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교사일기]
녀석이 돌아왔다!
김덕윤/ 서울 광진중학교 교사(2004-01-28 11:07:40)
<교사일기>
녀석이 돌아왔다!
글 김덕윤 서울 광진중학교
'쿵!'
저쪽에서 소리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다. 복도 저쪽 교실 앞에서 녀석의 큰 키가 보인다. 멀리서 한 번에 보아도 씩씩거리고 있는 표정이 분명하고, 한 손을 들고 위협하는 그 괴기스러운 쳐키의 모션까지 취하고 있으니 난 거기까지 움직여야 한다. 그리곤 "김기범!"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제서야 민첩한 자세로 녀석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은 몸을 돌린다. 그러면 이 녀석, 마지막으로 교실에 대고 분한 독설을 한마디 던지고는 교실 문에 한 번 더 '쾅!'하고 발길질을 한다. 천천히 걸어오며 무언가 내게 이야기를 한다. 녀석과의 조우는 흔히 이렇게 연출된다.
ADHD,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 이것이 녀석의 행동을 그나마 이해시켜 주는 한마디 설명이다. 다행이다. 설명이 되어서... 또 다행이다. 녀석이 돌아와서... 하지만 그뿐이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녀석과의 관계를 비극으로 종결짓는다. 그것이 녀석의 방어기제를 유도하고 즉각 난폭함으로 표출하게 한다. 또 다른 이들은 녀석의 등장을 사고의 출현으로 감지하고 멀리서부터 긴장한다. 그러나 이 녀석은 의연하다.
두 달여 전
'선생님, 기범이가 없어졌어요' 하고 녀석의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또요? 몇시쯤에 나갔습니까?'
'한 열 한시쯤이요'
'그럼 밥도 안 먹었겠네요?'
귀의 이상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던 녀석이 오전에 사라졌다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다. 언제든 틈이 생기면 뛰쳐나가는 것, 이것이 기범이의 주특기이다. 그 전날에도 어머니가 화장실을 간 사이 그랬다가 잠 잘 시간 즈음에 돌아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가을, 낙엽은 우수수 쌓여 공원의 바닥은 그 낭만을 통째로 담아 놓은 듯 하지만 녀석에게 그것이 안중에 들 일은 만무하다. 밤, 녀석을 찾아 병원 옆의 공원을 헤매어 보았다. 물론 여기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리 기범이 덕에 흠뻑 취한 이 가을도 만져 보는구나'
녀석의 어머님과 경찰차를 탔다. 정말 미안했다. 실종신고를 하면서 정말 미안했다. 내가 녀석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 이렇게 없다니... 185cm 큰 키의 깡마른 남자 아이, 좀 두꺼운 그러면서도 비딱하게 안경을 썼으며... 그리곤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오른쪽 귀에 수술을 해서 거즈를 붙이고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가 전부였다. 생김새를 더 설명해야 하는데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만 덧붙였다. 연락처나 보호자나 하는 것들이 어머님보다는 내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난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매서운 가을 바람에 다시 경찰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다.
'경찰차를 타는 사람은 경찰과 죄인일텐데, 나 경찰이 아니구나'
새벽이 되어 돌아온 녀석의 온몸은 냉기가 겹겹이다. 여름 반팔티 하나만을 걸치고 나간 녀석은 들어오면서부터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씩씩거리며 신경질을 낸다. 그러면서 내가 어제 사다놓은 호떡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한다. 그래도 내게 인사는 한다. 다행이다. 내 말은 잘 들어서... 또 다행이다. 녀석이 돌아와서... 하지만 그뿐이다. 노심초사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래도 녀석은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녀석에게 더 미안해진다.
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녀석을 잠깐 재활기관에 위탁을 했었다. 일반 아이들과의 긍정적인 의사소통이 형성되지 않는 접촉으로 인해 학교에서의 위협적 행동들이 더 강해졌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한창 독이 오른 상태에서 한두 달 떨어져 있으면 잊겠지 해서였다. 그러나 실수였다. 오히려 거기에 또 하나의 상처를 더한 셈이었다. 그렇게 녀석의 독소는 거칠어 있었다.
녀석이 돌아왔다. 교실은 술렁인다. 아니 그보다는 잠깐 적막하다.
꼼지락, 꼼지락, 교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허름한 종이쪼가리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쿠폰을 모으는 모양이다.
[천원메뉴 Free 쿠폰] 맥도날드 쿠폰이다.
[코카콜라 무료증정] 도미노 피자다.
승용차는 2000원, 짚이나 벤은 3000원 하는 [세차권]도 있다.
'선생님 드릴라고 가져왔어요' 한다.
녀석 기특하다. 몇 달만에 돌아온 녀석은 두 가지 취미도 함께 데려왔다. 잘도 오려서 가지고 온 쿠폰수집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마이클 잭슨이다. 표딱지처럼 생긴 건 무조건 다 주워온다. 고속버스 표에서부터 공중전화 카드, 옷에 달려 있는 상표 표찰에 이르기까지... 녀석의 집 상자 하나에는 이러한 쿠폰들이 가득히 쌓였다. 언제부터 어떻게 모아왔을까? 질린다. 또 마이클 잭슨의 춤이 멋지단다. 문워커(moon walker)라고 알려준다. 인터넷에서 마이클 잭슨의 음악도 들려준다. '4EVER MJ', 어디서 났는지 디스켓에 사이트도 담아가지고 다닌다. 이제는 이름도 '기범잭슨'이라고 쓰는 녀석이 허망한 너털웃음만 나오게 한다.
녀석의 능청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 또 다른 녀석과 한창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버릇을 좀 고쳐야겠기에 좀 엄히 혼냈다. 자기도 노력한다며 잘하고 싶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신세 한탄을 하던 녀석이다.
'그만 울어'
'나도 다 그런 때가 있었어'
'김덕윤 선생님이 틀린 말 했냐? 왜 울어?'
기범이다. 녀석이 이렇게 거드는 것이다. 생각하면 잘 하는 것 하나 없는 녀석이 왠일로 말썽도 안부리고 가만히 앉아 의젓한 척을 한다. 매일같이 속만 썩히다가도 어느 날 문득
'선생님, 지난 번에는 제가 죄송했어요'
하고 뜬금없이 착한 아이 흉내를 내는 때가 있다. 정말 뜬금없다. 녀석의 매일같은 말썽에 길들여져 버리는 나의 나태를 책망하는 것일까? 그럴때마다 당황스런 나는 '아니 이 놈이 이제 정신을 차렸나?' 하는 감격의 맛에 억지 속아줌으로 지친 나를 충전한다. 한 번씩 보이는 이런 녀석의 착한 아이 흉내는 나를 중독시킨다. 그것이 흉내가 아니라 녀석이 숨기고 있던 진짜 모습을 잠깐씩 들키는 것이라는 기대를 믿으면서 말이다.
오늘도 도망갔다. 어딘가를 헤매다 쿠폰상자를 더 채웠을 녀석, 그렇게 빙글빙글 돌다가도 또 다시 내게 돌아올 녀석이 다행이다. 잠깐 잠깐씩 들키는 흉내가 아닌 기범이의 진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녀석과의 끈을 더욱 질기게 엮게 한다. 그리하여 난 깨고 싶지 않은 최면을 건다.
'다행이다. 내게 돌아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