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서평]
음식에는 철학과 삶이 있다
김두경/ 서예가(2004-01-28 11:21:30)
<서평>
음식에는 철학과 삶이 있다
『내 인생의 밥상』(원재훈, 바다출판사, 2003)
글 김두경 서예가
옛날에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닭이나 개 등 짐승을 기를 때 그것을 길러 돈을 벌거나 오직 잡아먹기 위해 대량 사육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나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조금씩 길렀다. 때문에 많이 길러 많이 먹지도 않았고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서로 뭔가를 주고받으며 공존하다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몇 마리를 희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생각에 당시의 사람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만약 고기가 목표였다면 우리는 좀 더 일찍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양과 달리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추구하지 않았다고 해야하는 더 옳을 것이다. 옛날에 우리가 이렇게 짐승을 기르던 때에는 기르던 짐승에게 주는 먹이조차도 사료라 부르지 않았다. 닭 모이, 개밥, 소죽이라 불러 사람이 먹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사료이다. 내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사료라는 말은 왠지 오직 짐승을 우리와 같이 우주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공존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인간에게 필요한 고기로 길러내기 위한 재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닭 모이, 개밥, 소죽에는 뭔가 사람과 차별이 별로 없는 정이 느껴진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해서 아무 정 없이 사료를 먹여 오직 사람에게 필요한 고기를 얻기 위해 짐승을 기르고 그렇게 기른 짐승을 아무생각 없이 사람의 몸을 위하여 먹는다면 그 고기도 어쩌면 사료일 뿐이라 생각한다.
시골에 들어가 살면서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상추와 쑥갓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채소를 심었다. 살다보니 우리가 심는 채소 뿐 아니라 산과 들에 나는 많은 풀과 나무들이 그냥 그대로 채소가 되고 반찬이 되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옛날에 우리는 푸성귀조차도 자연에서 그대로 얻었고 꼭 필요한 몇 가지만을 가꿨을 뿐 먹고 쓰고 남고 버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농업경영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생산하고 과잉 생산된 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 이렇게 식물이건 동물이건 우리가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며 자라는 요즈음 아이들은 모든 것이 필요의 대상일 뿐이라는 일방적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 시골에 들어가 살 때 내 아이들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의 씨앗을 구해 그 조그만 씨앗을 보여주고 같이 심었다. 아이들은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날마다 밭에 나가 자기들이 뿌린 씨앗이 싹이 났는지 살폈다. 풀과 함께 새싹이 올라와 자라는 것을 보며 무엇이 무엇인지도 알게되고 날마다 자라나는 생명에 아이들은 날마다 감동했다. 채소들과 뭔가 통하여 말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도 자연에서 자란 모든 것이 서로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렇게 밥상에 오른 것들은 음식이지만 자연의 정과 사랑 그리고 감동을 함께 먹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장에서 무심히 사다가 그것들과 아무 교감 없이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은 그것이 비록 채소라 해도 그것은 사료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사료를 먹고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이런 말은 하면 웬 궤변이냐는 투로 흘려 넘겨버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다.
원재훈의 '내 인생의 밥상'이 이런 내 답답함을 풀어 주었다. 그의 글은 글을 쓰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삶의 진솔한 이야기로 자기의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더 실감나고 깊이가 느껴졌다. 단순히 자기의 경험과 느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나오는 사상적 토대가 괄목할 만한 것이어서 더욱 고맙다. 음식에 대한 기본 철학과 우리 음식에 대한 사상적 이해도 고맙다.
사람들이 자연과 자꾸 멀어지는 것은 어쩌면 음식을 가공하면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고유의 음식들은 덜 가공된 상태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사람과 자연의 삶 사이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았다. 사람이 자연이었고 자연이 사람이었다. 그러나 곡물은 더욱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화학비료(처음에 화학비료는 금비라고 해서 수확을 늘리는 마약처럼 인기가 있었다.)가 생산되고 그 피해로 인해 맹독성의 농약이 논과 밭을 물들이면서부터 그리고 건물들이 점점 높아지고 흙 대신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부드러운 대지를 뒤덮고 나서는 음식마저도 그 부드러움을 잃어버렸다. 문명의 발달과 음식의 퇴행은 정비례하면서 인간의 건강과 심성을 파괴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사람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면 ......(그 아픈 봄날의 꽃전 중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전주를 말할 때 문화 예술의 고장과 아울러 음식의 고장이라 한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은 전주 음식의 맛과 푸짐한 인심에 반하고 놀란다. 하지만 나는 늘 불만이다. 손님이 와도 막상 모시고 갈 곳이 없다. 전주에 살고, 남들이 다 좋고 맛있다는 전주음식을 먹으면서, 전주에조차도 음식이 없다고 말하다니 무슨 말인가?
지금도 전주는 다른 도시에 비하면 정도 있고 흥도 있고 멋도 있는 곳이 많다고는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깊이와 감동은 물론 품격을 볼 수가 없으며 음식의 철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순히 전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일반적으로 경향이지만 세상이 아무리 그래도 전주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전주에도 음식이 없다고 말했다. 음식도 훌륭한 문화상품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음식이 진정한 문화상품이 되려면 우리 음식이 어떤 사상적 배경과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아가려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때문에 음식의 형색은 있을지언정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는 음식은 다른 것들과 차별성을 갖기가 어렵다. 형색과 맛의 차이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내 인생의 밥상'이 깊이가 완벽하다거나 모두는 아니지만 이런 것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음식의 화려함은 인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다양함과 기괴함은 중국에 못 미친다. 하지만 꽃전은 그 아름다움을 넘어선 정감이 있다." ( 그 아픈 봄날의 꽃전 중에서 )
" 엘비스의 비만과 성철스님의 고행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순수한 정신의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 ( 성철스님과 엘비스프레슬리 중에서 )
"다시 찾아간 할머니의 모습은 예전과 또 달랐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민들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키 작은 산 속의 야생화가 그렇게 피는 있는 민들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키 작은 산 속의 야생화가 그렇게 피는 이유를 할머니를 보고서야 나는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것, 사람 역시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그 할머니가 온 몸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 (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맛 중에서 )
요즈음 사람들은 음식을 더 이상 삶의 본질로 보지 않는다. 방편이고 누림이며 도락일 뿐이다. 원재훈의 '내 인생의 밥상'은 이런 관념을 가진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소리쳐 깨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잠결에 들려오는 엄마 아빠의 다정한 대화처럼 우리를 정답게 깨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더욱 가슴 깊이 다가와 우리 앞에 거울이 된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재미를 위해서 양념을 치고 있다. 그 양념이 지금은 아주 적절한 것이지만 혹여 사람들의 호응에 좀 더 많은 양념을 쓸까 두렵다. 끝까지 가지로 가서 꽃 피우려하지 말고 본 대를 지켜주기 바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것이 가장 절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