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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 [문화칼럼]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
이경한/ 전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2004-01-28 11:28:56)
<문화칼럼>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 글 이경한 전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에 근무하면서, 나는 다양한 이유로 초등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자주 갖는다. 특히 학생들의 교육실습 기간 중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실습학교를 방문하게 되는데, 지난달에도 전주의 모 초등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이 초등학교는 학교 정문에서부터 어릴 적 내가 다녔던 성냥갑 모양의 초등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틀에 박힌 모습에서 벗어나 세련미가 넘치고 아동들을 고려한 설계가 학교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이번에 이 초등학교를 방문한 목적은 교육실습 중인 대표 교생의 공개 수업을 참관하고 그 수업에 대한 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이 공개 수업은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으며, 수업 과목은 '슬기로운 생활'이었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서 공개 수업을 행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실의 뒤편에는 다른 교생들과 교사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낯선 자의 방문을 다정한 인사와 환호로 맞이해 주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서 교생의 공개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생이 잔뜩 긴장하고 있음은 그의 떨리는 음성과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는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 수업을 하는 것은 자신의 속내를 몽땅 드러내는 일이라서 모든 수업 교사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일이다. 다소 긴장감 속에서 출발한 대표 수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요즈음의 교실 속 환경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와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적은 학생 수와 자유스러운 수업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그 교생의 수업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손을 들고 교사의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과 학생들의 모둠별 활동을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 수업 활동 중에 학생들은 거침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수업을 이끌던 교생은 손을 든 일부 학생들을 지명하여 칠판 앞으로 나오도록 해서 수업 활동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순간, 창가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교생에게 손을 번쩍 들더니, "선생님, 남녀 차별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 수업 관찰자들의 시선은 창가로 향하였고, 수업을 한 교생은 수업 중의 돌발적 상황으로 인하여 몹시 당황하였다. 그 교생이 그 학생에게 이유를 물으니, 지명 받은 학생이 "남자 셋, 여자 하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교생은 그 학생의 지적을 수긍하고서 다음 번에는 똑같이 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다시 질문과 답변이 오가면서 수업이 활기를 띠면서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교생은 다시 학생들을 지목하여 발표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복도 쪽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선생님, 그 학생은 세번 째예요. 손을 들지 않은 영수를 시켜주세요."라고 말을 하였다. 교생은 "그래, 영수가 한 번도 하지 않았네, 선생님이 깜박했어요. 영수가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응하였다. 아마도 그 교생은 두 번의 돌발적 상황으로 진땀을 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교생에게 진땀을 빼게 한 두 학생의 발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일상인 수업 생활 속에서의 적지 않은 차별을 발견할 줄 알았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익숙하게 행하던 현상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선생님께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마음 속으로만 알고 넘어가도 될 일, 아니 교실 수업 공간에서 일어난 작은 모순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었다. 이는 제도화된, 기성화된 그리고 화석화된 우리 일상의 익숙함이 갖는 작은 모순에 돌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말이 수업을 관찰하는 내내 나의 귓전에 부메랑이 되어 맴돌았다. 그것은 나에게 교실 밖의 삶 속에서 차별을 가한 적은 없는가를 돌이켜보게 하였다. 나의 편견과 사고의 짧음으로 인해서, 그리고 한줌밖에 되지 않은 나의 기득권의 편린으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 그리고 아웃사이더, 즉 여성,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자연, 학생 등에 대해서 차별을 가하고 살지는 않았나 반문해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경쟁에 익숙해 있지만 또 다른 친구를 배려할 줄 알았다. 많은 아이들이 "저요, 저요"라고 아우성대면서 자신들을 드러내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는 그 와중에서 또 다른 약자인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가 그 교실 공간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보기 좋았다. 그가 보여준 친구에 대한 배려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더불어 사는 삶의 원초적 원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나에게 나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 인해서 내 주변에 실재하는 소외에 애써 눈을 감고 살지는 않았는지 자문하게 했다. 그리고 타자와의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화로 인해서 우리 아이들이 원초적으로 지닌 수평적인 삶에 대한 원형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교실 속의 두 아이는 우리가 왜 차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를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기존 제도의 관행과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숱하게 가하는 차별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왜 중요한 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갈 지표를 배웠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았다. 그 아이들은 현학적인 언어로 치장하여 우리 사회의 차별과 모순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소박한, 그러나 뼈있는 외마디는 여전히 차별이 넘치는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복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복음이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시대에는 더 이상 복음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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