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1 | [문화저널]
정철성의 책꽂이
...(2004-01-28 11:35:41)
<정철성의 책꽂이> 꽃나무 시 세 편 겨울이 깊어간다. 창틀 앞 화분에 만냥금은 붉게 익었는데, 나는 심사가 편치 못하여 이리저리 서성인다. 그러다가 꽃이 그리워 시를 읽었다. 1. 살구나무 발전소 / 안도현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관찰은 사물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누군가 옆에서 이름을 불러준다. 그러나 사물의 이름은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첫 단계에 불과하다. 사물을 나의 몸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름이 지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꽃그늘에 들어가 벌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는 날은 일년에 이틀 남짓이다. 이 이삼일이 귀한 것을 알면 한 해가 길다. 안도현의 체험은 살구꽃 송이송이를 알전구로 보고 멀리 발전소를 생각하는데서 눈을 뜬다. 처음 살구꽃의 밝기를 알아차리는 것이 밤인가? 그 후 낮에도 꽃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그렇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고, 낮에도 별은 빛나고 있다. 봄이 오면 나는 잎보다 먼저 꽃을 피워내는 나무들과 아픔을 함께 하리라. 2. 자비/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이 시는 평이하면서 진지하다. 복효근의 좋은 시들이 항상 그렇듯이 이 시에도 사물의 깊이에 대한 이해와 감탄이 바닥에 깔려 있다. 아시는 대로 배롱나무는 백일홍의 다른 이름으로, 풀이 아니라 나무이고, 그래서 목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미(紫薇)라는 한자 이름도 있다. 요즘은 길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꽃도 좋지만 나는 이 나무의 가지며 줄기가 해를 거듭하면서 깨끗하게 벗겨지는 것이 부럽다. 물가에 배롱꽃 그림자 드리운 명옥헌은 그냥 그림이다.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병산서원도 꽃 피면 치장이 화사하기 그지없다. 백양사 뒤뜰의 배롱나무도 가지를 펼친 풍채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시인이 본 배롱나무도 절집에 뿌리를 내렸다. 배롱나무 가지 하나가 명부전 처마를 향하여 벋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신심은 착한 나무가 저승을 밝히! 려고 꽃불을 켜 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무는, 착하도다, 물속의 잉어까지 보살피려 든다. 나는 “명부전 쪽”을 ‘서쪽’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부전이 버티고 서 있다 보니 큰 등, 저승, 잉어, 수련이 오갈 데 없이 불교의 기호로 읽힌다. 그래서 배롱나무와 수련의 간담상조가 곧바로 석가와 가섭의 이심전심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를 살리고 있는 것은 이런 장치들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뱃속” 한 단어가 이 시의 뇌관이다. 저승은 아마도 물고기 뱃속처럼 어둡고, 구불구불하고, 비린내가 나는 모양이다. 떨어지는 꽃잎이 잉어밥이 되어 그 시커먼 속을 환히 비추려 한다고 본 데서 시인의 상상력이 빛난다. 연잎에 떨어진 꽃잎은 어찌하느냐고? 둥근 수련 잎이 잉어의 밥그릇이 되었는데 무엇을 걱정하랴. 그러면 이제 걱정은 그만해도 될까? 애초에 배롱나무 가지가 처마 끝에 걸린 것을 나무가 햇빛을 욕심내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뻗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합리적인 사람은 한 걸음도 잉어의 뱃속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시의 뱃속도 그렇다. 3. 꽃나무/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주면 꽃 피고 다시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서 최근 도종환 시인은 꽃과 나무에 애정을 가지고 관찰한 기록들을 보여준다. 아니, 관찰이라기 보다는 체험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관찰은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체험은 그것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려는 주체의 행위이다. 관찰의 결과는 누가 보아도 동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유물이지만 체험은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개인적인 사건이다. 아마도 시는 체험을 공유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일지 모른다. 도종환 시인이 눈길을 준 꽃과 나무가 참 많기도 하다. 복숭아나무, 가죽나무, 목백일홍, 민들레, 동백, 진달래, 칡, 다래, 소나무, 참나무, 박달나무, 모과나무 등등. 이 시가 전하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과나무를 예로 들어 보면, 꽃이나 열매가 달려있지 않을 때 그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여전히 사과나무이다. 사과가 달려 있지 않을 때에도, 작은 열매가 잎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에도, 잎이 지고 빈 가지로 서 있을 때에도 그 나무는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는 언제나 사과나무이다. “만으로(도)”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온다. 이 시는 그렇게 간절하다. 꽃나무를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마지막에 한 마디 충격적인 선언을 곁들인다. 모든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꽃을 피우지 않아도 나무는 나무이다. 나무는 나무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과연 그렇다. 엄살과 허세를 버리고 나면 담담, 담백할 수 있단다. 담담은 마음을 무엇에 묶어두지 않고 예사롭게 대하는 태도이고, 담백은 마음이 깨끗하여 욕심이 적은 상태이다. 둘 다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몸안을 둘러보아 마음이 어디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