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저널]
고추장볶이의 청렬한 맛
최승범(2004-01-28 11:36:49)
고추장볶이의 청렬한 맛
최승범
가정집이나 음식점의 상차림을 대하면 밑반찬에 먼저 눈길이 간다. 횟집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한 버릇인 셈이다.
밑반찬이란 주로 젓갈이나 자반?장아찌 따위를 말한다. 전문적인 가게에서 파는 밑반찬에서도 맛을 챙길 수는 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주부나 음식점의 안주인이 손수 요량하였다가 내어 쓰는 밑반찬에서 독특한 맛깔을 느꼈을 때, 그 밑반찬에 대한 매력은 한결 더 돋기 마련이다.
어쩌다가 그러한 밑반찬을 대하게 되면 그 집안의 주부가 존경스럽고, 음식점의 안주인이 아름답게 여겨지기도 한다. 상차림에 손끝의 편한 것만을 쫓지 않는 주모(籌謀)와 정성(精誠)이 어려들기 때문이다.
최근 남원의 한 음식점 ‘지산장’(남원시 죽항동 80, 전화 625-2294)에서 맛본, 고추장볶이도 그러한 밑반찬의 하나였다. 남원길은 일본에서 온 미나미 구니카쓰(南邦和)시인과 전북대 신환철 교수와의 3인 행이었다. <춘향전>의 배경을 보고싶다는 미나미 시인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한루원>을 돌아보고, ‘지산장’에서 점심시간을 가졌다.
몇 차례 들린 적이 있는 음식점이다. 안주인 염순종여사는 39년 간을 손수 다루어온 상차림이라고 했다. ‘전통 한정식’과 ‘숯불고기 정식’이 이 집의 자랑이다. 이날 우리는 불고기를 택하기로 했다.
언젠가 한정식을 택했을 때, 난생처음 ‘대합(大蛤)젓’을 맛보며, 반짝이는 즐거움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대합젓’이 이번 상위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의 종발에 담겨있는 ‘고추장볶이’가 눈길을 이끈다. - 필시 고추장볶이렸다. 저분 끝으로 한 자밤 떼어 내어 맛을 보니 과연 고추장볶이다. 집에서도 음식점에서도 근래에 맛볼 수 없었던 고추장볶이다.
볶은 고추장인데도, 그 빛깔에 검은 기가 없다. 잠 담긴 고추장 그대로의 연홍빛이다. 혀끝에 와 닿는 맛 또한 감미(甘味)요 감향(甘香)이다. 일찍이 최영년(崔永年)이 『해동죽지』(海東竹枝, 1925)에서 노래한 ‘고추장’이 떠올랐다.
‘고추장은 세계에 없거니, 오직 조선의 일미렸다. 가장 좋기로는 순창 고추장, 조선땅 어느 곳에도 다시없다네’ (蜀椒爲醬世界無 獨稱朝鮮一種味 最是淳昌一種産 朝鮮全土復有未).
이 집의 ‘고추장볶이’는 고추부터가 순창고추장에 쓰는 고추였던가, 안주인에게 물으니, 순창?임실의 태양초(太陽椒)만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고추장볶이에 쓰는 쇠고기도 곱게 다진 안심살을 양념하여 잘 익을 때까지 볶은 후, 고추장에 황설탕을 넣어 되직하게 끓여내는 조리 과정이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마늘 저민 것과 잣가루를 섞어 넣기도 한다는 것이다. ‘서울 토박이’셨던 시어머니로부터 내림 받은 조리법이라는 덧붙임이다.
미니미 시인에게 맛을 붙자, “눈으로 보기엔 매울 것 같았으나 맵지 않을뿐더러, 달금하고 향기롭기까지 하다. 잘깃하면서도 청렬감(淸列感)이 돋는다”는 극찬이었다.
숯불 석쇠에 구워내어 먹는 불고기의 뒷맛도 고추장볶이로 입안을 돌리면 한결 개운해지고, 고추장볶이의 향미가 도는 입안에 불고기를 앙구면 불고기의 맛 또한 한결 더 돋았다.
이 맛을 사자하니, 2Kg 한 단지에 5만원의 값이라 한다. 뒷날의 입맛을 위하여 알아두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