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는 옛 문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편지인 간찰, 주민등록등본인 준호구, 매매계약서인 명문, 과거시험답안지인 과지, 각종 소송사건 및 여론형성을 위한 소지와 통문 등등 일상생활 속에서 작성된 모든 문서들이 고문서입니다. 고문서는 중앙정부가 편찬한 역사자료와는 달리 우리 선조들의 생활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의 1차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의 보고이자, 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산업화 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서의 가능성도 모색되고 있습니다. 최근 전북대 박물관에서 ‘호남지역 고문서 디지털화 사업’이 선정되어 ‘호남기록문화시스템’을 구축하고 서비스에 들어가면서, 고문서의 활용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간찰, 준호구, 명문, 소지와 통문 등 고문서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고문서를 통해 들여다본 우리 조상들의 삶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 안에서 현재의 우리 모습을 찾아내보는 재미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문화 돋보이는 소중한 불씨’ 전경목 _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금만 알면 친근한것 고문서는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옛날 문서들이다. 우리는 고문서라고 하면 곧바로 알 수 없는 한문으로 쓰여진 복잡한 문서이며 골방이나 벽장 속에서 보관되어 왔기 때문에 케케묵은 냄새나는 문서라는 생각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문서는 사실 우리 조상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작성하여 사용하던 각종 문서들이기 때문에 조금만 알고 이해한다면 매우 친근한 것들이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문서들과 서로 통하는 것들도 의외로 많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문서의 개념 속에는 넓은 의미의 고문서와 좁은 의미의 고문서가 혼재되어 있다. 넓은 의미의 고문서에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모든 기록물들이 포함이 된다. 따라서 널리 간행된 고서를 비롯하여 일기, 치부책 및 손으로 쓰여진 낱장의 문서들까지도 여기에 포함되며 고문헌이라는 말과 통용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좁은 의미의 고문서는 순수한 문서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출간된 고서와 일기 및 치부책 등은 제외된다.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보고 지은 시문(詩文)이나 기억을 돕기 위해 기록한 비망록(備忘錄)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생생한 1차 사료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물 중에서 우리는 왜 고문서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대답부터 한다면 생생한 1차 사료이기 때문이다. 1차 사료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로서 가공이 되지 않은 생생한 자료를 말한다. 우리는 그간 삼국사기나 고려사 및 조선왕조실록을 1차 사료라고 배워왔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를 연구하려면 위 자료들이 아니면 연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곧잘 1차 사료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들 자료는 1차 사료가 아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은 사관들에 의해서 편찬된 사료이다. 편찬자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사관(史觀)에 따라 사료를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편찬과정을 거친 자료들은 1차 사료라고 말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1차 사료가 아니라는 것은 수정실록(修正實錄)이 후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바로 알 수 있다. 정권을 담당자가 바뀌면 전대에 이미 간행했던 실록의 내용 중 자신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간행하였는데 이를 수정실록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고문서는 그 누구의 손에 의해 편찬되지 않은 아주 생생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고문서만이 진정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사실과 잘못된 상식의 교정 그렇다면 고문서는 1차 사료로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실들을 알려주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전통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전혀 가공하지 않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선 그러한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중에는 최덕현이라는 사람이 작성한 ‘수기(手記)’라는 일종의 각서가 있다.(사진 1 참조-전북대박물관 소장고문서 12279) 이 각서는 최덕현이 그의 아내와 이혼하기로 합의하고서 작성해 준 일종의 ‘이혼합의서’인데 그는 이혼의 댓가로 35냥까지 받았다.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조선시대는 여자가 결혼한 후에는 한 지아비만 섬기는 규율[一夫從事]을 따르는 유교(儒敎) 국가이며 그래서 불행히 남편이 일찍 사망하는 경우에는 평생동안 수절하며 살아야만 하는 사회였다. 그런데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고 또 그 댓가로 35냥이나 지불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물론 이 돈은 최덕현의 아내가 준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데려간 남자 쪽에서 대신 지불한 것으로 추정되고 최덕현이나 그의 아내 모두 양반이 아니라 평민으로 추정되지만, 아무튼 위의 수기의 내용은 그간의 상식과 크게 달라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조선시대 여성사를 공부를 해보면 위 수기의 내용과 같이 조선시대의 여성들 중에서 신분이 평천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양반 출신의 여성과는 달리 이혼(離婚)과 재혼(再婚)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효(孝)와 열(烈)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과 정조를 중시하는 관습 때문에 이혼과 재혼을 못하는 여성은 양반 출신의 아녀자들이었다. 양반이 아닌 평민(平民)과 천민(賤民) 출신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이혼과 재혼을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여성과 관련하여 우리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을 하나 소개하면 여성의 지위와 재산 분배에 관한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수많은 재산분배문서 즉 분재기(分財記)를 살펴보면 17세기 후반까지는 남녀형제가 부모로부터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받고 있다. 당시에는 이와 같이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을 평균분배(平均分配)라고 하였는데 17세기 후반 이전에 작성된 분재기의 서문(序文)들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재산을 ‘평균분배’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 현재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동성(同姓)마을을 조사해보면 동성으로 그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인물 즉 입향조(入鄕祖)들은 처가(妻家)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처가나 그 인근으로 이사해 온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간 알아온 상식에 의하면, 조선시대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시대이며 시집간 여자 형제를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여 차별하던 시대인데 어떻게 부모로부터 재산을 남자형제와 균등하게 분배받고 또 결혼한 후에는 신부가 시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처가살이를 하였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간 알아오던 분재와 결혼에 대한 상식 역시 잘못 알려진 것들이다. 적어도 17세기 후반까지는 집안에서 남자형제와 여자형제가 재산을 균등하게 받았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거의 동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인 여건이 크게 악화됨에 따라 재산분배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여자형제를 차별하는 재산분배의 형태를 거쳐 장자 우대의 형태로 굳어졌는데 이와 같이 18세기 이후의 모습이 마치 전통사회의 전형이었던 것처럼 잘못 인식되었다. 고문서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주 자그마한 것 한 두 가지만 더 살펴보자. 아래의 문서는 상전(上典)이 사내종 을축(乙丑)에게 주는 패자(牌子)로 일종의 위임장인데(사진 2 참조. 전북대박물관 소장고문서 11445) 사내종의 이름이 을축인 까닭은 그가 태어나던 해의 간지(干支)가 을축년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전 이씨는 흉년이 들어 집안에서 쓸 돈이 부족하자 종후평(宗後坪)에 있던 자신 소유의 논 2마지기를 18냥에 을축에게 팔면서 패자 형식으로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런데 문서의 끝에 자신의 성[李]을 쓰고 사인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문서에 ‘사인(sign, signature)’을 하는 관습이나 제도가 서양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위 문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도장을 찍지 않고 사인을 하였는데 이를 ‘수결(手決)’ 또는 ‘압(押)’이라고 하였다. 문서에 개인의 도장을 찍는 것은 대한제국시대 이후의 일이며 이는 일제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글씨를 아는 양반들은 이와 같이 문서에 수결을 하였으며 글씨를 모르는 평민과 천민들은 위 최덕현의 수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처럼 문서에 손바닥을 대고 그 모형을 그리든지 아니면 손마디를 그렸다. 전자를 수장(手掌)이라 하고 후자를 수촌(手寸)이라고 칭하였다. 위 패자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노비도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비들은 모두 가난하고 재산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이와 같이 상전이 소유했던 논을 매매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비록 신분상으로는 상전에게 메어 있어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혹은 자신이 매득한 재산은 상전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으며 또 마음대로 팔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이 고문서는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상식이나 지식들을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구체적인 사실들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문서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국가, 학계, 국민 모두의 관심이 필요 이와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배어있는 고문서들은 공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마다 보존이 되어 왔으며 사적으로는 각 지역에 있던 종가(宗家)와 사가(私家)에 잘 보관이 되어 왔었다. 그런데 불행하게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으로 이 중 상당 부분이 소실되고 인멸되었다. 특히 관청에서 보관하던 공문서는 일제에 의해 거의 소각당했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를 말살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자신들이 모든 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보관되어 왔던 각종 서류철과 고문서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래도 각 지역의 종가와 사가에는 수많은 고문서들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근대화 이후 크게 인멸되었다. 특히 새마을 운동 이후 집안을 개량하면서 고문서들이 점차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며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농촌의 마을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이들 고문서는 인멸되어 이제는 전국적으로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고서와 고문서가 하루아침에 벽지로 인식되어 벽에 도배되거나 땔감으로 간주되어 아궁이로 들어가고 혹은 아예 폐지로 간주되어 고물상에 팔려나갔다. 근래에는 고서와 고문서가 고가(高價)로 매매되는 추세여서 종가나 사가에 보존되던 고서와 고문서들에 대한 도난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서 절망적이지는 않다. 지금이라도 고서와 고문서를 또 하나의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인식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 보존해야 한다. 이는 누구 하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 우선 정부에서는 대대적으로 고서와 고문서를 수집, 정리, 보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고 학계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하고 이를 연구하고 교육시킬 수 있는 인력을 시급히 양성해야 한다. 또 국민들은 고서나 고문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것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감시해야 한다.
고문서 보존, 바로 우리들의 몫 최근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정통부의 지원을 받아 호남지방과 관련된 고문서들을 정리하여 인터넷에 ‘호남기록문화시스템’을 개통하였다. 이는 전북대학교 박물관과 원광대학교 박물관 및 전라북도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한 것으로 호남지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역사연구는 다 그러하지만, 지역사연구는 그 지역에 관련된 자료들이 축적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간 고문서들이 주로 소장 가문(家門)이나 종류별로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을 뿐이었다. 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국국학진흥원의 데이터베이스화 방식이고 후자는 서울대학교의 데이터베이스화 방식이었기 때문에 지역사 연구자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이번에 지역 소재 대학교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지역 자료만을 정리하여 특성화를 시도하였다. 이들 자료는 호남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서술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아울러서 이들 자료는 호남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라 믿는다. 특히 호구단자(戶口單子)와 준호구(准戶口)를 이용한 내 가계도 그리기 등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또 일반인들이 고문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치한 고문서 교육 코너 등은 대중과의 소통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아무튼 이제 호남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풍부하게 할 것인가는 우리의 역할이다. 전라남도 영광에 가면 영월신씨들이 수 백 년 세거(世居)하고 있는데 그 종가에는 몇 백 년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해온 불씨가 전한다. 지금도 종손과 종부를 이를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고문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소중한 불씨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고문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모든 역경과 맞서 싸워 왔으며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이를 보존하다가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제는 우리가 이를 잘 보존하고 활용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찌우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후손들에게 온전한 상태로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바로 우리들만의 몫이다.
전경목/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관장을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