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 그런 재주가 나와 첨에 시조를 부를라면 어데든지 평시조를 첨에 부르고 그 담에 사설을 부르고 그 담에 지름을 부르고 그 담에 남창 부르고…. 그런 식인디, 평시조를 잘 부르면 대우받는다고 그려. 그래서 나는 평시조를 많이 배웠어. '한산섬'허고 '동창이 밝았느냐'하고 '청산리벽계수'허고 세 가지를 배왔는디, 기양 가사는 누가 물어볼 것도 없어. 그냥 배워버린게. 근디 목을 어디는 낮찹게 허고 어디는 높게 허고 목성을 내는 법을 알아야 하는디, 모르제. 어머니 봉양도 해야니까 밥을 한 이틀 묵을 놈을 딱 해서 놓고 어머니 갔다 올라요. 허먼 갔다 오니라. 그렇게 사나흘만에 한번씩 읍내(부풍율회관: 당시 임기하씨가 집을 지어 시조인들이 모였음)를 갔제. 임기하 선생헌티 배왔는디 누구헌티 배울 것도 없이 잘해. 그 전에도 굿거리 장단에 유행가를 잘 혔어. 목이 좋은게로 나한테 시조를 시켰는가봐. 아무 소리라도 나오니까. 숨을 안 쉬고도 얼매든지 (소리를)뺄 수 있는 재주가 나오데. 숨 안 쉬고도 얼마든지 빼라면 한정없이 빼겄어. 그런 재주가 나와, 속에서. 그래서 몇 번 안 배왔는디 그렇게 헌게 "어이 자네. 군수영감 아버지랑 몇몇이서 자네 시조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면 좋겠다고 허는디…집안이라고 나한테 사정을 허네' 그려. 그래서 아직 못 부른다고 헝게 못 불러도 한번 들어보자고 그려. 여자 소리를 안 들어봐서.(100명이 넘는 부풍율회에서 회원중 여자회원은 임영순 할머니가 유일했다) 근디 또 밥 묵으면서 "자네 이만저만해서 시조 한자리 불러볼랑가?" " 하이고 못 부르요. 어치게 부른다요. 못 불러요." "자네 대회 나가라고 허는데 아니라 웃방에서는 듣고 밀창이 있고 사람들이 안 보이게 아랫방에 앉아서 부르는 거라고, 장단은 웃방에서 친다"고 그려. 그 양반이 그렇게까지 허는디 어째야 옳여? 그냥 들어갔어. 들어가는디 그냥 떨리고 문을 요러콤 열어놓고 어른들은 그 방에 앉어 있고, 그 문으로 소리가 들어가게 시조를 불러.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를 부르고 나오는디 막 추워싸. 인자 배운 지 한 달도 못 된 사람이 그렇게 부른게 "자네 큰 시조 되겄네!" 영감들이 그렇게 추워싸. 아 그냥 자꾸 재미가 나. 미쳐가지고는 밭매는 것도 싫고 밥도 싫고… 그냥 시조만 허고싶어. 집에서도 시조를 부르고 싶어서 밥을 일찌감치 해놓고 나무갓으로 가면 거그도 사람이 있고, 저쪽으로 가먼 저쪽에도 사람이 있고 나무갓에 가도 헐 디가 없어. 나중에는 평시조 부르고 사설시조 배우고 여창지름을 배우는디, 여창지름은 소리가 높아야 된만 말이여. 긍께 아무디서나 못 불러. 임기하씨 집에 가서나 부를까. 거그서 배우는디 나 하고자픈 대로 재주가락이 안 나와. 가만가만허먼 안 나와. 크게 목대로 질러야 나오는디. 헐 디가 없어서 장지산이라는 산이 있어. 장지산으로 인자 나무허는디끼 가마니떼기를 어깨에다 메고 십리가 되는 길을 걸어가서 산에를 올라갔어. 봉댕이 질로 높은 봉우리를 올라강게 거그는 사램이 없드만. 저 아래서 사람 소리가 나기는 해도 불러도 허겄어. 거그서 평시조 부르고 사설 부르고 여창지름을 부르는디 거그서는 맘대로 대여섯 자리 넘게 재미지게 부르는디, 아 어떤 놈이 싸드락 싸드락 올라와. 내 뒤에서 와서 헌다는 소리가 왜 당신 넘의 나무갓에 나무허로 댕기요? 그려. "내가 뭐 나무 했소? 가마니떼기만 갖고 왔지, 내가 뭐 나무했냐고." 그랬더니 그냥 웃고 가버려. 가버링께로 인자 마음대로 불르는디 불르다가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어. 집에 와서 밥을 해묵고 어찌 재미가 날 것이여? 나가 못했던 디가 제대로 된게로. 그 사흗날인가, 읍내에 가갖고 평조허고 사설허고 여창지름을 헌게로 임기하씨가 놀래여. 어치게 그렇게 여창이 잘 되냐고. 근디 '울∼고'자리가 안 되야. '울∼고'자리가 있거덩. 그게 안 돼. 안 돼서 그 놈을 어치케 해야될까 싶어. 다 해도 내야(내 소리)만 못헌디, 누구헌티 배워야 헐까 싶어. 거그 배우는 사람들이 다 남자들이여. 백 명이 넘어. 아흔아홉명이 남자고 나 하나가 여자라. 내가 '울고'자리를 기어이 배와갖고 너그들을 이겨묵을란다. 그 사람들이 다 해도 나같이 여창지름을 못헌단 말이여. 근디 임기하씨가 '울고' 자리가 잘 되네 잘 되네 그려. 그 양반도 '울고' 저리는 나만침 못혀. 목은 좋아도. 재주가락을 못혀. 아이고∼ 받기를 잘 헌다! 정읍 읍내를 들어가면 사주보는 사람이 있는디 그 사램이 그렇게 시조를 불기는 불어도 여창지름을 못 헌단디, 내가 간게로 나가 가면 그렇게 반가허네. 못 가게 허고. 사주 보는 사람 들이 없으믄 나한테 여창지름 해보라고 허는디, 아니요. 못 허는 디가 있어요. 했더니 정경태씨(석암)가 그 집에 와서 가끔씩 쉬었다 가. 근디 그 날 정경태 그 양반이 왔어. 저녁밥을 거그서 먹고 나허고 정경태씨허고 사주보는 영감님허고 서이 있는디, 정경태씨가 나보고 "어디까지나 배왔소?" 그려. "여창지름ㅂ이는 몰라요. 여창지름 울고 자리를 좀 갈체 주씨요." 긍게로 피식 웃드만 "외상으로는 못 갈쳐라." 그래. "글믄 어치게 갈치요?" 긍게. 그 사람이 화투를 좋아혀. 그 양반이 그때 쉰한 살이나 묵었을 것이요.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 그 양반이 화투를 잘 쳐서 누구헌티 안 지는디, 화투쳐서 내가 이기면 날 갈쳐주고, 지면 안 갈체주기로 허고 화투를 쳐. 부지런히 화투를 치는디 그렇케 잘치는 양반이 세 판을 지네? 그래갖고 헐 수 없이 갈체야 겄그만, 허고는 처음부터 나보고 불러보라 허드만. 글고 '울고' 자리를 자리가 만들어줘. 글먼 나는 만들어주먼 만들어주는 대로 받어. 정경태씨가 "아이고 받기를 잘헌다!"고 험서 거그서 '울고' 자리 때를 벳ㄱ어. 인자 됐어. 화투 친 값을 했어. 그래놓고는 술도 못 묵거덩. 과자 사놓고 먹고 그날 저녁 자고 그 이튿날 집으로 오는디 또 읍내에 갔어. 다들 재주가락을 자기가 잘 허는 중 알지, 넘이 허는 걸 몰라. 근디 임기하씨가 듣고는 "자네 여창지름 잘 되네, 잘 되야. 거 울고 자리가 어찌 그리 잘 되는가?"허고 물어. 그래서 얘기혔어. 석암(정경태)허고 화투쳐갖고 내가 이겨서 그 양반이 갈쳐줘서 내가 배왔다 헝게, "아따 통도 크네!" 그려. 대 선생님헌티 화투치고 재미봤그만! 허고.
기어이 배와갖고 너그들을 이겨묵을란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허는 게 여창지름이여. 그 양반헌티 배와서. 여창지름 잘허고 남창지름도 잘허고 평시조도 잘허고 엮음지름도 잘 혀. 엮음지름을 제일 낫게 허고! 그리서 일등을 혔어! 군산에서. 시조창 대회가 을부, 갑부, 특부, 명인부, 이렇게 있는디, 명창부에서 된 것이 군산이여. 갑부에서 일등은 나주에서 허고, 여남은 번 대니다가 일등을 혔어. 4등허다 3등허다 2등허다 1등을 허고, 4등허고 3등을 ㅁ 번허다가 1등혔지. 댕기기는 석빠지게 댕개도 1등을 못허다가 나주에서 했어. 허고는 또 특부, 특부를 목포 가서 허는디, 모다들 "부안으로 특부 간다" "부안으로 특부 간다" 그래싸. 잘 불렀거든 그날. 내가 들어도 흠이 없이. 아 근디 나만 못헌 놈에게로 상이 가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어이 헐 것이다 허고 특부 1등허러 야닯번을 댕앴어. 어디든지 대회가 있다 허믄. 특부 통지가 오먼 오는 날부터 가는 날까지 연습을 혀. 저그 강원도에서도 제일 추운 디로도 두 번이나 갔었어. 부산에도 두 번 가고. 마산도 두 번 가고. 진주, 어디 안 간 디가 한 간디도 없이 쫓아댕ㄱ어. 그리서 (경상도) 양산서 특부 1등을 혔어. 사방에서 나를 놀래싸. 몇 살 묵었소? 서방님은 있소? 없소? "아니 여보시오. 넘의 서방이 있으먼 멋허고 없이먼 멋헐라고 그요? 당신은 각시 없소?" 그러믄 저리 가버려. 그렇게 내 속을 앙게 인자 남자들이 안 건들고 나는 계속 대회를 댕겨. 양산에서 특부 1등을 해서 돈 타가지고 인자 집에를 온게로, 인자 명창부 생각이 나. 대구 가서 명창부를 두 번을 떨어졌어. 어느 동네 사는 남자가 시조를 잘헌다고 허는디, 내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꼭 저 여자에게로 1등이 가야 허는디 왜 모르는 남자에게로 가는고?"허고 자기가 부예가 나더라고 혀. 진짜 부예가 나. 인자 군산에서 시조를 허는디 우리 부안 사람이 일곱 명이 갔어. 저물드락 듣고 저닉에 해가 걸린 무렵이라 집에 먼게로 돌아와야 헝게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서 나가. 나는 속으로 "부르고 갈 것을…"하는 마음인디 다들 강께 그냥 따라나오려고 허는디,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남자 하나가 나 치매 끝자락을 붙들고 "시조 부르고 가재?" 그려. 봉게로 생전 안 본 사람이여. 그래서 "이 건방진 사람이… 여자를 어디를 건들고 그려!" 했지. 괘씸혀서. 그런디 계속 "아주머니 부르고 가, 부르고 가쇼" 그래. "나 시조 못 불러요" 나가 잡아 띵게로 "나가 대구서 시조 부르는 것을 보고 두 번 떨어진 것을 보고 잘 아요. 그렁게로 불르고 가시오." 그래. 그날 나온 사람 시조를 다 들어봉게 별 것이 아니거든. 근디 시조 마감이 다 되야부럿어. 마감허고 나만 안 받아주거덩. "사람이 허는 일인디 그거 못허것소. 내가 시켜줄 테니 허시오." 그러더니 부를 사람이 넷이 남었는디 그때 내가 들어가먼 그 사람이 이의를 달 것 같어서 못 헌다고 헝게로 자기가 가서 타협을 혔어. 우리 회장이 할 수 없이 심사위원들헌테 다 말을 해놓고 급헌 일이 있어서 갔다가 인자 왔다고 헝게 다 고개를 끄덕끄덕 혀.
처음부터 소리가 입에 착 앵기네 그래서 다 허고 인자 마지막으로 내가 올라가는디 그 전에는 시조 불르러 올라가면 내 옷깃이 달달달달 떨어. 근디 그날은 앉었어도 안 떨어. 올라갔어. 광대상에 올라가서 딱 앉었는디 가슴도 안 떨리고 안 떨려.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시조를 외운게, 처음부터 입에 차악 앵기네? 젓대허고 소리하고 착 맞아부러. 젓대허고 맞어야 허거덩. 그래서 다섯 자리 불렀어. 평시조허고 사설시조는 안 불러. 여창, 남창, 우조, 엮음… 다섯자리 불러야 혀. 다섯 자리 중에서 엮음을 마지막으로 불르는디, 그날은 엮음이 특별히 잘 되네. 아직 다 안 부르고 쪼끔 남었는디 사람들이 수근수근허고는 신문사 사진기가 내 앞으로 올라고 허고는 여그저그서 어쩌고저쩌고 수근수근혀. 부르고 일어낭게로 와아∼하고 쫓아와서는 나를 보듬고 심사위원 하나가 만세를 부르고 다 좋아허네. 잘 들었다고. 남자들이 잘 불렀어도 내가 낫었응께 상이 내게로 왔지. 거그서 1등을 해갖고 돈 타갖고 그 이튿날 잔치허고. 그때가 일흔 두 살 인가? 오래 되어.
명창부 1등 해버리면 딴 대회에 나가서 못 불러. 돈 보고 왔다고 욕 혀. 긍께 가서 굿이나 보고 돈을 걸어야 혀. 3만원이나 5만원이나 걸고 찬조출연을 혀. 심사위원들이 심사허는 동안 소리나 들어보자고. 여든 야닯인가 아홉에 내가 여그(정읍 딸네집)를 왔는디 오기 전 해까지도 소리가 잘 나왔어. 그때까지도 잘 불렀는디 여그 와서 생전 입을 딱 오무려둔게로 인자 소리가 안 나와. 근디 부안 병원에 가서 약 갖다 먹고 진찰도 해보는디 의사가 그려. "임선생님이 목의 핏대가 요놈(왼쪽) 달부고 요놈(오른쪽) 달르게 올라댕기요. 긍게 말소리가 째져갖고 나오든가 두 갈래로 나올 것이요"그래. 근디 말소리가 시방 두 갈래로 나오거든. 째지게 나온게로 안 부르고자퍼 인자. 지금도 한 배, 한 배는 얼매든지 늘여뺄 수 있어. 그건 한 번 배와놓으먼 늙어도 헐 수가 있는디, 째진 소리가 나온게 잘 안 불러. 죽겄어, 째진 소리가 나와서. 여든야닯살 때까지는 째진 소리가 안 나오고 외골수로 소리가 났는디 한 통으로 나왔는디. 양금을 그 전부터 배왔는디 시조창을 부르고 김제, 이리 양금선생님헌티 이리정악원에 풍류로 유명헌 선생헌티 가서 양금을 배왔어. 양금도 다 악보를 세워놓고 보면서 치는디 나는 악보 없이 다 쳤어. 악보도 안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긍게 거그 선생이 벨일이라고. 어치게 생개서 그렇게 허냐고. 하여간 스물 몇 가지가 되는 놈을 그냥 쳐. 악보도 안 놓고. 근디 한번 놓아버린게 영영 안 되네. 영영 안 되야. 인자는 누가 와서 치라고 해도… 춤추는 가락이 있어. 양금도. 그 가락을 제일로 멋있게 친게로 선생이 잘 치는 양금이라고 나보고 그랬어. 시조 잘허지 양금 잘허지 서울서 오라고 불러. 글먼 야닯명이 서울 공연을 가. 풍류치는 사람들허고 같이. 이리 줄풍류가 유명혔어. 우리가 언제가 일등허고 와.
잘 써묵은 사람이 없어 언젠가는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갖고 조선옷 있냐고 물어보더니 나를 조선옷을 입헤놓고 세워놓고 시조 부르고 앉혀놓고 시조를 부르고 양금을 치라 하고 벨 짓 다 허데? 그것이 전국으로 다 방송된다고 그려. 명창 된 다음에. 일흔 몇 살 묵었는디 일흔 몇 살로 안 봐. 한 사십살ㅂ이 안 봐. 한번은 모델도 하라고 허고. 큰 낭자 허고 마이크 잡고 시조 부르는 양. 남원 광한루에서도 기별이 왔어. 갔더니 족두리 쓰고 원삼을 입고 나가서 노래를 부르라고혀. 춘향가. 전주서는 둘이고 정읍서 둘이고 부안서는 나 하나여. 이도령허고 장모님 만나는대목을 좀 혔어. 전부 춘향가만 혀야 혀.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불려갔어. 시조도 아니고 판소리를. 판소리는 안 배웠은게 글 읽데끼 5분간 불러. 그렇게 남원에도 몇 번 불려댕겼어. 그나니나 나겉이 시조 배와갖고 잘 써먹은 사람이 없어. 시조가 그렇게 좋은 것이여. 시조 배운다면 방애도 빨리 찧어주고 밥도 빨리 해주고… 그렇게 재미가 있어. 집에서 부르면 어머이가 듣기 싫다고 헝게, 저 웃방에 가서 방문 닫고 이불 둘러씨고 엎제서 속에서 불러. 불르고 나와야 잠이 와. 그렇게 열심히 혔어. 이게 대우도 받고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고 헝게, 늙어서 죽어도 다른 한은 없어. 그때는 그냥 시조 못 배우먼 어쩔꼬 싶고, 넘보다 잘 불러야 헐 텐디 어쩔까 싶어서 욕심이 생기고 오직 그것뿐이었제. 부안에서도 여자는 나 하나, 정읍에도 김제에도 여자는 한 명도 없어. 여자 시조 명창은 찾기 힘들어. 그걸 내가 했잉게 인자 늙어 죽어도 한이 없어. 누가 기별을 해줬는가 오셨어. 얼매나 고상을 했냐고.. 추석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응게 혼자서 출상을 허고 얼매나 고상을 했겄어? 고상을 많이 했지. 그 이튿날 경찰이 둘이 왔어. 와서는 당신 일본서 왔지라? 예 일본서 왔소. 오늘 가야 허요. 왜 가냐고. 왜 가다니? 도망해서 왔응게 가야지. 가라고 말고 내 말부터 들어보시오. 애기 배서 새달이 날 달이라 애기 낳으러 왔는디 못 가게 해서 열엿새를 걸어서 이 배를 해갖고 왔소. 근디 또 가? 못 가요! 누에 친 잠실방에서 애기를 낳으먼 애기도 죽고 나도 죽소. 이불도 없지 전기도 없지 물도 없지 냇갈물 길러다 먹고 사는디 누가 내 빨래를 해주고 밥을 해주고 애기 수발을 한단 말이요? 다다미방에서 애기를 나먼 애기 죽고 나 죽고 우리 어머니도 따라 죽고 그렁게 도망해서 내가 걸어왔소. 못 가요! 그랬더니 경찰이 가버려. 가버리고, 그 동안 번 돈 그놈 갖고 잘 살었어. 그러고 다음달에 딸을 낳았지. 애기가 이뻐서 동네사람들 난리가 나고 그냥. 나는 또 부인회장을 허고.
그렇게 못 나고 그렇게 깝깝한 사람 근디 남편한티서 기별이 없어. 내가 일본으로 편지를 했더니 용케 받았던가봐. 편지가 오기를 일본으로 오면 자기가 하관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니 마음대로 허라고 하고, 어머이는 멋허게 또 가냐고, 당신도 사우 허는 꼴을 봤잉게 절대로 못 간다고. 갈라믄 너나 가라고. 그래서 나 혼자 갔어. 갔더니 애기 안 데려왔다고 툴툴혀. 그래서 집을 얼매나 잘 해놓고 그러는가 했더니 또 그 집이여 그집! 가서 그 달에 아가 들어섰네. 나무끌통 베어다가 시장에다 팔아서 돈 좀 벌면 노름해서 다 잊어번지고, 짜고 치는 노름이라 당해 낼 장사가 없어. 다 뺏기고 술이나 몽땅 멕에서 보애면 외욕질이나 허고 그냥. 세수비누 빨래비누 한 장을 안 사줘. 집에서 막상 몰라서 일본에서 집으로 돌아간 돈을 가지고 갔는디 입덧을 헝게 아무것도 못 먹어. 옆집 사는 일본 여자가 남편한티 말을 했등가벼. 그제서야 나헌티 멋을 묵고잡냐고 물어봐. 쟈(딸)는 들어섰을 때는 살구를 많이 먹었거든. 머시메였든가봐. 자꾸 괴기가 먹고싶어. 그러고 뚜둑뚜둑 배가 불러져서 여섯 달 차가 나는디, 옆집 개가 조선옷 입은 사람만 보믄 그렇게 짓어싸. 끈을 묶어놨는디 쨈맨 디가 풀어져갖고 달려와서는 그냥 나한테 달려드는디, 내 가슴에 달려들 동안에 주인이 보고는 그냥 작대기로 죽어라 때링게 이 놈이 벌떡 자빠져. 나는 그냥 기함혀 버리고. 나흘만에 애기가 이상해. 피가 비쳐서 병원에 간게 유산이랴, 뱃속에서 죽었다고 혀. 뗐지. 의사가 아들이랴. 아깝다고. 의사헌티 돈을 줘야 허는디 다 줘버리면 조선에 못 나가고 어찌까 허고 있는디 신랭이 와서는 돈을 주고는 택시로 실러 왔더라고. 그때는 고맙대. 집에 왔더니 일본여자가 이불 갖다가 덮어주고 미역국에다가 명태를 끓여서 밥허고 갖다가 주고. 근디 남 몰리 밤에 냇가에 가서 피 빨래를 했더니 몸이 태산같이 퉁퉁 부섰어. 조선 가야지 안되겄어. 나 조선 간다고 편지 몇 자 써놓고 다시 부안으로 왔어. 어머이 아부지가 놀래갖고 약방에 가서 약 지어서 먹고 따순방에 누워서 땀 흘래쌌고 약 멕이고 헌게 다샛 된 게 낫대. 붓기도 빠지고. 밥도 잘 먹고 좋아졌어. 그래서 편지를 했어 낫었다고 곧 간다고. 그때가 스물 네 살이었는디. 그러고 나서 3년을 또 집이서 있었는디 주소가 어디로 가부렀어. 편지가 가면 도로 오고. 인자 몰라. 그리서 일본으로 찾아가 본게로 그 집은 주인이 창고로 쓰고 있고 사램이 없어. 찾다 찾다 못 찾고 주인 보고 이 사램이 어디 갔고 긍게로 어린 머시매 앞세우고 보따라 하나 짊어지고 어디론가 갑디다. 주인 보고 간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갑니다. 그렇게 생ㄱ어 사램이. 그래서 어치케 헐 것이냐 생각을 혔어. 집으로 가먼 일본에서 돈 벌어서 온 중 알 것이고, 바느질 허고 질쌈 허고 밭일 허고 그런 것을 해야 할 테니, 인자 그것도 싫고. 주인 여자는 자고 가라는디 자기도 싫고 그냥 거그서 죽었이먼 씨겄어. 그런 남편을 믿고, 사람들헌테 말 한마디도 못 허고 그렇게 못 나고 그렇게 깝깝한 사람, 세상 가도 그런 사람. 혹여 살았어도 생전에는 같이 못 살고 인자 나는 내 신세를 어치케 헐꼬.
《그렇게 남편과 헤어진 임영순 할머니는 그 길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바느질로 돈을 번 뒤 북해도 탄광 근처로 갑니다. 조선인들 대부분이 탄광노동자였던 그곳에서 통역도 하고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합니다. 돈도 제법 잘 벌어서 최고급 금바늘 콜롬비아 유성기를 사서 집에 갖다주기도 하고 레코드판도 40장이나 삽니다. 1945년 연합군의 일본 대폭격일에 죽을 고비를 넘긴 항머니는 해방된 지 한달 여만에 다시 부안으로 오게 됩니다. 무남독녀 딸이 열 네 살, 할머니가 서른 세 살 되던 해였습니다.》
아따 재미가 나는 게벼 인자 집에 와서는 농사 짓고 베 짜고 넘의 일 해주고 모도 심으러 댕기고 밭도 매러 댕기고 바느질도 해주고… 내가 모도 잘 숭거요. 시조는 마흔 다섯 살 묵어서부터 배웠어. 서른 세 살에 와갖고 서른 일곱에 딸 여우고 안 하던 일을 많이 했제. 수수모가지 끊어다가 도구통에 찌서 수수밥도 해묵고 감자도 캐다가 울안에 쟁애놓고 시한(겨울)에 동네사람들 놀면 책보고, 밤에 야학도 갈치고… 동네 각시들헌티 시한마다 갈쳤어. 벨일을 다 허고 댕긴께 나중에 면에서 대한부인회 회장허라고 또 왔어. 그거 허면 돈 주제, 쌀 주제. 양식을 한 달에 쌀 한 말썩 주고 월급도 주고. 월급은 저금허고. 우리 어머니는 나 때문에 더러운 옷 안 입고 살고 포도시 칙간(화장실)ㅂ이 못 가던 양반이 여든 다섯에 돌아가셨는디, 고기 사다가 밥해주면 "너는 왜 안 먹냐"고 물어보면 "먹었다"고 허고 어머니만 드리고. 그러다가 여든 다섯에 내 무릎에서 돌아가셨어. 시조를 어치케 배왔느냐. 우리 앞집이 사는 사람(부안의 임기하씨를 말함)이 있는디, 그 양반 딸이 나허고 띠동갭인디, 나랑 제일 좋아하는디, 그집 아부지가 가야금 배우고 글씨 배울라고 목포 유달산 밑에 무슨 회관이 있는디, 거그 가서 가야금 배우고 글씨 공부허고, 인자 피리 장구 다 배와갖고 왔어. 시조 배왔지, 병풍 글씨 배왔지, 3년 배우고 있다가 와서는 부안 월명절에 가서 병풍 글씨도 쓰고 했는디, 그 양반이 우리 윗집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가심서 나가 베를 짜고 있는디, 우리집에 왔어. 베를 짜다가 봉께로 올라오셔. 베틀을 풀어놓고 인사허고 "댁에 어찌 오셌어요?" 긍게로 "아니, 자네가 시조 부른단 말 듣고 내가 왔네." 그려. "내가 뭔 시조를 불러요?" 헝게 "시조 부른다고 소문 났던디? 시조 배우소."그려. 우리 아부지가 써논 주련 글씨를 "한산섬 달 밝은 밤'허고 "동창이 밝았느냐'허고 종우에다 써서 주련에 붙예놓은 놈이 있어. 그 놈을 베짬서 욈서 읽었어. 그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시조 부른다고 했등가벼. 그 양반이 그려. "자네 틈만 나면 와서 시조를 배우소." 그래서 "아니, 여자가 시조 배와도 괜찮은 것이요?" 했더니 "노래 부르면 기생이 되야도 시조를 부르면 아주 귀함 받고 잘 되면 전국적으로 대우를 해준다"고, "그런 데를 왜 안 가냐"고 날더러 "시조 배우소."그려. "재미만 붙이면 올라고 허는 게 병인게 오소!" 그래서 그 베를 얼른 짜서 끊어서 어머니에게다 맡겨놓고 새벽밥 해서 먹고 어머니 드실 상 덮어놓고 새벽에 가는디, 신작로로 가야허는디 지름질로 간다고 강게로 어느 산밑이를 돌아가는디 막 머시 "왁!" 소리를 질러. 여시(여우)였던 모양이라. 그 자리서 주저앉아 부렀어. 땀을 뻘뻘 흘림서 일어나서 들로 해서 동네 속으로 들어가갖고 인자 읍내로 들어강게 아직밥상 받고 있데. 아직밥을 먹고 쉬고는 큰방으로 들어가더만 "자네 들어오소" 그려. 정지문 열고 들어강게 시조책을 이렇게 벌려놓고는 자네 좋아하는 걸, 할 만한 걸 내놓으라고 그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은 게 가사를 다 외거덩? 아따 재미가 나는게벼, 인자.
속에서 그런 재주가 나와 첨에 시조를 부를라면 어데든지 평시조를 첨에 부르고 그 담에 사설을 부르고 그 담에 지름을 부르고 그 담에 남창 부르고…. 그런 식인디, 평시조를 잘 부르면 대우받는다고 그려. 그래서 나는 평시조를 많이 배웠어. '한산섬'허고 '동창이 밝았느냐'하고 '청산리벽계수'허고 세 가지를 배왔는디, 기양 가사는 누가 물어볼 것도 없어. 그냥 배워버린게. 근디 목을 어디는 낮찹게 허고 어디는 높게 허고 목성을 내는 법을 알아야 하는디, 모르제. 어머니 봉양도 해야니까 밥을 한 이틀 묵을 놈을 딱 해서 놓고 어머니 갔다 올라요. 허먼 갔다 오니라. 그렇게 사나흘만에 한번씩 읍내(부풍율회관: 당시 임기하씨가 집을 지어 시조인들이 모였음)를 갔제. 임기하 선생헌티 배왔는디 누구헌티 배울 것도 없이 잘해. 그 전에도 굿거리 장단에 유행가를 잘 혔어. 목이 좋은게로 나한테 시조를 시켰는가봐. 아무 소리라도 나오니까. 숨을 안 쉬고도 얼매든지 (소리를)뺄 수 있는 재주가 나오데. 숨 안 쉬고도 얼마든지 빼라면 한정없이 빼겄어. 그런 재주가 나와, 속에서. 그래서 몇 번 안 배왔는디 그렇게 헌게 "어이 자네. 군수영감 아버지랑 몇몇이서 자네 시조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면 좋겠다고 허는디…집안이라고 나한테 사정을 허네' 그려. 그래서 아직 못 부른다고 헝게 못 불러도 한번 들어보자고 그려. 여자 소리를 안 들어봐서.(100명이 넘는 부풍율회에서 회원중 여자회원은 임영순 할머니가 유일했다) 근디 또 밥 묵으면서 "자네 이만저만해서 시조 한자리 불러볼랑가?" " 하이고 못 부르요. 어치게 부른다요. 못 불러요." "자네 대회 나가라고 허는데 아니라 웃방에서는 듣고 밀창이 있고 사람들이 안 보이게 아랫방에 앉아서 부르는 거라고, 장단은 웃방에서 친다"고 그려. 그 양반이 그렇게까지 허는디 어째야 옳여? 그냥 들어갔어. 들어가는디 그냥 떨리고 문을 요러콤 열어놓고 어른들은 그 방에 앉어 있고, 그 문으로 소리가 들어가게 시조를 불러.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를 부르고 나오는디 막 추워싸. 인자 배운 지 한 달도 못 된 사람이 그렇게 부른게 "자네 큰 시조 되겄네!" 영감들이 그렇게 추워싸. 아 그냥 자꾸 재미가 나. 미쳐가지고는 밭매는 것도 싫고 밥도 싫고… 그냥 시조만 허고싶어. 집에서도 시조를 부르고 싶어서 밥을 일찌감치 해놓고 나무갓으로 가면 거그도 사람이 있고, 저쪽으로 가먼 저쪽에도 사람이 있고 나무갓에 가도 헐 디가 없어. 나중에는 평시조 부르고 사설시조 배우고 여창지름을 배우는디, 여창지름은 소리가 높아야 된만 말이여. 긍께 아무디서나 못 불러. 임기하씨 집에 가서나 부를까. 거그서 배우는디 나 하고자픈 대로 재주가락이 안 나와. 가만가만허먼 안 나와. 크게 목대로 질러야 나오는디. 헐 디가 없어서 장지산이라는 산이 있어. 장지산으로 인자 나무허는디끼 가마니떼기를 어깨에다 메고 십리가 되는 길을 걸어가서 산에를 올라갔어. 봉댕이 질로 높은 봉우리를 올라강게 거그는 사램이 없드만. 저 아래서 사람 소리가 나기는 해도 불러도 허겄어. 거그서 평시조 부르고 사설 부르고 여창지름을 부르는디 거그서는 맘대로 대여섯 자리 넘게 재미지게 부르는디, 아 어떤 놈이 싸드락 싸드락 올라와. 내 뒤에서 와서 헌다는 소리가 왜 당신 넘의 나무갓에 나무허로 댕기요? 그려. "내가 뭐 나무 했소? 가마니떼기만 갖고 왔지, 내가 뭐 나무했냐고." 그랬더니 그냥 웃고 가버려. 가버링께로 인자 마음대로 불르는디 불르다가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어. 집에 와서 밥을 해묵고 어찌 재미가 날 것이여? 나가 못했던 디가 제대로 된게로. 그 사흗날인가, 읍내에 가갖고 평조허고 사설허고 여창지름을 헌게로 임기하씨가 놀래여. 어치게 그렇게 여창이 잘 되냐고. 근디 '울∼고'자리가 안 되야. '울∼고'자리가 있거덩. 그게 안 돼. 안 돼서 그 놈을 어치케 해야될까 싶어. 다 해도 내야(내 소리)만 못헌디, 누구헌티 배워야 헐까 싶어. 거그 배우는 사람들이 다 남자들이여. 백 명이 넘어. 아흔아홉명이 남자고 나 하나가 여자라. 내가 '울고'자리를 기어이 배와갖고 너그들을 이겨묵을란다. 그 사람들이 다 해도 나같이 여창지름을 못헌단 말이여. 근디 임기하씨가 '울고' 자리가 잘 되네 잘 되네 그려. 그 양반도 '울고' 저리는 나만침 못혀. 목은 좋아도. 재주가락을 못혀. 아이고∼ 받기를 잘 헌다! 정읍 읍내를 들어가면 사주보는 사람이 있는디 그 사램이 그렇게 시조를 불기는 불어도 여창지름을 못 헌단디, 내가 간게로 나가 가면 그렇게 반가허네. 못 가게 허고. 사주 보는 사람 들이 없으믄 나한테 여창지름 해보라고 허는디, 아니요. 못 허는 디가 있어요. 했더니 정경태씨(석암)가 그 집에 와서 가끔씩 쉬었다 가. 근디 그 날 정경태 그 양반이 왔어. 저녁밥을 거그서 먹고 나허고 정경태씨허고 사주보는 영감님허고 서이 있는디, 정경태씨가 나보고 "어디까지나 배왔소?" 그려. "여창지름ㅂ이는 몰라요. 여창지름 울고 자리를 좀 갈체 주씨요." 긍게로 피식 웃드만 "외상으로는 못 갈쳐라." 그래. "글믄 어치게 갈치요?" 긍게. 그 사람이 화투를 좋아혀. 그 양반이 그때 쉰한 살이나 묵었을 것이요.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 그 양반이 화투를 잘 쳐서 누구헌티 안 지는디, 화투쳐서 내가 이기면 날 갈쳐주고, 지면 안 갈체주기로 허고 화투를 쳐. 부지런히 화투를 치는디 그렇케 잘치는 양반이 세 판을 지네? 그래갖고 헐 수 없이 갈체야 겄그만, 허고는 처음부터 나보고 불러보라 허드만. 글고 '울고' 자리를 자리가 만들어줘. 글먼 나는 만들어주먼 만들어주는 대로 받어. 정경태씨가 "아이고 받기를 잘헌다!"고 험서 거그서 '울고' 자리 때를 벳ㄱ어. 인자 됐어. 화투 친 값을 했어. 그래놓고는 술도 못 묵거덩. 과자 사놓고 먹고 그날 저녁 자고 그 이튿날 집으로 오는디 또 읍내에 갔어. 다들 재주가락을 자기가 잘 허는 중 알지, 넘이 허는 걸 몰라. 근디 임기하씨가 듣고는 "자네 여창지름 잘 되네, 잘 되야. 거 울고 자리가 어찌 그리 잘 되는가?"허고 물어. 그래서 얘기혔어. 석암(정경태)허고 화투쳐갖고 내가 이겨서 그 양반이 갈쳐줘서 내가 배왔다 헝게, "아따 통도 크네!" 그려. 대 선생님헌티 화투치고 재미봤그만! 허고.
기어이 배와갖고 너그들을 이겨묵을란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허는 게 여창지름이여. 그 양반헌티 배와서. 여창지름 잘허고 남창지름도 잘허고 평시조도 잘허고 엮음지름도 잘 혀. 엮음지름을 제일 낫게 허고! 그리서 일등을 혔어! 군산에서. 시조창 대회가 을부, 갑부, 특부, 명인부, 이렇게 있는디, 명창부에서 된 것이 군산이여. 갑부에서 일등은 나주에서 허고, 여남은 번 대니다가 일등을 혔어. 4등허다 3등허다 2등허다 1등을 허고, 4등허고 3등을 ㅁ 번허다가 1등혔지. 댕기기는 석빠지게 댕개도 1등을 못허다가 나주에서 했어. 허고는 또 특부, 특부를 목포 가서 허는디, 모다들 "부안으로 특부 간다" "부안으로 특부 간다" 그래싸. 잘 불렀거든 그날. 내가 들어도 흠이 없이. 아 근디 나만 못헌 놈에게로 상이 가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어이 헐 것이다 허고 특부 1등허러 야닯번을 댕앴어. 어디든지 대회가 있다 허믄. 특부 통지가 오먼 오는 날부터 가는 날까지 연습을 혀. 저그 강원도에서도 제일 추운 디로도 두 번이나 갔었어. 부산에도 두 번 가고. 마산도 두 번 가고. 진주, 어디 안 간 디가 한 간디도 없이 쫓아댕ㄱ어. 그리서 (경상도) 양산서 특부 1등을 혔어. 사방에서 나를 놀래싸. 몇 살 묵었소? 서방님은 있소? 없소? "아니 여보시오. 넘의 서방이 있으먼 멋허고 없이먼 멋헐라고 그요? 당신은 각시 없소?" 그러믄 저리 가버려. 그렇게 내 속을 앙게 인자 남자들이 안 건들고 나는 계속 대회를 댕겨. 양산에서 특부 1등을 해서 돈 타가지고 인자 집에를 온게로, 인자 명창부 생각이 나. 대구 가서 명창부를 두 번을 떨어졌어. 어느 동네 사는 남자가 시조를 잘헌다고 허는디, 내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꼭 저 여자에게로 1등이 가야 허는디 왜 모르는 남자에게로 가는고?"허고 자기가 부예가 나더라고 혀. 진짜 부예가 나. 인자 군산에서 시조를 허는디 우리 부안 사람이 일곱 명이 갔어. 저물드락 듣고 저닉에 해가 걸린 무렵이라 집에 먼게로 돌아와야 헝게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서 나가. 나는 속으로 "부르고 갈 것을…"하는 마음인디 다들 강께 그냥 따라나오려고 허는디, 맨 끝자리에 앉아있던 남자 하나가 나 치매 끝자락을 붙들고 "시조 부르고 가재?" 그려. 봉게로 생전 안 본 사람이여. 그래서 "이 건방진 사람이… 여자를 어디를 건들고 그려!" 했지. 괘씸혀서. 그런디 계속 "아주머니 부르고 가, 부르고 가쇼" 그래. "나 시조 못 불러요" 나가 잡아 띵게로 "나가 대구서 시조 부르는 것을 보고 두 번 떨어진 것을 보고 잘 아요. 그렁게로 불르고 가시오." 그래. 그날 나온 사람 시조를 다 들어봉게 별 것이 아니거든. 근디 시조 마감이 다 되야부럿어. 마감허고 나만 안 받아주거덩. "사람이 허는 일인디 그거 못허것소. 내가 시켜줄 테니 허시오." 그러더니 부를 사람이 넷이 남었는디 그때 내가 들어가먼 그 사람이 이의를 달 것 같어서 못 헌다고 헝게로 자기가 가서 타협을 혔어. 우리 회장이 할 수 없이 심사위원들헌테 다 말을 해놓고 급헌 일이 있어서 갔다가 인자 왔다고 헝게 다 고개를 끄덕끄덕 혀.
처음부터 소리가 입에 착 앵기네 그래서 다 허고 인자 마지막으로 내가 올라가는디 그 전에는 시조 불르러 올라가면 내 옷깃이 달달달달 떨어. 근디 그날은 앉었어도 안 떨어. 올라갔어. 광대상에 올라가서 딱 앉었는디 가슴도 안 떨리고 안 떨려.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시조를 외운게, 처음부터 입에 차악 앵기네? 젓대허고 소리하고 착 맞아부러. 젓대허고 맞어야 허거덩. 그래서 다섯 자리 불렀어. 평시조허고 사설시조는 안 불러. 여창, 남창, 우조, 엮음… 다섯자리 불러야 혀. 다섯 자리 중에서 엮음을 마지막으로 불르는디, 그날은 엮음이 특별히 잘 되네. 아직 다 안 부르고 쪼끔 남었는디 사람들이 수근수근허고는 신문사 사진기가 내 앞으로 올라고 허고는 여그저그서 어쩌고저쩌고 수근수근혀. 부르고 일어낭게로 와아∼하고 쫓아와서는 나를 보듬고 심사위원 하나가 만세를 부르고 다 좋아허네. 잘 들었다고. 남자들이 잘 불렀어도 내가 낫었응께 상이 내게로 왔지. 거그서 1등을 해갖고 돈 타갖고 그 이튿날 잔치허고. 그때가 일흔 두 살 인가? 오래 되ㅇ어. 명창부 1등 해버리면 딴 대회에 나가서 못 불러. 돈 보고 왔다고 욕 혀. 긍께 가서 굿이나 보고 돈을 걸어야 혀. 3만원이나 5만원이나 걸고 찬조출연을 혀. 심사위원들이 심사허는 동안 소리나 들어보자고. 여든 야닯인가 아홉에 내가 여그(정읍 딸네집)를 왔는디 오기 전 해까지도 소리가 잘 나왔어. 그때까지도 잘 불렀는디 여그 와서 생전 입을 딱 오무려둔게로 인자 소리가 안 나와. 근디 부안 병원에 가서 약 갖다 먹고 진찰도 해보는디 의사가 그려. "임선생님이 목의 핏대가 요놈(왼쪽) 달부고 요놈(오른쪽) 달르게 올라댕기요. 긍게 말소리가 째져갖고 나오든가 두 갈래로 나올 것이요"그래. 근디 말소리가 시방 두 갈래로 나오거든. 째지게 나온게로 안 부르고자퍼 인자. 지금도 한 배, 한 배는 얼매든지 늘여뺄 수 있어. 그건 한 번 배와놓으먼 늙어도 헐 수가 있는디, 째진 소리가 나온게 잘 안 불러. 죽겄어, 째진 소리가 나와서. 여든야닯살 때까지는 째진 소리가 안 나오고 외골수로 소리가 났는디 한 통으로 나왔는디. 양금을 그 전부터 배왔는디 시조창을 부르고 김제, 이리 양금선생님헌티 이리정악원에 풍류로 유명헌 선생헌티 가서 양금을 배왔어. 양금도 다 악보를 세워놓고 보면서 치는디 나는 악보 없이 다 쳤어. 악보도 안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긍게 거그 선생이 벨일이라고. 어치게 생개서 그렇게 허냐고. 하여간 스물 몇 가지가 되는 놈을 그냥 쳐. 악보도 안 놓고. 근디 한번 놓아버린게 영영 안 되네. 영영 안 되야. 인자는 누가 와서 치라고 해도… 춤추는 가락이 있어. 양금도. 그 가락을 제일로 멋있게 친게로 선생이 잘 치는 양금이라고 나보고 그랬어. 시조 잘허지 양금 잘허지 서울서 오라고 불러. 글먼 야닯명이 서울 공연을 가. 풍류치는 사람들허고 같이. 이리 줄풍류가 유명혔어. 우리가 언제가 일등허고 와.
잘 써묵은 사람이 없어 언젠가는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갖고 조선옷 있냐고 물어보더니 나를 조선옷을 입헤놓고 세워놓고 시조 부르고 앉혀놓고 시조를 부르고 양금을 치라 하고 벨 짓 다 허데? 그것이 전국으로 다 방송된다고 그려. 명창 된 다음에. 일흔 몇 살 묵었는디 일흔 몇 살로 안 봐. 한 사십살ㅂ이 안 봐. 한번은 모델도 하라고 허고. 큰 낭자 허고 마이크 잡고 시조 부르는 양. 남원 광한루에서도 기별이 왔어. 갔더니 족두리 쓰고 원삼을 입고 나가서 노래를 부르라고혀. 춘향가. 전주서는 둘이고 정읍서 둘이고 부안서는 나 하나여. 이도령허고 장모님 만나는대목을 좀 혔어. 전부 춘향가만 혀야 혀.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불려갔어. 시조도 아니고 판소리를. 판소리는 안 배웠은게 글 읽데끼 5분간 불러. 그렇게 남원에도 몇 번 불려댕겼어. 그나니나 나겉이 시조 배와갖고 잘 써먹은 사람이 없어. 시조가 그렇게 좋은 것이여. 시조 배운다면 방애도 빨리 찧어주고 밥도 빨리 해주고… 그렇게 재미가 있어. 집에서 부르면 어머이가 듣기 싫다고 헝게, 저 웃방에 가서 방문 닫고 이불 둘러씨고 엎제서 속에서 불러. 불르고 나와야 잠이 와. 그렇게 열심히 혔어. 이게 대우도 받고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고 헝게, 늙어서 죽어도 다른 한은 없어. 그때는 그냥 시조 못 배우먼 어쩔꼬 싶고, 넘보다 잘 불러야 헐 텐디 어쩔까 싶어서 욕심이 생기고 오직 그것뿐이었제. 부안에서도 여자는 나 하나, 정읍에도 김제에도 여자는 한 명도 없어. 여자 시조 명창은 찾기 힘들어. 그걸 내가 했잉게 인자 늙어 죽어도 한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