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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꼰대식 코미디 감상법, <러브 액츄얼리>!
신귀백(2004-01-28 10:59:51)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꼰대식 코미디 감상법, <러브 액츄얼리>! "다음 번엔 나 같은 여자 만나지 마, 행복해야 돼" 하는 가사를 듣고는, 정말 이런 감정의 모멘트까지도 팔아야 하나는 생각을 했다. 이건 악화(惡貨)는 아니지만 감정의 적확성이라는 틈새 상품치고는 좀 지독하지 않은가. "할 줄 알아"는 말하지 말자. 이소라의 애절한 노랫말이 뭘 말하는 지, 또 박진영 말대로 물론 할 줄도 안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한국 코미디 영화들에 비하면 이 정도 상업성 노랫말들은 양반이다. <색즉시공>이나 <가문의 영광>을 보라. 관객을 데리고 놀면서 돈을 울궈 가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수출돼 <노팅힐> 같은 동네서 상영된다면, 하는 생각을 하면 등에 땀이 난다. <러브 액츄얼리>! 포스터부터가 크리스마스용 종합선물세트임을 암시하는 영화. 그러나 종합이라는 말이 '양질의 반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려 20여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 얽히는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산만하지 않고 따뜻하다. 이들의 다양한 사랑의 표정에서 맛있는 선물 몇 개만 이야기하자면 그 하나. 휴 그랜트, 초점에서 살짝 벗어난 눈동자에다 주름이 짜글짜글한 것이 이젠 그도 올드보이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막 입성한 노총각 총리는 허벅지 굵은 비서 나탈리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둘은 '젠장'과 '염병' '맙소사' 등의 언어를 막 내부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수상 못해먹겠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정치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각 탓이다."라고 대놓고 말한다. 달이 아닌 손가락도 아닌 그 팔목에 감긴 시계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좀 보았으면 했다. 둘. 총리의 여동생 캐런 역을 한 에마 톰슨은 힐러리를 연상시킨다. 남편의 부정을 눈치 챈 그녀는 시름에 빠진다. 성공한 오너인 남편 해리가 아내와의 쇼핑 중 짬을 내어 동료이자 부하인 젊은 애인의 목걸이를 사는데, 이때 <자니 잉글리쉬>의 미스터 빈이 종업원으로 등장해 시간을 끌면서 손님의 속을 태우는 장면은 코미디 아닌 포복절도의 리얼리즘이다. 글쎄, 그 안타까운 시간들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 모멘트는 팔아도 좋다고 느끼지 않을까. 셋. 동생과 바람을 피운 아내를 떠나 마르세유에 온 작가 제이미는 사랑에 절망하다가 파출부 오렐리아에게서 묘한 매력을 발견한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와의 만남을 위해 학원에 나가 포르투칼어를 배워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그녀의 동네로 찾아가 청혼을 한다. 소설가의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따뜻하기만 한데, 출근 때 매일 버스타는 곳에서 마주치던 피부색 다른 노동자들이 다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보는 이 장면들은 안타까웠다. 끝으로, 마약중독에서 빠져 나온 나이든 록 가수 빌리가 부르는 "Christmas is all around" 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주제곡이었던 "Love is all around"의 리메이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 한물간 록스타는 자꾸 '물 좀 주소'의 한대수를 연상시킨다. 텔레비전에서 점잖은 이야기만 골라서 하는 '카수'들이 한 번은 보아야 할 장면. 이들 스무 명이 추는 '사랑의 원무(圓舞)'는 결국 노랫말처럼 사랑은 우리 주위 어디에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백인 중산층이 느낄 수 있는 이쁜 사랑에 한정돼 있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종합선물에는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관찰이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다"는 노랫말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은유와 비유를 통하여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찌 소설이나 노랫말만의 일일 것인가? 한국영화 점유율이 50%를 넘는다는데 스크린 쿼터가 성찰 아닌 핍쇼 수준을 넘지 못하는 짜잔한 것들마저 보호해 주어야 한다면 우리 영화의 앞날은 무성한 가시나무 숲이 될 게 뻔하다. 아하, 저걸로 후라이도 하는구나(색즉시공), 누이의 잠을 손바닥으로 떡치는(가문의 영광) 조폭 표현의 단계를 지나 근친상간의 거친 복수(올드보이)나 감추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터뜨리는'(실미도) 식의 충격주기 수준은 텔리비전 뉴스에서 전수하는 차떼기 수법과 같은 질 낮은 선물 세트여서 꼰대의 마음은 지극히 씁쓸하다. 혜원의 그림이 그 시대의 보고서라면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풍속화라 할 것이기에. 남의 떡을 보고서 속상하다, 우리 영화.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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