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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창조적 문법, 살아있는 캐릭터" 7인의 사무라이(1954년)
(2014-02-14 16:31:44)

글 | 신귀백

비정규직 사무라이들        
늦도록 강호를 떠나지 못하고 돈 잡아먹는 귀신소리를 듣던 구로자와 영감님은 1980년, <카게무샤>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거기 한 장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쟁 중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마시는 그림이 나온다. 네덜란드인과의 교류를 일찍 받아들여 소총부대를 편제한 이 다이묘(大名)의 새로운 군사학 개념은 사무라이 시대의 몰락을 알린다.  
그 16세기, 일본 내란 격동기의 깡촌. 토지세, 심한 노동, 전쟁, 가뭄 그리고 추수가 끝나면 찾아오는 잔악한 도적들. 그러나 관리들은 항상 도적떼가 돌아간 뒤에 나타난다. 오늘 팔을 주면 내일 다리를 찾는 약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공공의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촌장을 찾아간다. 이 노인은 ‘멀 마이 미겨야지’ 하는 <웰컴투 동막골>의 촌장 같은 유머는 없지만, 사려 깊다. 촌장의 결단은 자위수단으로서 사무라이들을 고용하기로 하는데, 가난한 구단은 배고픈 프로를 찾는 것이 순리. 아는 거라곤 씨앗밖에 없는 농민들은 소속 없는(로닌 浪人) 싸고 강한 사무라이 모집에 영화의 절반을 할애한다.

도롱이를 입은 바싹 마른 농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용할 수 있게 된 사회적 동기는 새로운 무기의 출현. 검의 고수를 한방에 보내버리는 화포는 많은 사무라이를 실업자 내지는 비정규직으로 몰아넣는다. 윗머리를 깎아 마치 마빡이 가발을 쓴 모습의 백수 사무라이(투구를 쓰기 쉽게 하기 위한 전통이라고 한다)들은 영주 아닌 우키요에에 등장하는 서민들 보다 더 누추한 농민들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아들인다.

작달막한 키의 감베이(勘兵衛, 다까시 시무라)는 전쟁은 많이 했지만 주로 패배만 한 낮은 승률의 삼미 수퍼스타즈. 다까시가 스님으로 변장하고서 어린 인질을 구출할 때, 도둑을 베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오두막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구로사와 영감님은 카메라가 가지는 전지적 시점을 아예 접어버림으로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 정작 보고 싶은 장면을 생략하는 여유를 부리는 것. 하나 더, 용감한 사무라이 규조가 뒷모습만 보인 후 총을 빼앗아 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카메라가 서술자로서의 역할 포기라기보다는 그의 활약을 상상할 여지가 더 많아지는 것을 노리는 노대가의 작전뻑. 반면, 선한 양아치 사무라이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적진에서 총을 노획하는 장면은 너무도 친절해서 노감독이 관객을 데리고 노는 듯하다.    

멤버는 구성되었다. 사방과 전후 그리고 중심을 커버하는데 필요한 숫자는 7인. 농민의 딸과 사랑을 나누는 애송이와 농민 출신 사무라이도 있지만 협잡꾼이나 배신자는 없다. 명예에 관한 일이라면 보수가 문제가 아니라는 일관성을 갖춘 이 관용적 존재들에게 복지나 보험은 없지만 그들은 김나는 밥을 두고 맹세한다. 일본어를 모르지만, 아마도 각기 다른 지방 사투리로 말했을 이들 7인의 외인부대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뒤로하고 농민의 성채에 이른다.


전설의 진흙탕 싸움      
스폰서들은 이기적인 법. 민속춤을 연상케 하는 추수동작과 도리깨질이 끝난 후에도 도적이 오지 않자 농민들은 사무라이를 먹인 것에 아까워한다. 이런 짠돌이 농민을 훈련시키고 전술을 실천하는 감베이는 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장면을 만드는 힘이 있지만 시종 웃음으로 일관한다. 그는 전술에 이롭지 못한 외곽집을 소개(疏開)하고 해자를 파면서 은폐와 엄폐를 위한 지형지물을 이용 40명의 산적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전쟁 중에도 청년의 사랑은 있는 법. 목재와 질그릇을 비추던 따뜻함을 만드는 조명은 애송이 사무라이와 시골처녀와의 금지된 장난이 펼쳐지는 오두막집 장면에서 최고를 이룬다. 남장처녀의 수줍고 어색한 유혹을 나타내는 물결치는 듯한 추상무늬를 형성하는 빛이 만든 대 그림자 장면(<동사서독>에서 왕가위가 후일 써먹은)은 아름답다.

부감샷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동그란 야외 세트에 소낙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산적들의 기동성을 묶어 농민군의 빗장수비에 기여하는 진흙탕을 뒹구는 집단적인 전투 장면은 로우 앵글. 낮은 곳에서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동작에 속도감을 부여하고 폭력적 혼란감을 잘 포착한다. 노장은 세 대의 카메라를 배치해 얻어낸 이 이전투구 장면을 잘게 찢어 롱숏의 컷과 동선을 따라 도는 컷을 붙여 만든 몽타주로 역동적 고양감을 선사하는데, 정말 고수의 솜씨다. 바퀴살의 전면과 비 뿌리는 마당의 중면, 배경으로서의 작은 집들을 후면을 배치하는 3차원의 심사숙고한 심도, 거기다 장면마다 다른 영화적 음향들은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210분의 러닝타임 속에 자리 잡은 구도와 조명이 제대로 된 프레임, 플롯과 세트디자인 그리고 배우의 동선과 편집 그리고 음향까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폭우 속 이 일본적 전투신은 상품적 시각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지배하는 할리우드 스펙터클과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마을엔 평화와 봄이 찾아온다. 모를 심으며 노동요를 부르는 농민들을 보며 살아남은 사무라이는 화투장 비광의 선비처럼 잘 차려입고서, “승리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야. 백성들은 땅과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갈 것이다. 우린 또 졌다. 승리자는 저 농부들이야” 라는 마지막 대사를 던진다. 문제 해결의 중심은 분명 사무라이이면서 엔딩의 해석을 통해 그 주인공이 농민이라니. 아부다. 80년대의 정치상황에서 보았다면 감격할 만한 멘트일 것이나 노대가의 플롯에서 빼고 싶은 사족. 극도의 통찰력을 가진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 감베이가 농민과 농민 문화에 대한 칭찬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글쎄, 전쟁 후 급속한 미국문화 수입에 따른 문화적 의식화라든가 상무정신의 고취였다면 태평양 전쟁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것이고 전쟁에 진 피폐한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사무라이의 추억’이라면 센티멘탈리즘일 것.


좋은 이야기, 좋은 인물          
저 을미년 왕후를 시해하던 낭인들의 극단적 악행을 잊을 수 없지만 <7인의 사무라이>는 분명 목판화나 하이쿠 같은 문화유산이다. 문법과 양식이라는 그릇을 만들어낸 데다 거기 들어갈 음식으로 캐릭터를 창조했으니 말이다. 감베이가 그렇고 기쿠치요(羅生門 라쇼몽의 도적)가 바로 그들. 구로사와가 창조한 페르소나를 소화한 <이키루(生きる. 꼭 보시라!)>에서도 지혜 있는 올드보이로 나온 다까시는 스코시즈를 비롯한 서구인들에게 일본인은 성숙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 존재로 읽혀지고 있는 것. 아무래도 스코시즈는 일본적 소재에 반한데다 영화 문법이 서구적 취향이어서 끌렸을 테니. 사무라이를 치명적이고 능률적인 전쟁기계로 만들기도 하고 이타적이고 명예에 따른 희생을 감수하는 아이콘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영화다. 하여, 나는 새로운 영화문법을 창조하기는 그런 것이어서 우리의 캐릭터를 생각하고자 한다.  

잠깐, TV 드라마. 고구려의 재조명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거창한 사극의 주인공들 성대 결절 생길라. 하나같이 목에 힘준 배우들의 하거라 체의 쉰 목소리뿐이어서 여유 있는 인물이 없다는 말씀. 특히나 봄부터 겨울까지 자기파괴에 몰두하는 주몽네 형아가 더욱 그렇다. 캐릭터의 감정선이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저 황진이는 의상으로, 연개소문은 스케일 같은 전시성에 몰두하니 인물은 깊이를 잃는다. 그러니 단선형 인물들이 보여주는 의사소통의 일방성 뒤에는 야사만 남고 역사는 가물가물해지는 것.
그래도 <왕의남자>나 <음란서생>이 나았다. 쉰 목소리가 드물지 않던가. 헌데 100억 넘게 바른 <중천>의 무국적이종잡탕이라니, 혹시 외국에서 수입할까 겁난다. 배경이 통일신라말이고 한국 사람이 주연을 했지만 과연 거기에 어떤 한국인의 정서적 내면화가 있을까 싶다. 죽어 중천에 가는 것 정도라면 세상 너무 쉽게 보는 거다. 그렇다. 감독 아닌 영화기술자가 만들면 이렇게 된다. 돈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조건이 아니고 관객 숫자가 좋은 영화를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
요즘 확실히 한국영화가 힘이 부치는 느낌이어서 시나리오 작법을 읽다가 밑줄쳐둔 부분을 영화 만드는 이들에게 들려주며 글을 마친다. ‘좋은 캐릭터와 좋은 캐릭터가 맞붙어야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족: 거장과 경쟁하려는 마음에 힘이 부침을 고백한다. 구로사와는 멕베스를 번안한 <거미집의 성>을 찍으면서 아예 세익스피어와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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