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순 1913년 부안군 보안면 원상림리에서 태어나다. 1929년 경기도 이천 사람 박재근씨와 혼인하다. 1932년 딸 태어나다 1935~1945년 일본과 부안을 오가며 돈벌이를 하다. 1949년 딸 시집 보내다 1958년 집안 일가인 임기하씨 권유로 시조창을 배우기 시작하다 1983년 전국시조창경연대회 명창부에서 장원하다. '유란'이라는 호를 받다 1884년 부안 여류시인 이매창 묘제를 시작하다 이매창의 '정신적 딸'로 추앙받으며 제주를 올리는 역할을 맡다. 석암 정경태, 백강 고민순 등에게 사사하며 부안 부풍율회의 계보를 이어오다.
사흘만에 한글을 깨우쳤어 일곱 살 때 한글을 사흘 배워서 책을 봤어. 암끗도 모르는 사람 데리다가 고모가 사흘 갈친 게 읽어부렀어. 안 배워도 그냥 알겠던 것을… 갈친게, '가'에 '기역' 붙으믄 '각'허고 읽어부러! 아 그냥 놀래네. 그래도 글 많이 안 배웠어. 한글이나 조께 배우고. 야닯 살 때부터 열한 살 때까지 4년 학교 대녔지. 그때는 시방 같은 학교가 아니고 동네에서 다닌 학교. 우리 졸업허고 난게사 보통학교가 되드라고. 나이 열일곱이 돼서 시집을 가는디 남편이 내 눈에 안 들어! 나이도 많이 먹고 허리도 꼬부라지고… 나이가 서른 일고야닯 되ㅇ어. 우리 아부지가 날 택일해서 딱 갖고 왔는디 섣닫 그믐날 예를 지냈어. 내일이 그믐이면 그믐 안 날 예(혼례)를 지냈어. 어째서 그랬냐? 우리 아부지가 아들딸 8남매를 낳아 갖고 어려서 다 죽고 딸 하나 키우는디, 열일곱 살이믄 다 컸어. 그래서 열일곱 살이면 안 죽을 줄 알았더니 어느 날 머리 아프다고 눕더니 죽어부렀거덩. 내 언니가. 내 밑에도 동생이 하나 있었는디 네 살 먹으니까 죽어부러. 아들이었는디. 풍이 일어나 머리가 팔팔 끓으면서. 지금 같으먼 병원에 데리꼬 가는디 그때는 병원이 없응게 안 데꼬 가고 놔둔게 그냥 죽어부렀어. 나도 돌 안짝에 풍이 왔어. 엄마가 베 짜다가 내려다봉게 애기가 열이 펄펄 끓고 몸을 막 비튼게 '이것도 죽었구나'허고 그냥 포대기에 돌돌 말아서 논두렁 가상에다 놓고 왔는디 할머니가 와서는 "애기 어디 갔냐?" 긍게 "죽어서 저어∼기 내부렀소."했는디 할머니가 울면서 쫓아와서 포대기째 들고 방안으로 내려놓은게 눈을 말뚱말뚱 떴거등. 암시랑 않고. 그래갖고 살아났어. 그랬으니 오죽이나 귀허게 키웠겄어? 명 길게 할라고 당골에게다 팔고 절에다 팔고 점쟁이에게다 팔고… 여기 저기 공들이러 댕기고. 열 살 묵고 열두 살 묵고… 학교 졸업하고 뭘 해도 잘 허고 재주가 있었어, 바느질을 시키먼, 열네 살 묵어서부터 두루매기 바느질을 했응게, 어머니가 베틀 놓고 나가먼 베도 짜보고, 그렇게 열 다섯 살 열 여섯 살 묵었는디, 열일곱 살 묵으면 (언니처럼) 다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열일곱 살 안 묵어서 시집 보낼라고 만으로 열 여섯 살 섣달 스무 아그렛날 예를 지낼라고 우리 아부지가 서둘러서 신랑감을 데려왔어. 데려다놓고 몇 살 묵었냐고 물어봉게 스물 일곱 살 묵었다고 그려. 우리 아부지가 사람 볼 줄을 잘 몰라. 스물 일곱 살 묵었다고 허는디 내가 보기에는 한 사십 살 묵어 보여. 날 받은 지 엿새 만에 동네 일가들이 장만해서 이불하고 뭣하고 해서 예를 올렸지. 또 죽을깨미. 예를 올리고 나서 방에 앉었는디, 밥 멕기도 싫고 살기도 싫고, 신랑이 방에 들어와서 첫날밤이라고 보내는디, 족두리도 귀찮고 원삼도 귀찮고, 신랑이 원삼 족두리를 벳겨. 술상을 채려놓고. 나보고 술 먹을 줄 아냐고 해서 그냥 돌아 앉어부렀어. 그랬더니 "술을 못 잡수는구만요'허면서 요를 깔고 이불 내리고 "주무시씨요'그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닭 울 때가 되ㅇ는디, 두 시 반 세시 된 년에 가만히 인나서 정지문 열고 나가서 할머니방에 가서 할머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서 잤어. 신랑은 그날 새복에 나와 돌아댕기드만.
남편이 눈에 안 차 한 일주일 지낭께 신랑이 자기 고향 간다고 가더니, 정읍에다 방을 얻어놨다고 이사가자고 혀. 내가 안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촌에서 살믄 질쌈하고 밭매고 그러는디 정읍만 해도 (대처니까) 일 안허고 편히 사는데 멀라고 안 가냐"고 그래. 그래서 밥그릇 몇 개랑 상이랑 모다 한 살림을 챙개갖고 상당히 걸어나가야 버스를 타거덩. 버스를 타고 정읍에를 왔어. 와서 방을 봉게 여관집 기둥 웃방, 사람도 잘 안 자고 안 끓는 집이라. 그런 방을 얻었다고 거기서 살쟈. 우리 어머니가 "여기서는 살림 못 허네. 솥 걸고 밥 해먹고 그래야 살지, 날마다 밥을 불러다 먹고 어떻게 살림을 허는가? 못 허네".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서 그냥 왔어. 신랭도 짐을 지고 따라서 오더니 기차 정거장으로 데려가. 우리는 버스 정거장인 줄 알고 따라갔는디 짐에다 글씨 써진 걸 봉게로, 신랑을 글자를 모르는디, 딴 사람이 써준 걸 봉게로 "복강(후쿠오까)'라고 썼어. "아따! 일본으로 데려갈려고 허는구나!' 싶어서 그냥 어머니 손을 잡아댕개 가지고 막 담박질을 쳐서 막 뜰라고 허는 버스에 올라가서 집으로 와부렀어. 신랑은 해 넘어갈 무렵에사 짐을 짊어지고 왔어. 암말도 없이 누워있다가 집을 나가데. 그리고는 안 들어와. 긍게 나는 좋제!! 아부지 어머니는 둘이 서로 탓을 허네. 그런디다 딸을 여웠네 마네, 섣달 그믐날 딸 여우더니 잘 되야ㅆ네, 허고 둘이 싸워싸. 그것도 안됐드만.
대한부인회장을 허라고 왔어 그렇게 베짜고 밭 매고 동네에서는 나를 다 써먹었어. 그때 동네에서 문맹퇴치 운동을 혔는디, 처녀 각시 헐 것 없이 다 내놓고 한글을 갈치제. 밤마다 내가 갈치는데 한쪽에서 잠자는 사람도 있고 한쪽에서는 자울고 있고 그냥 냅둬부러. 배울 놈만 배우고, 시집 갈 처녀는 잘 배워갖고 시집 잘 갔제. 원상림리에서 시집 간 처녀들은 다 글 잘헌다고 소문이 났어. 그때는 다 공부를 안했던가봐. 보안면에서 부녀회장허라고 왔어. 대한부인회장! 하루내내 집집마다 돌아댕기먼서 이름도 적고… 그때가 열아홉 때였어.
일본으로 가야 헌다네 우리 아부지가 사위를 찾아야겄는디 찾을 디가 없응게 (경기도) 이천군 청리면 대설리(당시 남편의 고향) 이장 보고 편지를 썼어. "내가 무남독녀를 두었는디 청리면 대설리 사는 박재근이라는 사람허고 결혼을 했는디 집을 나간 지가 3년이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연락을 해서 찾아보라"고. 우리 아부지가 글이 좋거든. 아, 근디 편지헌 지 열흘만에 왔어 신랭이! 내가 저를 싫어한 게 어디로 도망할 줄 알았능가봐. 근디 이렇게 찾응게 왔어. 왔어도 나는 반가운 맛이 없어. 근디 그 먼 디서 이것저것 사갖고 온걸 봉께 안 됐드만. 나가 다리 복송씨 있는 디가 탈이 나서 부섰는디, 밤낮 애리기만 하지 칼로 짜개야 할 판인디 안 짜개서 아파갖고 앉어 있는디, 남편이 발을 살모시 잡아댕기데. "다리 아펐담서요?" 그럼서 "못난 신랑 만나 고생 많이 했다"고 험서 다리를 잡아댕개서 가방 열고 약을 내서 닦고 약을 발라줘. 발라놓은게 그냥 애린 기가 내림서 멀쩡해져. 사흘만에 근 덩어리가 빠져. 근이 요만헌 게 쏙 빠지고 구멍이 뚫어져. 그 속에다 약 넣고 또 약 넣고… 닷새만에 걸어댕갰어. 약도 좋은 약이 있드만. 그렇게 낫았는디, 날 보고 일본으로 가야 헌다네.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미안하다고 화장품, 비누, 실 같은 걸 사갖고 왔어. 그걸 나한테 주는디 그래도 나는 남편을 안 봤으면 쓰겄어. 근디 신랑이 어머니한테 일본에 나랑 같이 가자고 했등가벼. 나보고 "나는 일본 갈란다. 니는 안 갈래?" 그려. 나도 가지, 그러고 따라갔어. 정월 스물닷새 날 길을 떴어. 아부지허고 할머니허고 두 분만 집에 놔두고.
“딸은 잘 두었소만 잘못 여웠습니다”
일본에서 배 탈라고 허는디, 날 보고 '임영순'이라고 허지 말고 '장아지'라고 이름을 올리라고 혀. 도장 받고 이름 부르는디(입국 심사를 말함). 신랑이 조용히 말을 허는디 이상혀. 그래도 가보자 하고 갔지. 그런디 일본에서 뭔 장(장류) 공장을 하드만. 그 집에다 어머니하고 나를 앉혀놓고는 해넘어가도록까지 안 찾아와. 캄캄한 년에 데리러와서 따라갔더니 방은 크고 좋은디 날마다 주인이 밥을 해다 줘. 근디 어떤 남자가 있는디 남편한테 돈을 꿔가기만 하고 안 갚아. 그 남자한테 여동생이 있었는디 한번 시집 가서 쫓겨났는디 낭자헌 머리를 다시 풀어서 땋아갖고 데리고 살았제. 근디 남편 돈을 못 갚응게 돈 대신 그 여동생을 우리 신랑한테 줬어. 우리 신랑이 데리고 살았능가봐. 결혼이 아니고 가시내를 데리고 살았어. 그런디 나한테는 그 여자를 친정으로 보내버리고 나한테 장가를 들었다고 혀. 내가 사람이 다소곳헌게 그 지경이라. 인자 그런 줄만 알고 일본집에 있었는디 어디로 이사를 가서 살림을 헐라냐 하고 기다리고 있는디 한 일주일이 돼도 이사를 안 가고 거그가 있어. 하루는 배가 요만한 여자가 왔어. 우리 어머니를 보고 "오시니라고 욕보셨소"허고는 나를 보더니 "딸은 잘 두었소만 잘 못 여웠습니다" 그려. "당신이 어째서 넘으 딸을 잘 여우고 잘못 여운 것을 아요?" 긍게 "내가 큰 마누래요" 그려. 아이고 어머니가 사지를 벌렁 눕히드만 방성통곡을 해 인자. 내 딸이 저리 생기서 어쩔 거냐고. 내가 어머니를 딱 붙잡고 "내 말 들어보고 내가 해결을 할라니까 울지 말고 참고 좀 있으라"고 했지. 나는 안 놀랬어. 그 년 앞으로 바짝 가갖고 "에이 숭헌 년! 개상년! 어찌 니가 큰마누래냐? 나이 많이 먹어서 와서 살먼 큰마누래냐, 애기를 잘 낳으면 큰마누래냐, 시집 와서 살먼 큰마누래냐? 내가 말을 들으니 시집 갔다 쫓겨와서 친정에 있던 년을 느그 오래비가 방세 있던 놈을 포수 간 빨아먹데끼 쪽 빨아묵고 동생을 델다가 머리 풀러서 처녀 맹글어서 델다가 박서방 줬다드라. 네 이년!" 그러고 막 귓방맹이를 막 쳤어. 힘 좋것다 뭐. "아나 큰 년! 맛 좀 봐라. 니 년은 나에게다 큰절을 허고 가야 혀, 왜? 동네 사람 불러놓고 사주단자 걸어놓고 절을 야닯자리를 허고 만난 내우간이야. 내가 큰마누랭게 나한테 큰절허고봐. 큰절 안 헐래? 네 이 년 큰절허고 가! 니가 내 앞에서 자랑헐라고 아그작아그작 왔냐? 당장 큰절 안 헐라먼 어서 가버려! 안 할래?" 하니까 암말도 안하고 가만 앉아서 눈물만 뚝뚝 떨어치고 있네. 그래서 양쪽 귀싸대기를 기양 허천나게 쳐부렀어. "네 이년아! 첩년아! 작은년아! 작은년은 서른살 마흔살을 묵어도 작은년이다. 큰절 안헐라면 어서 썩 없어져뿌러. 배기도 싫어, 징그러 이년아! 앉아있을라믄 큰절부터 허고!". 암 말도 안 허고 울고만 있어. 그러자 신랭이 들어와. 내가 달려들어서 남편 멕등이(멱살)을 숨도 못 쉬게 잡고 "네 이 도둑놈! 저리케 이삔 각시를 두고 넘으 무남독녀 신세 베릴라고 팔자 베릴라고 장개 왔어? 내 머리를 끌러라. 니 손으로 내 머리를 끌러야 나도 머리 풀고 머리 땋고 시집도 갈 판이여." 그럼서 가슴백이에다 머리끄댕이를 대. 니가 내 머리를 끌러야 손을 놓는다고. 막 밀어댕게 신랭이 "쪼오끄만 놓아주고 용서하씨요. 내가 할 말이 꼭 있응게 조께 놓아주씨요" 그려. 무슨 할 말인가 한번 들어보자 허고 논께, 그냥 일어나더니 그년을 발질로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하면서 "징그러! 보기도 징그런 년이 멋허러 여그를 왔냐? 자랑하러 왔냐 이년아? 발싸심 나서 시방 여그 왔제? 발싸심난 년이라…이 자리는 니가 앉도 못헐 자린다 멋허러 왔어?'그럼서 그냥 발질로 또 차. 귀퉁배기를 막 치고. 암말도 못하고 눈물말 뚝뚝 떨쳐. 밥을 반찬허고 중게 서이 앉아서 밥을 묵어. 먹고는 그날 저녁에는 낯씻고 화장 곱게 허고 머리 곱게 빗고 새요 깔고 새이불도 두 개 내놓고 그러고 있응께 신랭이 들어오더니 발씻고 양말 닦고 싹싹 닦고는 새이불 속으로 쏙 들어오네. 우리어머니 잠자리 봐주고 그날 저녁에는 신랑하고 같이 자 인자. 오래간만에 자.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본게는 그 년이 어디로 가고 없어. 언제 간 중을 몰라. 그 년이 가서 즈그 오래비한테 일렀어. 그 놈이 지 동생도 팔아묵는 놈인디, 그놈이 나를 일본놈들한테다 "박재근이가 조선에 장가를 갔다 오더니 일본 기생을 데리고 왔다. 긍께 느그들이 사가그라. 돈만 많이 주면 내가 분양해주께 사가그라." 그렁께 요리집 청루에서 돈을 돌란대도 주고 나를 샀등개벼. 그냥 거기 앉았시먼 그대로 잽히가는디, 아칙(아침)에사 말고 우리 남편 친구 마누래가 와서 우리 어머니보고 인사와서는 "집에 앉았시먼 심심헌게 공장 구경이나 허고 댕기쇼" 그려. 그래서 그 각시를 따라갔어. 구경도 허고 어찌고 섰는디, 그 각시 남자가 막 담박질로 쫓아오더니, "장가놈이 돈을 많이 받고 청루에다 당신을 팔아서 그놈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다가 당신이 없신게로 당신 물겐 싹 실어갖고 가버리고 공장에 갔다"고 하니까 지금 공장으로 오니까 빨리 피하라고 그네? 어디로 가겄어? 그 여자허고 나허고 어머니허고 서이. 엄벙덤벙허다가 잽혀가게 생앴어. 그래서 어머니보고 "바쁠 때는 바쁜 대로 헙시다. 이리 오씨요!" 허고는 질다란 뒤안으로 가봉게 산이 높고 마당에도 철사 울타리를 쳐놨어. 거그를 어치케 올라가겄어? 어머니를 각시허고 나허고 이고는 올려놓고 훌딱 뛰어넘어갔어. 나는 넘다가 고무신이 걸려서 한 짝이 떨어졌어. 이 놈들이 그걸 보고 나를 찾으까 무서워 어째야 헐꼬, 허고 살짝 쳐다봉게 풀 속에가 들어가 있어. 안 보이겄어. 잉 되앗다. 고무신 한짝만 신고 올라가자. 그러고 산을 올라가는디 죽겄어. 놀랜 속에다가 굶었지. 어머니허고 둘이 산 꽁댕이를 올라가는디 나무가 잘잘헌 것이 많이 있어서 사람들이 와도 안들키겄어. 앉어있는디 어머이는 막 울어쌌고 나는 어머이를 위로허고…. 새벽 두 시 넘어서 세 시 된데 싸박 싸박 싸박 걷는 소리가 나는디, 호랭인가, 그 놈들이 잡으러 왔는가, 놀래서 그냥 숨도 못 쉬고 있는디 봉께 신랭이여, 신랑. 어머이가 놀래서 "아이고 어치케 알고 여그를 왔는가?" 헝께 두 발 딱 꿇고 절을 혀. 어머니! 사우 잘 못 얻어서 고생을 많이 허니 죄송허다고, 용서해주십시오. 내 앞에서도 딱 꿇더니 남편 잘못 만나서 고생헌다고, 다른 할말은 없고 용서만 해달라고. 용서를 해주고 말 것도 없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신이 저질러서 된 일이지마는 당신이 그런 것이 아니고 장가란 놈이 그런 것이니까 당신을 용서헐 것이 없소. 근이 앞으로 우리 살 일이 걱정이요. 어치게 살면 사요? 그런게 아래로 살살 내려가거든? 그래 살살 동네로 내려와서 밥을 배불리 먹고 발바닥에 가시 박힌 놈 빼고 운동화 한커리 주글래 신고 고맙다고 인사허고 문우 없는 비단 세 필을 줘. 어치게 고마울 거셔? 절을 몇 번이나 허고 작별허고 눈물바람을 허고… 남편을 따라가. 따라가는디 어디를 가능가 몰라. 어디만큼 가다가 동네 나오면 들어가서 밥얻어갖고 와서 주고. 글안허먼 국물이라도 얻어먹고 갖고 오고. 정월에 아가 들어서갖고 그때가 이월 삼월 사월, 입덧을 허네. 근디 먹을 것이 있어야지. 빼짝 말라갖고 나쁜 놈의 서방님이 길만 걸어. 하루내 걸으면 어둑어둑허면 뉘집에 가서 자고가자만 혀. 머심들이 살던 행랑채 웃방겉은디서. 주인양반이 나를 보고 저 아주머니는 얼굴도 잘 생겼제 태도도 좋제 참 좋게 생긴 사람이 남편을 보라고 내우간 되겄냐교. 먼 일이 있어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래도 어쪄? 부모가 맡겠응게. 그렇게 다섯 달을 걸어서 6월이 되었어. 누 사랑방에서 자고 누 마당에서 자고…. 우리 어머니가 팍 주저앉으면서 인자 나는 못 가네. 밥 끓여먹기도 첨이고 질도 생전 처음 걸어보는디 인자 더 이상은 못가네. 볼일이 꼭 있으믄 자네 혼자 가소. 긍께 저 동네도 들어가봅시다 그러더니 방을 하나 얻어. 가서 봉께 방이 깨깟허니 괜찮여 솥도 걸려있고. 그래서 씰고 ㄸ고 털고 헝게는 짐 들여놓고 있응게 시장도 가찹고 좋아. 가만히 누워서 잠오면 점드락 자고 밥을 잘먹고 있는디 옆에집 여자가 놀러와서 "혹시 바느질 헐 중 아요?"그래. 바느질 못허는 사람이 어디가 있소 헝께, 바느질좀 이삐게 해주씨요, 그래. 가지와 보라고. 거그는 맨 조선사람만 살아. 그래 하리에 한 벌을 곱게 해갖고 준께 입어보더니 딱 맞고 좋거든. 새인물이 나. 긍께 이 여자가 자랑을 허고 댕긴께 동네에서 바느질일이 들어오는디, 이 집서도 오고 저 집서도 오고…. 하리 한벌씩 착착 해서 주먼 돈을 착착 주지. 돈이 잘 벌려. 신랑을 나무 해다가 불 때고. 어머이는 늙은 양반이라 경험이 있은께 누 야기 나먼 산파 태끊어주고, 딸은 오천환 받고 아들은 팔천환 받고, 저녁에는 나란히 앉아서 바느질만 해서 돈을 버는디, 날마다 한벌씩 들어와서 돈을 버네? 거그가 큰 동네였어. 나를 구경허러 온 사람도 있어. 애기 업고. 양반집 딸이고 배운 것도 있고 얌전허고 이쁘고 참 좋다. 바느질도 잘허고. 옷 한벌에 꼭 7천환씩을 받었어. 내가 해서 입히놓으면 새인물이 나. 그렇게 6, 7, 8, 9, 넉 달을 꼼빡 번께 돈이 많이 모았어. 근디 남편은 그렇게 돈을 번 중 몰라. 김치랑 잘 해서 밥상을 차리줘도 어디에서 돈이 난 줄을 몰라. 남편이 그렇게 의욕이 없어. 얌전허기만 허지. 사교성도 없고 말대답도 못허고. 그냥 농판이라. 밥먹고 나무 쪼께 허는 것뿐이여. 폭폭해서 살 수가 없어. 그래도 어쪄? 부모가 맡겠응게 죽어도 그 집구석에서 죽어야 헝게.
다다미방에서 애기를 낳으면 애기도 죽고 나도 죽소! 그러다가 일본집 옆에 있는 잠실(누에치는 곳)로 이사를 했는디 애기 낳을 달이 됐어. 애기를 조선서 따순 방에서 낳아도 나오믄 애기가 떠는디, 이불도 없제 전기도 없제 수도도 없제 다다미에서는 바람 들어오제, 벽짝도 없어. 인자 10월인디, 내가 그랬어. 조선 가서 애기 낳고 백일 지내면 다시 들어올랑게 내보달라고. 그랬더니 못간댜. 그래서 못가는가 가는가 보라고 허고는, 거그서 한 3백리 되는 곳에 하관(시모노세키)이라는 디가 있는디, 배표 두 장을 끊어갖고 집이를 들어갔어. 어머이가 박서방도 없는디 우리만 가믄 어찌냐고 걱정을 허는디, 낮에밥 먹고 나간 사람이 안 들어와. 머냐(먼저) 살던 집으로 갔능가벼. 나가 조선 나간다고 헝께, 내 고집에 나갈 것일 중 알고 저 살던 대로 갔능가벼. 그 여자(동거녀)는 애기를 3월에 났응게 터벅터벅 걸어댕겨. 그리 갔능가벼, 안 들어와. 그래서 그냥 어머이하고 둘이 전철 타고 하관에 와서 배를 타고 배고픈게 배 안에서 벤또 사먹고 부산 나왔어. 경찰한테 걸릴까 무서서 여관에서 사흘간 자고 걸어왔어. 차 타믄 잽혀강게. 구미로 대전을 김제로 걸어서 걸어서 집에 도착헝게 아부이는 시제 모시러 가고 집에 안 계시네. 동네사람이 밥을 해줘서 먹고는 앉었은게 누가 기별을 해줬는가 오셨어. 얼매나 고상을 했냐고.. 추석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응게 혼자서 출상을 허고 얼매나 고상을 했겄어? 고상을 많이 했지. 그 이튿날 경찰이 둘이 왔어. 와서는 당신 일본서 왔지라? 예 일본서 왔소. 오늘 가야 허요. 왜 가냐고. 왜 가다니? 도망해서 왔응게 가야지. 가라고 말고 내 말부터 들어보시오. 애기 배서 새달이 날 달이라 애기 낳으러 왔는디 못 가게 해서 열엿새를 걸어서 이 배를 해갖고 왔소. 근디 또 가? 못 가요! 누에 친 잠실방에서 애기를 낳으먼 애기도 죽고 나도 죽소. 이불도 없지 전기도 없지 물도 없지 냇갈물 길러다 먹고 사는디 누가 내 빨래를 해주고 밥을 해주고 애기 수발을 한단 말이요? 다다미방에서 애기를 나먼 애기 죽고 나 죽고 우리 어머니도 따라 죽고 그렁게 도망해서 내가 걸어왔소. 못 가요! 그랬더니 경찰이 가버려. 가버리고, 그 동안 번 돈 그놈 갖고 잘 살었어. 그러고 다음달에 딸을 낳았지. 애기가 이뻐서 동네사람들 난리가 나고 그냥. 나는 또 부인회장을 허고.
그렇게 못 나고 그렇게 깝깝한 사람 근디 남편한티서 기별이 없어. 내가 일본으로 편지를 했더니 용케 받았던가봐. 편지가 오기를 일본으로 오면 자기가 하관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니 마음대로 허라고 하고, 어머이는 멋허게 또 가냐고, 당신도 사우 허는 꼴을 봤잉게 절대로 못 간다고. 갈라믄 너나 가라고. 그래서 나 혼자 갔어. 갔더니 애기 안 데려왔다고 툴툴혀. 그래서 집을 얼매나 잘 해놓고 그러는가 했더니 또 그 집이여 그집! 가서 그 달에 아가 들어섰네. 나무끌통 베어다가 시장에다 팔아서 돈 좀 벌면 노름해서 다 잊어번지고, 짜고 치는 노름이라 당해 낼 장사가 없어. 다 뺏기고 술이나 몽땅 멕에서 보애면 외욕질이나 허고 그냥. 세수비누 빨래비누 한 장을 안 사줘. 집에서 막상 몰라서 일본에서 집으로 돌아간 돈을 가지고 갔는디 입덧을 헝게 아무것도 못 먹어. 옆집 사는 일본 여자가 남편한티 말을 했등가벼. 그제서야 나헌티 멋을 묵고잡냐고 물어봐. 쟈(딸)는 들어섰을 때는 살구를 많이 먹었거든. 머시메였든가봐. 자꾸 괴기가 먹고싶어. 그러고 뚜둑뚜둑 배가 불러져서 여섯 달 차가 나는디, 옆집 개가 조선옷 입은 사람만 보믄 그렇게 짓어싸. 끈을 묶어놨는디 쨈맨 디가 풀어져갖고 달려와서는 그냥 나한테 달려드는디, 내 가슴에 달려들 동안에 주인이 보고는 그냥 작대기로 죽어라 때링게 이 놈이 벌떡 자빠져. 나는 그냥 기함혀 버리고. 나흘만에 애기가 이상해. 피가 비쳐서 병원에 간게 유산이랴, 뱃속에서 죽었다고 혀. 뗐지. 의사가 아들이랴. 아깝다고. 의사헌티 돈을 줘야 허는디 다 줘버리면 조선에 못 나가고 어찌까 허고 있는디 신랭이 와서는 돈을 주고는 택시로 실러 왔더라고. 그때는 고맙대. 집에 왔더니 일본여자가 이불 갖다가 덮어주고 미역국에다가 명태를 끓여서 밥허고 갖다가 주고. 근디 남 몰리 밤에 냇가에 가서 피 빨래를 했더니 몸이 태산같이 퉁퉁 부섰어. 조선 가야지 안되겄어. 나 조선 간다고 편지 몇 자 써놓고 다시 부안으로 왔어. 어머이 아부지가 놀래갖고 약방에 가서 약 지어서 먹고 따순방에 누워서 땀 흘래쌌고 약 멕이고 헌게 다샛 된 게 낫대. 붓기도 빠지고. 밥도 잘 먹고 좋아졌어. 그래서 편지를 했어 낫었다고 곧 간다고. 그때가 스물 네 살이었는디. 그러고 나서 3년을 또 집이서 있었는디 주소가 어디로 가부렀어. 편지가 가면 도로 오고. 인자 몰라. 그리서 일본으로 찾아가 본게로 그 집은 주인이 창고로 쓰고 있고 사램이 없어. 찾다 찾다 못 찾고 주인 보고 이 사램이 어디 갔고 긍게로 어린 머시매 앞세우고 보따라 하나 짊어지고 어디론가 갑디다. 주인 보고 간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갑니다. 그렇게 생ㄱ어 사램이. 그래서 어치케 헐 것이냐 생각을 혔어. 집으로 가먼 일본에서 돈 벌어서 온 중 알 것이고, 바느질 허고 질쌈 허고 밭일 허고 그런 것을 해야 할 테니, 인자 그것도 싫고. 주인 여자는 자고 가라는디 자기도 싫고 그냥 거그서 죽었이먼 씨겄어. 그런 남편을 믿고, 사람들헌테 말 한마디도 못 허고 그렇게 못 나고 그렇게 깝깝한 사람, 세상 가도 그런 사람. 혹여 살았어도 생전에는 같이 못 살고 인자 나는 내 신세를 어치케 헐꼬.
《그렇게 남편과 헤어진 임영순 할머니는 그 길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바느질로 돈을 번 뒤 북해도 탄광 근처로 갑니다. 조선인들 대부분이 탄광노동자였던 그곳에서 통역도 하고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합니다. 돈도 제법 잘 벌어서 최고급 금바늘 콜롬비아 유성기를 사서 집에 갖다주기도 하고 레코드판도 40장이나 삽니다. 1945년 연합군의 일본 대폭격일에 죽을 고비를 넘긴 항머니는 해방된 지 한달 여만에 다시 부안으로 오게 됩니다. 무남독녀 딸이 열 네 살, 할머니가 서른 세 살 되던 해였습니다.》
아따 재미가 나는 게벼 인자 집에 와서는 농사 짓고 베 짜고 넘의 일 해주고 모도 심으러 댕기고 밭도 매러 댕기고 바느질도 해주고… 내가 모도 잘 숭거요. 시조는 마흔 다섯 살 묵어서부터 배웠어. 서른 세 살에 와갖고 서른 일곱에 딸 여우고 안 하던 일을 많이 했제. 수수모가지 끊어다가 도구통에 찌서 수수밥도 해묵고 감자도 캐다가 울안에 쟁애놓고 시한(겨울)에 동네사람들 놀면 책보고, 밤에 야학도 갈치고… 동네 각시들헌티 시한마다 갈쳤어. 벨일을 다 허고 댕긴께 나중에 면에서 대한부인회 회장허라고 또 왔어. 그거 허면 돈 주제, 쌀 주제. 양식을 한 달에 쌀 한 말썩 주고 월급도 주고. 월급은 저금허고. 우리 어머니는 나 때문에 더러운 옷 안 입고 살고 포도시 칙간(화장실)ㅂ이 못 가던 양반이 여든 다섯에 돌아가셨는디, 고기 사다가 밥해주면 "너는 왜 안 먹냐"고 물어보면 "먹었다"고 허고 어머니만 드리고. 그러다가 여든 다섯에 내 무릎에서 돌아가셨어. 시조를 어치케 배왔느냐. 우리 앞집이 사는 사람(부안의 임기하씨를 말함)이 있는디, 그 양반 딸이 나허고 띠동갭인디, 나랑 제일 좋아하는디, 그집 아부지가 가야금 배우고 글씨 배울라고 목포 유달산 밑에 무슨 회관이 있는디, 거그 가서 가야금 배우고 글씨 공부허고, 인자 피리 장구 다 배와갖고 왔어. 시조 배왔지, 병풍 글씨 배왔지, 3년 배우고 있다가 와서는 부안 월명절에 가서 병풍 글씨도 쓰고 했는디, 그 양반이 우리 윗집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가심서 나가 베를 짜고 있는디, 우리집에 왔어. 베를 짜다가 봉께로 올라오셔. 베틀을 풀어놓고 인사허고 "댁에 어찌 오셌어요?" 긍게로 "아니, 자네가 시조 부른단 말 듣고 내가 왔네." 그려. "내가 뭔 시조를 불러요?" 헝게 "시조 부른다고 소문 났던디? 시조 배우소."그려. 우리 아부지가 써논 주련 글씨를 "한산섬 달 밝은 밤'허고 "동창이 밝았느냐'허고 종우에다 써서 주련에 붙예놓은 놈이 있어. 그 놈을 베짬서 욈서 읽었어. 그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시조 부른다고 했등가벼. 그 양반이 그려. "자네 틈만 나면 와서 시조를 배우소." 그래서 "아니, 여자가 시조 배와도 괜찮은 것이요?" 했더니 "노래 부르면 기생이 되야도 시조를 부르면 아주 귀함 받고 잘 되면 전국적으로 대우를 해준다"고, "그런 데를 왜 안 가냐"고 날더러 "시조 배우소."그려. "재미만 붙이면 올라고 허는 게 병인게 오소!" 그래서 그 베를 얼른 짜서 끊어서 어머니에게다 맡겨놓고 새벽밥 해서 먹고 어머니 드실 상 덮어놓고 새벽에 가는디, 신작로로 가야허는디 지름질로 간다고 강게로 어느 산밑이를 돌아가는디 막 머시 "왁!" 소리를 질러. 여시(여우)였던 모양이라. 그 자리서 주저앉아 부렀어. 땀을 뻘뻘 흘림서 일어나서 들로 해서 동네 속으로 들어가갖고 인자 읍내로 들어강게 아직밥상 받고 있데. 아직밥을 먹고 쉬고는 큰방으로 들어가더만 "자네 들어오소" 그려. 정지문 열고 들어강게 시조책을 이렇게 벌려놓고는 자네 좋아하는 걸, 할 만한 걸 내놓으라고 그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은 게 가사를 다 외거덩? 아따 재미가 나는게벼, 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