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길을 나서다
박남준 시인이 '길 위의 추억'을 연재합니다.
'길'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길러준 곳입니다. 이제 시인이 길에서 만났던 것들을 하나씩 풀어놓습니다.
1984년 「시인」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적막」등의 시집과 함께 산문집 「쓸쓸한 날의 여행」을 펴냈습니다.
2007년에는 시인이 걸었던 길을 한번쯤 따라 걸어보는 계획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남준 시인
소원처럼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언제 갈 수 있을까 그랬었는데 잘 아는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친목계에서 해외여행을 가는데 여행비는 걱정하지 말고 어디 좋은 곳 추천해줄 만한 곳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준비해 두었다는 듯 잠시 뜸도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무지개처럼, 연기처럼 이내 사라질 것 같았다. 무엇에라도 쫓기는 것처럼 허겁지겁 소리를 쳤다. 아-앙- 앙코르와트요.
공항에서 두툼한 겨울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불과 대여섯 시간을 비행기로 날아왔는데 한 여름이라니 시간마저도 그렇다. 떠나온 영종도 국제공항의 시간보다 2시간이 빠르니 이를 보고 시공을 초월했다 하여도 별 틀릴 것은 없겠다.
방콕공항에 내려 버스를 탔다. 고가도로를 타고 국경도시 아란으로 가는 길 소니와 미쓰비시와 도요타와 노키아와 모토롤라와 맥도널드와 번쩍거리는 수많은 광고탑들 속에 삼성휴대폰 광고탑이 돼먹지 않은 애국심처럼 언 듯 스치고 지나갔다.
국경근처 작은 호텔에서의 첫 저녁식사, 한국사람들은 참 유별난 것인가. 김치를 꺼내고 고추장이며 김을 꺼내느라 부산하고 요란하다. 곁에 있던 한 친구가 눈살을 찌푸리며 외국사람들이 쳐다본다고 일행들에 주의를 준다.
에어컨을 키고 잔 첫날밤이 지나고 비가 부슬거린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거기 국경에는 그 흔한 총 한 자루 보이지 않는다
녹슨 철조망 한 토막 쳐있지 않았다
난민처럼 밀려오는 캄보디아 사람들
국경의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날품을 팔러 하루의 막일자리를 얻기 위해
생필품을 구하러 구걸을 하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꼬막 만한 누이의 등에 업혀서
어느 잔인한 지뢰지대를 건넜을까
자전거를 개조해 페달을 손으로 돌리며 가는
두 발목이 잘린 사람들
흑백사진 같은 그들의 휑한 눈앞에 결코
배부른 디지털의 사진기 들이댈 수 없었다
우리의 50년대가 저랬을 것이다
60년대가 70년대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재하며 있듯이
여기 또 머나 먼 이국의 땅 국경의 거리
나와 나의 부끄러운 조국을 되새기게 한다
조국의 국경은 끝내 완강할 것인가
저렇게 건너가고 건너올 수 없는 것인가
남쪽 머나먼 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 보다 먼 내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
비를 맞으며 국경을 통과했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도시라는 앙코르와트 씨앰립으로 가는 길은 가도가도 끝없는 붉은 황토 길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발가락이 또 하나 떨어졌다는 시인 한하운이 절며 절며 걸어갔을 남도의 황토 길을 생각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암울한 독재의 시대 김지하가 노래했던 황토 길을 떠올렸다.
택시를 타고 때로 자욱한 붉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비포장을 달리다가 앞을 분간할 수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를 만났는데 윈도브러시가 한쪽밖에 없다. 오오 세상에 그나마 한쪽도 차창을 닦는 부분은 달려있지 않고 막대기만 달랑 왔다갔다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중간 휴게실에서 잠시 차를 세운 운전사는 헝겊조각을 그나마 작동하며 매달려있는 한쪽 막대기에 감고서 계측기가 고장 난 것인지 어쩐지 몰라도 시속 120킬로미터 붕붕붕 덜커덩덜커덩 겁도 없이 잘도 달려 나갔다.
비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햇살이 쨍쨍거렸다. 휴게실에서 열기로 인해 미지근하게 달아올랐지만 코코넛 열매의 달착지근한 물로 간밤의 숙취와 갈증을 달랬다.
차가 간이 주유소에 서면 휘발유가 든 통을 들고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받침대를 놓고 비닐 호스를 들고 주유밸브를 열고 그렇게 급유를 하고는 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이었다.
하나 둘 앙코르와트 유적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반데스레이 타프롬 사원에 이르렀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나무들 멸화나무, 돌처럼 단단하고 무거워 물에도 가라앉는다는 흑단나무, 곳곳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돌무더기들, 거기 그 사원의 뜨락에도 참새들이 내려앉아 짹짹거렸다.
참새들의 말에 귀기울여본다. 내가 떠나온 고향마을 참새들의 말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참새들의 말에 대해, 짹짹거리며 들려오는 다르지 않고 똑같은 참새들의 말에 대해, 무너져 내린 사원의 슬픈 울음소리에 대해, 햇살처럼 퍼져가는 웃음소리에 대해,
비밀의 사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거대한 사원의 돌 틈 위에 처음 어린 싹을 틔웠을 나무들의 뿌리들이 사원과 한 몸이 되어 진기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걸어 다니는 나무라고도 부르는 반얀 나무, 누가 저 한 몸을 떼어놓으랴. 얽히고설킨 저 한 몸의 황홀경을 누가 낮 뜨겁다 고개 돌리겠는가.
거기 사원을 이룬 돌과 어디로부터 와서 싹을 틔운 나무의 씨앗과 사원을 쌓아올린 이들이 뚝뚝 흘려 떨어트렸을 소금기 많은 지치고 고된 땀방울들과 낮게 엎드려 모아 올리던 기도의 간절함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한 몸이 되어 오늘에 만난 전생의, 누생 다생의 소멸되지 않은 업에 대해 생각한다. 저 질기고 질긴 인연에 대해 몸서리친다.
어두운 사원의 방에 들어가 가슴을 쾅쾅 친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저 높이 허공중에 빛살의 하늘이 보인다. 소용돌이처럼 내 가슴을 맴돌던 소리가 웅웅 거리며 사원의 종소리처럼 울려나간다. 나 언제 내 안의 고요한 종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