒)’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아마도 박생원은 노비를 거느린 양반의 신분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에 초가 3칸을 팔았던 모양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매매문서에는 갖가지 매매 사유가 적혀 있어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상채 이외에, 사채(私債) 또는 관채(官債)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노름 빚 등살에 논밭을 판 경우도 있다. 또한 과채(科債)가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응시하느라고 진 빚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환곡(還穀)이다.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일반 백성들이 정부로부터 빌린 곡식을 가리킨다. 봄에 빌려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았지만 여기에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고 폭리를 취하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자매문기(自賣文記)는 바로 그와 같은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자신과 처자를 노비로 팔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병이 들어서 가속을 거느릴 수 없었던 최효봉이 상전에게 세 자녀를 30냥에 팔고, 다시 3년 후에 아내를 20냥에 팔면서 작성한 자매문서이다. 처자식을 팔아 50냥을 받았으니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의 입장에서 처자식이 굶어 죽는 걸 지켜보느니 상전 집에 의탁하여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를 소원하면서 처자식을 노비로 넘겨주었을 것이다. 세 자식을 상전에게 넘긴 것도 모자라 다시 아내를 노비로 파는 문서에 부부가 연명으로 수결하고 우장(右掌)을 그려 넣으면서 그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저려온다. 이같은 자매문서들이 오늘날 많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왕 노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노비 매매문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조선시대의 고문서들을 살펴보면서 우선 놀라게 되는 것은 의외로 노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현종 4년(1663)에 작성된 서울 북부 호적에 따르면 오늘날 연희동 일대에 해당하는 이 지역 인구의 3/4 이상이 노비들이었다.
노비 호주만 따져도 절반이 넘었다. 작고한 James Palais 교수가 노비사회(Slave Society)라고 조선사회를 규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단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면 평생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으로 대접받는 대신 재물처럼 매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야만의 제도가 자그마치 5백년이나 지속되었던 왕조가 조선이었다. 아니 겉으로는 도덕을 부르짖으면서 사람이 사람을 팔고 사는 이 가혹한 제도를 당시의 도덕군자(양반)들은 왜 그처럼 끈질기게 유지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육체노동을 노비들이 대신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비가 없었다면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행세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일례로 한옥을 살펴보더라도 그 구조 자체가 노비가 없으면 관리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노비의 존재야말로 신분제 유지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노비에 대한 양반들의 소유관념은 그만큼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을 가서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해골이 되었음직한 노비들까지 자신의 호적에 악착같이 집어넣었던 것이 당시의 양반들이었다.
노비 매매문서는 그런 금쪽같은 노비들을 팔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인조 10년(1632)에 전직 판관 정득남이 사내 종 2명을 전라도 광산목에 사는 김자휘에게 목면(木棉) 6필을 받고 팔면서 작성한 노비 매매문서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러 장의 문서가 한데 붙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비 매매는 인신매매이니만큼 토지 매매보다는 훨씬 복잡하였다.
원래는 토지 매매이든 노비 매매이든 관에 신고하여 입안(立案), 즉 공증의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가서는 입안을 받지 않고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비 매매의 경우 토지 매매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입안 절차를 준수하였는데, 그것은 노비들의 도망과 출산 및 사망 등으로 변동이 심해서 입안을 받아두어야만 뒷날 소유를 증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보이는 여러 장의 문서는 노비 매매에 따른 관련 증빙서류들이다.
우선 정득남이 작성한 노비 매매문서 말고도, 그 정득남이 자기 소유의 사내 종 2명을 팔았다는 사실을 시인한 진술서가 있으며, 매매 당시 증인으로 나섰던 김광열과 유락이 매매가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기술한 진술서(초사), 또 김자휘가 그 노(奴) 남수를 시켜서 노비 구매 사실을 공증받기 위하여 장단부에 올린 민원 서류(소지), 그리고 장흥부에서 관련서류를 모두 검토한 후에 매매 사실을 공증해 준 입안 등이 함께 달려 있었다. 이를 흔히 점련(粘連) 문서라고 하였다.
이처럼 몇장의 문서로 사람을 팔고 샀다니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바로 그들이 남이 아니라 가까운 우리 선조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당시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였던만큼 굳이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의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의 직계 조상은 그렇게 참담한 삶을 살다가 죽은 노비들이기 십상이라는 이야기이다.
끝으로, 같은 매매문서이면서도 조금 색다른 문서를 하나 더 소개하겠다.
헌종 6년(1840)에 임석현이 정진오에게 논 8마지기를 60냥에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당시 임석현은 문서를 자필로 작성은 하였지만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수결은 하지 않았다.
사채(私債)가 많았던 그는 빚을 갚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논을 팔았으나 언젠가는 이 논을 반드시 되사겠다는 생각에서 ‘환퇴(還退)’라는 문구를 문서에 삽입하였다. 즉 다시 되사는 조건으로 매매를 한 것이다. 이런 문서를 환퇴문기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토지 또는 가옥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본 문서 가운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논 5마지기를 팔고나서 무려 20년만에 이를 되산 경우가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절치부심하면서 고초를 겪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 가슴 한 곳이 찡해진다.
지금까지 몇몇 매매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경제생활의 일면을 간략히 살펴 보았다. 이 문서들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박물관도록 - 고문서』(1998)에 소개된 것들로, 박물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층이 남긴 관찬사료와는 달리 기층민의 생생한 삶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문서가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낱장의 자료들이 각각 모두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훼손되거나 망실되면 역사의 한 자락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주변의 고문서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호석/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받았다. 현재 전북대 사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호남지방고문서 전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3. ‘시집을 간 것일까? 장가를 간 것일까?’ 정성미 _ 고문서 전문연구원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혼인 후에는 지아비를,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7가지 이유인 칠거지악(七去之惡), 처가와 뒷간은 멀어야 한다’는 말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고문서를 들여다보노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 특히 여성들의 삶은 상식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혼사의 주도권은 여자쪽에 있었다
조선초기의 혼인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아이를 낳아 일정 기간을 살다가 남자 집으로 신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혼례는 장가갔다가 시집오는 과정이었다. 이를 흔히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남자가 장가(丈家)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유교적인 봉건질서와 남녀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사회윤리의 보급을 모색했던 사대부들에 의하여 양이 음을 따르는 불합리한 제도로 규정되었고, 결국 음이 양을 따르는 여자가 시집가는 친영제(親迎制)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습은 조선후기에도 일부 지역과 가문에 따라 행해지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다 돌아오면 먼저 처가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시집으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바로 장가가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전해지는 양반들의 일기나 고문서에는 이와 관련한 사실들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혼인을 맺기 위해 오가는 서장(婚書)들을 보면 혼사의 주도권이 단연 여자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청하는 청혼서를 보내면 신부집에서 이를 허락하는 허혼서를 보내 답을 했다. 혼인을 결정하고 나면 다시 신랑집에서는 신랑의 생년월일을 적은 사주단자를 보내고 이를 받은 신부집에서는 신랑신부의 사주를 바탕으로 혼인날자(大禮)를 받아 신랑집으로 통지하는 연길단자<사진1>를 보냈다.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르고, 혼례와 함께 남자는 처가댁에 머물러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사임당은 다섯 자매 중 둘째딸이지만 강릉의 친정집(오죽헌)에 살면서 딸 셋, 아들 넷을 낳아 키웠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친정을 떠나 서울의 시집으로 온 것은 그녀의 나이 39세가 되어서였다. 시집에 온지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일생은 대부분 친정에서 살았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 할진데 어찌 신사임당을 ‘출가외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여자가 친정집에 머물러 살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은 여성의 심리적 안정감이나 아이들의 정서 안정에도 크게 유리하였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가에 들어가 고부간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질 신혼생활과 비교한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현명한 제도로 보인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도 용이했다
조선시대 부부는 남녀가 서로 유교적 형식윤리에 얽매여 살았고 여자는 오로지 순종과 인내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낸 유희춘은 떨어져 지내는 아내(송덕봉)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적 위안을 삼고 있음을 그의 일기에서 볼 수 있으며, 안동 정산동 묘지에서 발견한 아내가 남편에게 쓴 편지에는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라며 진솔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사랑해서 결혼하는 연애가 아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부모가 정해주는 결혼이었기에 부부간의 갈등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이혼과 배우자를 잃은 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사실, 조선시대 이혼은 칠거지악이라는 명분으로 남자만이 여자를 버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지만 또한 삼불거三不去(쫓겨나면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른 경우, 가난할 때 시집와 뒤에 부유해진 경우)라 하여 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도 있었다. 칠거지악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결코 남성의 경우에도 이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신 소박이라 하여 실제로는 남남처럼 지내면서 형식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으로 여자를 내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혼이 어려워 소박이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주로 양반층이었고 서민의 경우에는 이혼의 절차조차도 없었다. 전북대박물관에 소장된 한 장의 수기<사진2>는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 글은 최덕현이 을유년 12월에 자신과 두 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간 아내로부터 합의금 35냥을 받고 작성해 준 수기이다. ‘처와 결혼 관계를 영영파기하고 위 댁으로 보낸다(永爲罷送于右宅)는 표현으로 아마도 양반댁 첩이 되었을 아내에 대해 빈한한 가운데에서도 동고동락한 기억, 배신한 처에 대한 원망 등을 구구절절이 표현하며 문서 한 장으로 간단히 결혼관계를 청산하였던 것이다.
소박을 맞거나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 혼자 사는 여자의 처지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반과 서민은 사뭇 달랐다. 조선전기 여성들은 배우자가 사망하면 재혼이 가능했지만 조선 중기 성종 대에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진 후부터 과부의 수절은 양반가를 중심으로 당연시 되어 열녀를 양성(?)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수절하는 양반층과는 달리 양인 이하 하층민 여성들은 그다지 제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단성지역호적에 의하면 양인 계층 과부 가운데 수절한 경우는 16~18%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재산의 분배와 관리도 별도로
혼인제도의 변천은 단지 제도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생활상, 더 나아가 조선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산분배와 제사를 모시는 일(奉祭祀)이었다. 조선 초기 남자가 처가에 정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자가 재산을 남자와 차별없이 분배(均等分配)받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재산상속에 있어서 적서의 신분적 차별은 있었지만, 자녀간의 장자·차자·남녀의 차별은 없었다. 이는『경국대전』에도 규정되어 있으며 고문서의 분재기에서도 평균분깃(平均分衿)이라는 용어로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혼인한 여자의 재산은 어떤 식으로 보존되었을까? 조선초기 여자에게 상속된 재산은 혼인후에도 남편의 재산과 별도로 관리되었는데 실록 또는 고문서(분재기, 매매문서) 등의 자료에 모변(母邊)노비, 처변(妻邊)답이라는 용어로 노비 소유주는 어머니, 답의 소유주는 부인임을 밝히고 있는 데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부인이 사망할 경우 그 재산은 자녀가 있을 경우는 자녀에게 균분상속하고, 자녀가 없이 죽었을 경우 친정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간에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따른 의무도 같았음을 의미한다. 즉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는 봉양을 다하는 것이고,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균분상속 하에서는 아들뿐 아니라 딸도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輪回奉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시집간 여자의 제사의무가 제외되면서 재산권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조선후기 유교윤리가 강화되고, 부계중심의 가족형태가 정착됨에 따라 제사·상속에 있어서 장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아지며 딸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겨났다.
아들만이 대를 잇는 양자들이기
조선초기 노후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수양자(收養子)나 시양자(侍養子)를 둔 기록은 있으나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은 없었다.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딸에게 제사 및 재산상속이 이루어졌고 곧 딸의 봉사는 외손봉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족보에 자손을 기재하는 데에 있어서도 16세기 이전까지는 출생순으로 친손과 외손 모두 차별없이 기재하였고 외손의 외손까지 기재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이성자(異姓者)는 사위만을 기재하고 기재방식도 선남후녀 순이었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면 제사는 반드시 아들이 지내야하며 이는 가계계승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아들이 없을 경우 입후(養子)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양자를 들이는 주체는 대개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의 최고 어른인 여성으로 입양과 혼인, 상속문제를 주도하였다. 양자를 들이는 것은 재산상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관(禮曹)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관에서도 제출된 관련서류들을 꼼꼼히 살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은 후 입양 사실을 공증하는 입안(立案)<사진5>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생활은 실제로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개방적이었다. 여자의 출입이 자유로웠고, 본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재산과 제사도 상속받았다. 요즘의 호주와는 개념은 달랐지만 여성 호주가 낯설지 않았으며 재혼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점차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유교원리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고 의사소통을 단절시켰으며, 열녀비나 내외법을 만들어 여성의 순결과 정조, 복종과 순종을 최고의 가치와 미덕으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거나 홀대 받지만은 않았으며 조선후기 폐쇄적인 모습도 양반가 여성들에게 한정되었던 것이다.
정성미/ 원광대학교에서 ‘조선시대사회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원광대학교에서 강의 전담교수로 일하고 있다. 호남지방고문서 전문연구원으로 활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