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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 [서평]
실제 같은 ‘매트릭스’, 가상 같은 ‘현실’
이은우/ 한남대학교 교수(2004-01-28 11:22:32)
실제 같은 ‘매트릭스’, 가상 같은 ‘현실’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이정우 외, 이룸, 2003) 글┃이은우 한남대학교 교수 한 권의 텍스트가 주어졌다.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철학적 분석서 『매트릭스로 철학읽기』이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라는 이미지 언어를 한 권의 텍스트로 삼아 그에 대한 독해를 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간다. 사실 되돌아보면 이미지야말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기록 텍스트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기록되어 있는 들소의 그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이자 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가장 클래식한 이미지언어도 수난의 박해사를 가지고 있다. 문자의 발생과 더불어 나타난 문자 중심적 사고는 이미지언어에 대해 테러를 가했다. 이미지를 가벼운 것으로 또는 비 학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질 낮은 버전으로 대해왔다. 초등학교시절 만화방은 어른들에 의해 통제되는 장소였으며 영화관은 불온한 학생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읽히고 분석되고 있다. 문자 중심에서 영상중심으로 매체의 권력이 이동하자 이젠 영상을 문자로 논하게 된 것이다.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는 학문이라는 무기를 가진 고수들의 경연장이다. 서양철학, 동양철학, 과학철학, 미학, 논리학 등등의 분야가 퓨전 형태로 등장한다. 그만큼 ‘매트릭스’라는 텍스트가 전하는 메시지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를 읽다보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고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 참이라면 아는 것, 이해하는 것만 가지고 소화해내는 방법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영화의 그 수많은 장치들과 상징들에 대한 분석보다는 전체를 단순화하여 한번에 ‘통’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복잡한 영화를 단칼에 논하는 어리석음이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다고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얼마 전 본 영화 <올드보이>의 싸움장면에 나오는 대사 ‘상상’을 나 나름대로 무기로 사용하면서 ‘매트릭스’ 텍스트를 현실의 세계에 접목하는 오기를 부려본다. 영화 <매트릭스>는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 등 기존의 공상과학 영화와 다르다. 기존의 영화들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기계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매트릭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이 정말 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질문의 내용이 좀더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매트릭스 제작팀의 의도는 사이버공간을 통해 현실을 생각해보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매트릭스와 유사한 세계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제기는 현대사회에서 ‘장자’의 꿈인지 현실인지(호접이몽)의 담론과 ‘쟝보드리야르’의 리얼리티와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념과 인터액션 한다. ‘매트릭스’는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중심으로 이 공간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결구도를 갖고 있으나,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공간에 대한 의문이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이 구현되는 가상공간 즉 사이버공간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 공간만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상현실과 실재현실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가상공간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이버공간인 매트릭스 안에서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매트릭스 안의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독립적이고 자기 결정적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는 현실이 되고 현실은 압축되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이 작동한다. 영화라는 텍스트는 인간의 현실과 상상의 반영이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와 상호 작용한다. 매트릭스와 다른 현실의 세계로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고 또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삶에 대한 목표도 있고 갖고 싶은 욕망의 대상들도 있다. 매일 아침 나는 정해진 시간에 일하러 나가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다. 아파트의 집 문을 열기 전 습관적으로 거울을 바라본다. 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느 날을 만족하고 어느 날을 불만족스러워한다. 마당이 딸린 집도 갖고 싶고, 매력적인 차도 한 대 갖고 싶다. 아파트 벽지의 색을 바꾸어야 할 것 같고, 소파도 좀더 멋진 것으로 교체하여야 할 것 같다. 다이어트나 운동으로 몸도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다분히 나의 독립적인 생각이고 나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어디서 온 것들일까? 그리고 타인들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를까? 혹 다르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기본은 비슷비슷한 것일까?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갖고 싶은 것 열 가지를 대라면, 거의 순서도 비슷하게 갖고 싶은 것이 동일하다는데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와 우리들의 희망과 욕망을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혹 컨트롤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성적 주체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라깡은 “나는 생각한다”는 인정한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왜, 생각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것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매트릭스공간을 리얼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현대인은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사고의 집단성과 획일성은 사이버 공간이나, 실제라 생각하는 현실사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산업화사회가 되면서 근대적 시간관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시간의 표준화는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규격화하고 표준화 하여간다. 시간을 절약한 페스트푸드점 맥도날드 매장 앞에서는 줄을 지어 음식을 받아드는 사람들의 행동들은 모두 시스템화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현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생각은 집단적 환상과 동일하다. 외양으론 다양성이 강조되나 내용을 알고 보면 변종 재생산된 제품과 유사하다. 욕망도 희망도 모두 엇비슷하다. 매트릭스 공간에서의 복제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리얼한 현실에서 무엇이 현대인들의 사고와 행동을 프로그램화하고 있을까? 무엇이 우리들의 생각을 집단화하여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상상적 대답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라이프스타일, 행복, 욕망 등등을 획일적으로 무차별 살포한다. 유행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삶을 구성할 것인지 끊임없이 설교하고 전달한다. 물질에 대한 추구를 구원의 메시지로 전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감시하고 설교하고 ,우리는 ‘다운로드’ 받는다. 텔레비전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하이퍼 리얼리티를 전달한다. 이제 텔레비전에 의해 하이퍼리얼리티가 리얼리티로 전달되고 그것이 리얼리티를 만들어 낸다. 현실의 삶에서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없어져 간다. 이은우┃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한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남대학교 언론홍보학과 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전북대에도 출강중이다. 저서로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기호학』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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