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한상봉의 시골살이]
눈 오는 날
한상봉/ 농부(2004-01-28 11:13:04)
<한상봉의 시골살이>
눈 오는 날
얼마전까지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영화 제목이 실감나도록 무주 광대정 골짜기에는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았고, 푸근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서울에선 어느 수녀님에게서 "거기도 눈이 왔나요?"하는 안부전화가 왔고, 즐겨듣는 FM 라디오 방송에선 첫눈에 관한 이야기가 난무한 가운데, 광대정엔 싸락눈만 질금 뿌리고, 볕이 들자 이내 눈 녹은 물조차 증발해 버렸다. 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눈'에 대해선 무심할 수 없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 구질하게 비 오는 게 싫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눈 싫다는 사람은 -직업상 장애가 되는 사람은 빼고-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광대정에 눈이 소복히 쌓였다.
푸른 댓잎에도 흰 눈발이 앉고, 마늘밭에도 장작더미 위에도 눈발이 날렸다. 흰 빛 아래서 다른 색은 모두 거무튀튀한 채로 남고, 오로지 눈만이 홀로 하얗다. 문득 괴테가 검정과 하양을 근원적인 두 빛깔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검정과 하양은 우주 안에 깃든 존재의 대극(對極)을 상징한다. 검정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새벽빛 같은 파랑이 생기고, 빛 자체에 가까운 하양이 막 물질화되기 시작하면 노랑이 생겨나는데, 파랑과 노랑이 통합된 색채가 초록이고, 그것은 빛과 어둠이라는 대극을 통합시키는 생명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런 괴테의 상념을 따라가다 보면, 겨울이 있고, 그 계절에 눈이 내리는 것은 우주의 근원, 내 삶의 근원에 대해서 분명히 성찰하고, 내년 봄에 초록빛 생명을 풍요롭게 안아가라고 하는 하늘의 전갈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 해의 막바지에 생각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밀려나 있었을까?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났는가를 가름하기란 어렵고, 우린 다만 우리의 욕심이 닿아 있는 곳, 우리의 부질없는 욕망의 부산물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생활에 불필요한 물건 하나가 내 집에 자리잡고 앉아 있는 걸 봐도, 내 삶의 헛나간 부위를 알아볼 수 있겠다. 어찌 되었든지 겨울은 우리에게 '판단정지' 또는 유보의 미덕을 베푼다. 농부들은 이제 바쁠 게 없고, 추위를 동무 삼아 내면의 알곡을 거두어들일 차례다.
예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동무 하나는 내년 봄에 스님이 되려고 절집에 들어갈 예정이란다. 그리고 암 때문에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둘째형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고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여전히 낯선 게 삶이라면, 우린 억지로라도 어느 한구석에 몸 기댈 환상 하나쯤 마련해 두어야 한다. 어떤 믿는 구석이 있어야, 닥쳐오는 삶의 미묘한 자리에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자가 되기를 갈망했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이 지금도 의미를 갖는다면, 우린 이 말을 조금 바꾸어 읽을 필요도 있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의 때를 기억하고,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내 몸의 체온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계절은 겨울이라는 점을. 어려서 바람 씽씽 부는 겨울날에 구슬치기를 할라치면 손등이 터지고 얼어붙기 십상이었는데, 그 때마다 바지춤에 두 손을 집어넣어 온기를 나누던 기억을 되살리면, 내 몸이 살아있음을 절감하는 것도 겨울일 것이다. <감옥으로부터 온 사색>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서한집에서처럼, 타인의 온기가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는 것도 겨울이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기다려지는 계절이 겨울이라면, 겨울은 참 고마운 동반자다. 그래서 눈발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얼굴이 환해지고 아이들은 저희들의 왕국을 건설한다./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