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학기자 “인사동에 대신필방이 있다면, 전주에는 고려당필방이라고 했지요.” 30년 단골인 서원 김순흥 씨에 따르면 고려당필방은 서예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가게다.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시작했는데, 여기 오면 아주 좋은 냄새가 났었어요. 그래서 더 좋아했지. 여기 와서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으면 사장님이 ‘어, 그 책 어디서 찾았어. 나도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같이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어요. 그 할아버지 참 박식하시고, 좋았었는데.” 고려당필방은 1963년 전주시 전동에서 문을 열어,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중 하나다. 고 오동호 씨가 흑석골에서 한지 공장을 운영하다가 좀더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기위해 문을 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흑석골의 한지공장들이 팔복동으로 옮겨 갈 때 공장은 폐쇄했지만, 이곳은 아직까지 전주를 대표하는 필방으로 남아있다. 그 사이 오동호 씨는 고인이 되고, 현재는 며느리인 문용순 씨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2대째 대물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고려당필방이 서예인들에게 각별한 이유는 오래됐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없는 것 없이 갖춰 놓은 다양한 지필묵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 인사동이 아니면 좀처럼 구하기 힘들었던 서화서적도 이곳에 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인심도 후했다. “지금이야 책이 넘쳐나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화서적이 정말 귀했어요. 그나마 우리나라 판본은 없고 중국이나 일본의 영인 판본뿐이었어요. 당시에 저 한쪽에는 서화관련 고서적을 엄청 쌓아놨었죠. 오동호 할아버지가 인사동가서 다 구해왔던 것들이에요. 그래서 돈만 생기면 이쪽으로 달려왔었죠.” 30년 단골이다 보니 김순흥 씨는 이곳에 대한 많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현재는 서울로 올라간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들까지 아직 이곳을 통해 지필묵을 구입한다. 그 중에서도 문용순 씨의 기억에 각별하게 남아있는 손님이 있다. “언젠가는 웬 어르신한테서 돈 몇 만원하고 그분 작품이 들어있는 편지한통이 왔어요. 임종을 눈앞에 두고 계셔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시다보니까, 20년 전에 갚지 않은 외상값이 자꾸 걸리시더라는 거에요. 당시에 이곳 덕분에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외상값을 꼭 갚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시다구요.” 가끔 시골 어르신들이 전주에 와서 이곳에 들를 땐, 오이며 콩 같은 것도 챙겨다 주신다고 한다. 오랫동안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좀처럼 벌어지기 힘든 풍경들이다. 전부터 그래왔듯이 아직까지 고려당필방은 손님들이 외상을 하더라도 장부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가게가 저에게는 생계수단이긴 하지만, 장사꾼이 되긴 싫어요. 아버님이 했던 그 모습대로 계속 가게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아마 우리 집 손님들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겁니다. 자긍심도 있구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게를 운영하는데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이제는 가게에 직접 찾아와 이것저것 둘러보고 얘기도 나누는 손님보다, 주문 배달이 늘어가고 있다. 갈수록 서예를 하는 어린 학생들이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다. 서예는 대부분 어렸을 적 배웠던 사람들이 평생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래서 문용순 씨는 이 가게가 다음 대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