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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 [문화비평]
참으로 소중한 것
손영미/ 서울사대 영문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1995년(2004-01-28 10:52:26)
<손영미의 문화비평> 참으로 소중한 것 기원 전 1세기의 어느 날,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평소에 그를 사숙하던 피소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 좋은 시의 특징과 기능, 작법을 설명했다. 그 중 한 구절이 바로, "변호사는 메살라나 카셀리우스 같은 화술이나 학식이 없어도 나름대로 써 먹을 데가 있지만, 시원찮은 시인은 인간도, 신도, 출판업자도 용납하지 않는다. 시는 진정한 탁월함에서 한 치만 벗어나도 최악의 실패로 치닫기 때문이다" 라는 발언이다. 지난 2000년 동안 예술에 대해 수없이 많은 논의가 있어 왔지만, 창작하는 이에게 이보다 두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무섭고 끔찍한 사건이나 재난이 많지만, 그런 구체적인 재앙들 이외에 우리를 가장 우울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원찮은" 예술 작품들이다. 그런 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예술의 이름으로 청중을 괴롭히는 실패한 음악회들, 대형 마트에 걸려 있는 이발소 그림들, 초점을 잃어버린 조야한 영화들, 그리고 중간에 구조도, 의미도 사라져 버리는 소설만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도 없다. 반면에, 진정으로 탁월한 예술만큼 우리를 황홀하게 해 주는 것도 드물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는 바로 예술의 전당이 생기기 전, 세종문화회관의 학생석, 그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잘쯔부르크 모짤테움 교수진이 연주하는 모짤트의 클라리넷 5중주와 플룻 협주곡을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린 날이 될 것이다. 요요마와 강동석, 에마뉴엘 엑스가 KBS 교향악단과 협연한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듣던 날도 머리 속에 눈부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완벽한 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쁨, 명화와 마주 섰을 때의 설렘과 경외감 역시 우리 삶에서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심미적 기쁨이 그토록 완벽하고 심오한 것이기에 진부한 작품들이 주는 고통도 그렇게 큰 것이다. 형편없는 연주회나 속은 느낌을 주는 전람회는 언제까지고 마음속에 남아 두고두고 씁쓸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최고의 예술가가 최선의 기량으로 연주나 창작을 했는데, 그 가치를 알아주고 갈채를 보내줄 관객이나 청중이 없는 경우이다. 몇 년 전, 금호사중주단이 전주에 와 하이든의 "종달새"를 연주했을 때,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얼핏 뒤를 돌아본 순간, 너무도 무렴(無廉)하여 무대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모두 음악 전공 학생들로 보이는 겨우 2-30명의 관객이 그 큰 홀에 드문드문 앉아 있었던 것이다. 판소리 공연의 경우는 더욱 사정이 나빠서 요즘은 아예 젊은 사람들은 눈에 띄지도 않고, 몇 명 있다 해도 대개 그 분야를 공부하는 수련생들이다. 전람회에 가 봐도 화가의 가족이나 친지를 제외하면 정말 그림이 좋아 보러 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음악회 관객의 경우 역시 대다수가 초대권 소지자나 가족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인도 영화 "파이어"를 보고 난 후, 그 시간 그 영화를 본 건 나와 내 친구 단 둘이라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소득이나 교육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다. 부부가 모두 최고 학력을 갖고 있고, 소득 면에서도 최고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를 몇 년간 지나다닌 일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음악 소리가 들려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거기 사는 꼬마들은 한결 같이 그 앞에 있는 바이얼린 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한밤중이나 주말에도 첼로 연습에 열중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뭔가 악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동네에서 부모들이 단 한 번도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실수로라도 자기 아이들이 연습하는 스카를라티나 바하, 보케리니의 곡을 들어볼 만 하건만, 유리창이 모두 열려 있는 여름철에도 그들의 곡이 흘러나온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예능 점수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자식의 삶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가녀린 희망 속에 너덧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을 음악 학원에 보내고, 그 아이들은 강사의 인도로 음악회에 몰려와 극장 안 통로를 동네 골목길처럼 뛰어다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자신이 피아노를 쳤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게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의 예술적 기반이 이렇게 얇고 약하다 보니, 매스컴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국제 콩쿨 입상 소식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주자들의 평균 수준은 다른 나라의 그것에 비해 결코 높지 않고, 음악회장에서조차 믿을 만한 연주를 기대하기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에서는 어지간하면 어디서든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일상 생활 속에서도 취미로 연주하는 이들의 솜씨가 우리의 전문 연주자 못지 않은 걸 보고 저으기 놀란 경우가 많다. 그 차이는 바로 음악적인 감성과 예술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 아닐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어려서부터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문화에서는 저절로 좋은 악기, 좋은 연주가 흔해질 것이고, 볼 만한 미술 작품들이 양산될 것이며, 어디서나 괜찮은 전시회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몇 해 전 러시아의 젊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에 대해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태리의 한 벽촌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청중의 반응이 하도 열광적이어서 키신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앙코르에 응했고, 마침내 관중석의 한 할머니가 "저 애도 잠을 좀 자야지!" 하며 다른 이들을 만류하는 바람에 이 놀라운 사건이 막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 비슷한 사건을 목도한 바 있다. 대학원 강의가 끝나고 교수님 댁에서 종강 파티가 열렸는데, 식후 30분 정도 기타 연주가 있을 예정이었다. 폭설을 뚫고 먼 길을 운전해 모인 십여 명의 손님들 앞에서 기타리스트는 바하의 곡을 몇 개 연주했는데, 관객들의 너무도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결국 연주는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스페인의 무곡들과 남미의 탱고, 기타리스트가 직접 편곡한 비틀즈의 노래들까지 연주는 세 시간 넘게 이어졌고, 우리는 모두 점점 더 거세지는 바깥의 폭풍우도 잊은 채 그의 연주에 취해 앙코르에 앙코르를 거듭했다. 그날 밤 우리가 본 것은 세계적인 연주자도 아니고, 수백 년 된 악기도 아니었지만, 그 곳에 있던 우리 모두에게 그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일화로 남아 있다. 영국의 소설가 월터 페이터가 "보석 같은 불꽃의 순간"이라고 묘사한 그런 예술적 열락을 위해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때로는 병마에, 때로는 가난과 주변의 질시에, 때로는 당국의 핍박과 위협에 시달리면서 예술혼을 불태웠고, 대위법과 원근법, 유화 물감과 사진술을 발견하는 데 수천 년이 걸리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인류가 지금까지 기울여 온 가장 치열한 노력의 가장 찬란한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것이 기껏해야 아이들이 점수 때문에 잠깐 치고 마는 피아노나, 탁월한 몇 사람이 외국의 무슨 콩쿨에 가서 입선했다는 뉴스 거리나, 빌딩이 지어지면 의무적으로 세워지는 그만그만한 조각 작품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인류사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인가! 예술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아침저녁으로 쓰는 비누처럼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깊고 순수한 기쁨을 주는 그것을 위해 우리도 좀더 많은 시간과 애정을 바쳐야 할 것이다. 새해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음악회에 가기도 하고, 전람회에 가서 예술가를 격려해 주기도 하고,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부부 동반으로 극장 나들이도 하는 여유 있는 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좀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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