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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 [문화저널]
'밝은널(明島)'의 밤
김규남/ 언어문화연구소장(2004-01-28 11:06:32)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 사투리> '밝은널(明島)'의 밤 군산항에서 뱃길로 두 시간 남짓 선유도, 관리도를 돌아 방축도와 말도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섬, '밝은널'. 지도상으로나 행정명칭으로야 명도라고 해야 알 일이지만 이 섬의 본래 이름은 '밝은널'이다. 이름이 주는 경쾌함과는 달리 이 섬은 유달리 사람이 적고 조용하다. 나는 지난 2000년 여름, 방언과 지명 조사를 위해 그 섬에 갔었다. 내가 배에서 내렸을 때 나를 맞아 준 것은 해안경비대 소속의 군인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조사 경위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에는 너덧 가호밖에 없으며 그 중 두 집 식구들은 며칠 전에 군산에 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두 집 식구밖에 없을 것이라는 황당한 정보와 함께 던지던 그의 허망한 웃음에 나는 말도를 향해 이미 뱃머리를 돌린 배를 붙들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정오 다시 여객선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다소 절망적인 나의 '밝은널' 탐험이 시작되었다. 삼십 분 남짓 해안경비초소에서 마을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잠자리가 없을 테니 잠은 그곳에 와서 자도 좋다는 경비병의 호의에 안도하며 나는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이라고 해야 봄, 여름 멸치잡이 때 건조장으로 쓰려고 만든 임시 건축물의 양철지붕들 너머로 대숲 사이에 낀 기와지붕이 두엇 그리고 아마도 새만금 간척 사업 보상금으로 지었음직한 양옥집 하나가 전부였다. 마침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집 주인이 있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팔십 노모가 평생 자신과 함께 이곳에 살았었는데, 몇 달 전에 처음 군산에 나갔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자신은 지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비통해하는 그에게 나는 조사는커녕 그의 슬픔을 위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많이 잡아서 세로 1킬로미터, 가로 2킬로미터나 됨 직한 그 조그마한 섬에서 평생을 살았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평생 여기서만 살았다는 그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그 분이 처음 육지에 발을 디뎠을 때 그리고 그 분이 수많은 문명의 기호들과 조우하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질주하는 자동차들 사이로 길을 건너려고 머뭇거리고 당황해하셨을 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리며 나는 한참을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담아 놓는 지명들은 그 할머니와 닮은 '밝은널'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공간일망정 구석구석을 다니며 성장하고 생활하며 살아온 자취이다. 즉, 방언은 인간이 그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과 이루어낸 교감의 결과이며, 전래 지명 또한 그 범주의 일부이다. 땅에 붙여진 이름들 역시 그 지역의 역사이며 삶의 자취들인 셈이다. 이곳에는 '앞면', '쌩끔', '허찌빠골' 세 동네가 있다. '앞면'은 배에서 내려 이 섬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첫 동네이다. '앞면'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있는 산이 '임씨네묏골'이다. 군산과 가까우면서 세를 과시했던 신시도의 임 씨네가 이곳을 오래 전부터 차지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임씨네묏골'에는 골짜기가 하나 있다. 그 이름은 '집채너무'. '집채너무'를 넘어가면 '오지녁'이란 해안이다. 이곳이 해안이면서도 '장불'이란 지명소가 붙지 않은 까닭은 '장불'처럼 넓지 않고 움쑥하거나 돌출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이면 이곳에 오리가 많이 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아는데, 기실 이곳이 집채 같은 바위를 넘어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된 곳인데다 그곳에 갈려야 오직 이 길 밖에 없으니 '외지', 섬 바깥쪽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으레, 사람 손길 닿기 어려운 곳에 좋은 해산물들이 많았을 것을 감안하면 방언형 '오지다'와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임씨네묏골' 맞은편 '밝은널'의 주봉은 '당제뽕데기'이다. 이곳에서 '당이 시던 당시' 당제를 올리곤 했던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제뽕데기' 산자락과 '앞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고 내려서면 '쌩끔'이다. 이곳 역시 박 씨 내외와 그 형님 댁 그리고 안 씨네 두 가호가 전부인데 놀랍게도 폐교된 '명도분교'가 실하던 마을의 옛 영화를 숨기고 있다. '쌩끔'이라는 지명은 '새안금', 마을과 마을 혹은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인 것을 방축도 꼬부랑꼬부랑 할머니가 '벨 걸 다 묻는다며' 귀뜸해 주어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쌩끔'에는 '큰어리장불'과 '쌩끼밋장불'이 있어서 배 대고 고기 건조하기가 웬만하다.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봉우리로 막혀 아늑하고 어지간한 '장불'까지 두 곳이나 끼고 있으니 이곳이 '밝은널'의 중심 마을인 셈이다. 70년대 서해안 간첩 출몰 사건으로 알려진 '십이동파도 사건' 이후로 '쌩끔'에는 그 뒷동네 '허찌빠꼴' 사람들이 집단 이주하여 큰 마을을 형성했었다. '허찌빠골'은 이 섬의 끝 마을이었다. 왜정시대 세부측량당시 관리도 박씨들이 '앞면'과 '쌩끔'을 차지하는 바람에 본래 이곳에 살던 안씨들이 쫓겨 들어가 살던 마을이다. 전혀 그 어원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험하게 생긴 이름만큼이나 이곳은 바람도 많다. 이곳에서 '뒷장불'로 나가는 골짜기가 '망진꼬랑', '이밑이'로 가는 골짜기가 '청둥골목'이다. '망진꼬랑'을 지나 '밝은널'의 서남부 끝자락은 생긴 모양에서 비롯되었을 수밖에 없는 '주벅턱끄터리'이다. 이곳과 '끝섬(末島)' 사이에 '뾰롱섬'이 있는데, 가끔 개구지고 '보짱' 좋은 섬 사내들이 '주벅턱끄터리'와 '뾰롱섬'과 '끝섬' 사이로 난 바닷길을 걸어서 건너다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떠나고 싶을 때 자동차를 타고 바람처럼 아무데나 헤집고 다니던 나로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밀려드는 파돗소리에 자꾸만 육지에서 멀어져 가는 꿈에 가위눌리고 기어이 잠 못 든 채, 시꺼멓게 가로놓인 바다의 거대함에 오갈 들어 섬에서 나가고 싶은 간절함조차 불경스러울까 주눅 들어버렸던 '밝은널'에서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새해 벽두, 온통 장터로 변해 뒤틀리고 어수선한 세상을 벗어나, 바다의 엄정함에 묶였어도 손바닥 같은 땅덩어리일망정 그마다 삶을 새겨 넣으며 살아온 바닷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보라. 단순한 삶의 엄숙함과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고 돌아올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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