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5일부터 21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전북민미협의 '부안가는 길' 전시가 열렸습니다. '길'이라는 테마를 통해 부안의 역사와 현실을 되짚어보는 자리였습니다. 부안이 고향인 김형미 시인이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그는 현재 부안읍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고있습니다. 그에게 부안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김형미 | 시인 금방 새떼가 날아오를 것만 같다. 계화도의 겨울 들녘은 그러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정지해 있는 듯하지만 움직임이 느껴진다. 꽁꽁 언 땅속에서도 살아 있는 것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에서 오는 안온함마저 깃들여온다. 하여 나는 마음이 눅눅해지거나 삶이 고단하다 여겨질 때마다 이곳을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계화의 평야만큼이나 너른 갯벌을 지나 바다를 끼고 가다 보면 격포가 나오고, 노을이 아름다운 궁항이 나온다. 개양할미가 바다를 돌본다는 수성당과 적벽강을 거쳐 살기에 어머니의 자궁 속만큼이나 따스하다는 모항을 돌아 곰소에 이르러서야 속까지 들큼해지는 갈치 속젓갈에 밥 한 술 뜨고 싶어진다. 부른 속을 달래기 위해 내변산의 계곡과 바위가 어우러진 절경을 타고 지장암 비구니 스님이 내어주시는 솔바람차 한 잔 마시고 나면, 어느덧 가슴 속 시름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야말로 솔바람 소리와 솔향만 가득히 우러나오는 것이다. 좀더 시간을 가지고 문화적인 안목까지 겸비한다면 풍요를 기원하는 ‘짐대할머니’나 구암리 지석묘, 저녁 무렵만큼 고즈넉해질 정도로 단아한 개암사의 무색 단청, 몸을 던져 깨달음을 얻었다는 진표율사의 흔적인 불사의방, 신석정과 이매창의 시구절에 이르기까지 고루 음미해볼 만하다. 볼 것만 보고 들을 것만 듣고 오자면 이보다 더한 절경을 어디 어느 곳에서 흔쾌히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그야말로 산과 들과 바다, 강과 계곡을 하루 한나절 동안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으니 예로부터 풍류를 즐기기에는 물론 먹고 살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생거부안’이라는 말이 무색함 없이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부안에서 나서 살다보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살아지지 않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음이리라. 7년여 동안 고향인 부안을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2003년 7월이었다. 한창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시위가 열을 올리던 삼복더위였다. 곳곳에 전경들이 열을 맞춰 방패와 곤봉을 들고 길을 막고 있었으며 주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나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길을 깔고 앉아 핵폐기물의 잔해로 오염될 위기에 처해 있는 고향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등교 거부까지 해가며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도 밤이면 촛불을 밝히고 앉은 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때의 정경을 외부 사람들은 흔히들 80년대 계엄령이 내려졌던 광주와 비유했는데 과연 그 말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여겨졌다. 자주성 있게 움직인 주민들과 시위대의 승리로 인해 핵폐기장 유치는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그 때의 ‘부안사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쩌면 이 다음 대에 이를 때까지도 계속될지 모른다.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이며 무대책, 무조건적인 행동을 보인 군 정부. 군수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한번 무너진 둑은 이미 둑이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버린 주민들 간의 골은 잠시 유보 상태에 있을 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그 때의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유치를 찬성했던 이들과 반대했던 이들 간의 격하게 벌어진 간격을 좁히고자 지속적으로 애써야할 것이다. 그것만이 순박한 주민들을 기만했던 행동에 대한 사과가 되지 않을까. 이렇듯 핵폐기장 문제에서부터 지금 내 고향 부안은 숨 쉴 틈도 없이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진 듯하다. 새만금 공사 끝막이 공사로 인해 일어나는 환경의 변화, 한미 FTA 저지로 인한 냉랭한 기운까지 겹쳐 그렇지 않아도 바닷바람이 센 부안이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겨울이다. 계화도의 바다는 끝막이 공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육지보다 해수면이 높아져 있었다. 해일의 위험에 그만큼 근접해졌음이리라. 또 새만금 공사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진행되었던 계화도 간척사업으로 이미 전설 속에 묻힌 조개가 있다. 바로 ‘농합’이다. 동진강과 만경강이 계화도 앞뒤를 돌아나가 가력도 쪽으로 빠지며 만들어진 하구갯벌인 계화도 갯벌에서만 잡혔다고 하는 큰 어른조개 농합은 60년대까지 잡혔다고 한다. 농합에 이어 2006년 4월 21일에 막힌 새만금 물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조개들이 전설 속으로 사라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바다와 함께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이들은 더욱 아프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농합처럼 하구갯벌에서 살기를 좋아하여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새만금에 생존해 있던 백합도 힘든 고비를 견디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죽합, 동죽, 우즐기, 펄돌맛조개, 가무락조개, 계화도조개, 종밋조개, 띠조개 등도 부안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출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변산해수욕장의 물의 일부가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도 있고, 여기저기서 조개무덤이 발견되기도 한다. 조개는 한 마리당 2시간 동안 1.5리터의 물을 정화시켜준다. 그런 조개무덤의 발생은 곧 바다의 죽음이자 갯벌의 죽음인 동시에 바다를 생태계의 보고라 믿고 있는 우리 모두의 죽음이다. 설상가상으로 연이어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람들의 정서마저도 무척이나 메마르게 하고 있다. 이제 마음 한 자락 뉘일 곳 찾아 내 고향 어디를 가도 그저 아프다. 이 길 저 길이 다 한이고 설움이다. 그나마 그 한과 설움을 같이 하고자 애써주는 사람들이 있어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귀족적이며 신비적인 닫힌 미술문화의 껍데기를 내던지고 사회현실에 참여하여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는 ‘전북민미협.’ 지용출 선생님 외에 여러 미술인들이 부안의 가슴앓이를 함께 하기 위해 ‘부안 가는 길’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질곡 많은 부안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많이도 우그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요즈음 ‘부안 가는 길’ 또한 저렇듯 사납게 우그러져 있는 건 아닐까. 전시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버스 차창 너머로 흔들리며 넘어가는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멀리 충북 옥천에 살았다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란 시가 떠올라 독감에 걸린 입안이 더욱 쓰디쓰게 밭아오던 것이다.
김형미/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도에 <전북일보>와 <진주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2003년에는 <문학사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3년부터 고향인 부안에서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