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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 | [이흥재의 마을이야기]
‘해안 범부와 함께 살아온 이 사람들’
(2014-02-14 16:30:45)

글 | 이흥재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입암마을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내소사 설선당 다(茶)포에 새겨진 해안선사의 ‘멋진 사람’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나즈막한 돌담길과 고샅들이 ‘민박’집 간판으로 치장을 한 입암마을은, 원래 30여 호였으나 이제 25가구 쯤 된다. 입구 상가에 장사하기 위해 들어온 한집을 빼면, 동네 전체가 내소사 신도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월 초파일에는 내소사와 입암마을 전체가 애드벌룬도 띄우고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마을에 사는 72살의 김기수 할아버지는 진서면장 10년을 포함 35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가끔씩 주례를 맡아주기도 하는 면장님은 5남매를 다 출가시키고, 두 내외가 내소사 입구에서 여름이면 ‘심심풀이’로 민박을 하며 살고 있다. 이 김기수 할아버지가 1956년 군 복무시절, 해안스님에게서 받은 편지 한 구절을 단박에 외우셨다. “연상홍, 자산홍, 왜철쭉, 진달래 그리고 삼대같이 울밀한 전나무 사이로 쌍쌍이 청춘남녀가 거니는 계절에, 나만이 겨울이구나.” 라고.
이 마을은 해안스님과의 인연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마음은, 해안스님의 넷째 딸 도솔암 일지스님처럼 푸근하고 편안하다.
내소사 입구 전나무 숲 끝나는 곳 왼편에 부도 밭이 있다. 그 부도밭에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던 탄허스님이 쓴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가 있다. 해안스님이 열반하시기 전날 혜산스님 등 제자들이 “비를 세우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직접 ‘범부 해안’이 아니고 “해안 범부”라고 하라고 유언을 하셨다 한다. 그러면서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 - 여기에서 살고 죽었는데, 여기에는 삶도 죽음도 없다.) 라고 했다고 한다. 큰대(大)자를 붙여 대종사나 대선사 등 큰스님으로 불리우기를 원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 아닌가 그런데 한평생을 마감하며, 스스로를 범부(凡夫)라 칭했던 해안스님의 향기가 전나무에 배어나는 듯 하다.
내소사 선원장이신 철산스님은 “해안스님은 평소에는 너무 온화하고 자비스러우시다가 제자들 공부시간이 되면, 사자가 사냥을 하듯 공부하는 학인들보다 더 열의를 가지고 이끌었다”고 회상을 하셨다.
내소사는 능가산 자락에 있다. 능가산은 불경 능가경에서 따왔다. 선(禪)불교에서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해서 경전에 의한 가르침을 배제하지만 능가경만은 예외로 한다. 능가는 너무 험하고 힘들어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지를 이른다고 한다. 이런 능가산 자락에서, 해안스님은 숨이 끊어질 듯한 정진 끝에 결코 뚫리지 않은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날아서 넘듯 능가산을 넘어선 것이다.
6.25 사변 당시 해안 스님의 일화이다. 인근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는데, 스님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아서 매일 감나무 접을 붙이고 계셨다. 그것을 본 동네 한 노인이 「스님은 피난은 안가고 뭐하시오?」
「감나무 접을 붙이고 있소」
「사람이 죽고 사는 상황에 감나무 접은 붙여서 뭐 하시려오? 그러다 죽으면 어쩔라고 그러시오?」
「감나무야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겠소? 우리가 못 따먹게 되면, 다른 사람이 따 먹을 것이고 다른 사람도 못 따먹으면, 까치라도 따 먹을 것 아니오?」
이 말에 그 노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입암마을에서 진서가는 쪽에 환의재가 있다. 커다란 소나무 당산 아래 서낭당이 있다. 환의(換衣)재는 옷을 갈아입는 고개라는 뜻이다. 우리 불교의 맥을 보면 신라 때 원효스님 -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 - 조선의 서산대사 휴정이 잇는다. 그 유명한 서산대사 청허 휴정의 스승이 부용영관스님이고 부용영관의 스승이 벽송지엄스님이다. 이 벽송 스님이 내소사와 청연암의 중간 쯤 되는 곳에 벽송암이란 암자를 짓고 수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외아들의 출가를 안타깝게 생각한 어머니는 벽송스님과 약속을 했다. 비록 어머니지만 절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이 고개에서 만나, 어머니가 만든 옷을 이 고개에서 서로 전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헌 옷과 새 옷을 바꾸어 입던 이 고개마루를 환의재(換衣峙)라 부르는데, 입암 마을사람들은 옛날에 이 고개를 넘어 진서국민학교를 다녔다 한다.

나를 놓아라/ 나를 비워 버려라/
나만 없으면/ 무엇이 괴로우랴/
무엇이 즐거우랴/ 무엇이 미웁고/ 무엇이 고우랴/ ‥‥
나만 버리면 편안하리라/ 나만 비우면 허공이 되리라/‥‥
오고가도 걸림이 없으리라/
해안스님의 「나를 놓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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