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와사람]
기계를 부수는 '철없는' 한지업자
김선경(2004-01-28 10:41:18)
기계를 부수는 '철없는' 한지업자
성일한지 최성일 대표
글 김선경
나는 의심이 좀 많은 사람이다. 사람 만나는 게 직업이다 보니, 누구를 만나든 그가 진실한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다. 세간에서 붙여준 타이틀과 그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동일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더러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최성일(38, 성일한지)씨와 전화연결이 됐을 때, 내 속에서는 의심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꼭 공장으로 오셔야 되느냐?"고 묻다니. 한지 만드는 과정을 보지 않고도 인터뷰가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 이 사람은 한지를 그냥 팔아먹기만 하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의심을 품은 채 약속장소인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의 외모를 보는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짧은 머리에 가죽점퍼, 고리가 달린 뚱뚱한 돈지갑, 고생을 모를 것 같은 둥실한 얼굴... 이 사람이 '전주한지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 일꾼'이란 말인가?
그가 내민 명함부터 살펴봤다. 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조합장, 성일한지 대표, 고려한지수의 대표. 젊은 나이에 대표자리를 세 개씩이나 맡고 있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사업이야기부터 물었다. 성일한지를 언제 만들었냐고. 98년도에 창업을 했단다. 98년이라면 겨우 5년째 아닌가! 유구한 전주한지의 역사를 증거하는 장인들을 익히 보아온 나로서는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가내업으로 한지를 만드셨단다. 철 들면서부터 한지를 만들었으니 자신의 경력만 잡으면 한 19년쯤 됐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10년 전, 한지에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손을 놓으셨다. 가족들을 데리고 아예 서울로 이사를 했으니,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97년,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전주로 돌아온다. 한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말씀대로 한지는 사양산업이었죠. 10여 년 전에 비해 생산업체가 엄청 줄었어요. 전주를 통틀어야 이제는 예닐곱 개가 고작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지업체가 줄어드는 것이 내가 한지를 만드는 데 피해 될 것이 없더라구요. 앞으로 한 20년 후에는 한지를 만드는 인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없겠더라구요. 그러면 내가 계속 만들자 싶어서 아버지께 말했어요. 아버지, 제가 계속 할랍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명절날이면 내려 오셔서 한지일 힘드니까 다른 일을 하라고 협박(?)을 하지만, 이미 성일씨의 마음은 굳을 대로 굳은 상태다.
그렇게 시작한 한지 일. 젊은 사람이니 만큼 옛 방식을 고집할 리는 없고, 생산시설 자동화로 한지를 대량생산해서 큰 회사에 납품이라도 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두 번째로 들었다. 제품은 당연히 기계로 생산하죠? 라고 묻자 그가 나를 비웃었다. "피식, 그러면 그것이 한진가요?"라고. 기계로 생산하는 것은 한지가 아니다? "당연하죠. 있는 기계를 하나라도 더 부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기계에서 뽑아내는 한지는 한지가 아니니까요. 대량생산으로 단시간에 상품화해서 높은 부가가치를 누리는 것, 물론 좋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아직 계승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발전에만 눈을 돌리니 그 발전이 제대로 된 발전입니까?" 이 대목에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이 사람이 시방, 이렇게 옳은 소리를 해도 되는 것이여? 내가 어안이 벙벙한 사이 그의 옳은 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석가탑에서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 발견됐을 당시, 그걸 싸고 있던 비단보자기는 손이 닿자마자 바슬바슬 떨어져 내렸지만 종이는 그대로였어요. 그런 종이는 지금 기술로는 만들지도 못해요. 자연에서 나온 것만이 자연과 융화할 수 있는 겁니다. 100% 순 한지만이 천년을 갑니다."
아니 그렇게 좋은 한지를 만드는 사람이 왜 공장은 안 보여주고 이런 데서 만나자고 했을까? 했더니 "공장을 이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장 이전에도 깊은 사연이 숨어 있다. 외국인이 가보고 싶은 거리 1위가 서울 인사동인데, 인사동 거리에 가보면 한지나 공예품 상호 앞에는 대부분 "전주" 아니면 "전북"이 붙어 있단다. 그만큼 전주 한지가 유명하단 얘긴데 정작 한지 만드는 공장을 개방하는 곳은 없다는 것. "한지공장이 깨끗하면 돈이 안 붙는다"는 말이 한지업계에 정설처럼 내려오는 탓도 있지만, 작업과정이 워낙 고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 되다보니 작업장이 깨끗할 여유가 없다. "제가 가서 공장을 보자고 해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더 이상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저부터 한지공장을 개방하려고 합니다. 만드는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우리문화를 알릴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가까운 자리에 부지를 얻어서 새로 지었어요. 직원들에게도 좀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고요." 아직 이전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많단다. 공장 이전하느라 바쁜 사람을 내가 불러냈으니 조금 미안해지려고 한다. 이제는 묻는 소리에 힘을 좀 빼본다. 원료인 닥은 어디에서 구해오는지요? 지리산 마천, 완주 동상, 경북 예천, 문경, 울진... 전국을 돌아다닌단다. 전주에는 왜 닥이 없는지 물었더니 지리적 여건은 좋은데 닥 재배가 완전히 사라져서 구할 수가 없다고. "대규모로 재배하는 곳이 없어요. 제가 여러 군데를 다니는 이유도 한 군데서 많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겨울철 농한기 때 노인들이 용돈벌이 삼아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많이 해달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직접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에 보았던 어르신들 중 꼭 한 두 명은 올해는 뵈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다 가고 나면 누가 저에게 닥을 주겠습니까?"
한지에 대한 그의 믿음은 100% 주문제작만 고집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간혹 목재펄프 등을 섞어서 단가가 싼 한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도 들어오지만 그는 절대 안 한다. "순도 99.9%의 질 좋은 한지를 원하는 사람만 나에게 연락을 해옵니다. 그래서 다른 제품보다 10% 정도 비싸게 팔리죠. 나는 절대로 '내 한지 사달라'고 영업 안 합니다. '나는 순수한 한지를 만든다'고 얘기할 뿐이죠." 그의 영업전략은 순도 높은 한지를 거짓말 안하고 만드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그의 정직을 믿어주는 사람과 거래할 뿐이다. 그래도 그의 한지는 없어서 못 판다.
그런 올곧은 믿음이 한지수의까지 만들어냈다. 100% 흙으로 돌아가는 수의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 전양배씨를 꼬셔서 시작한 것.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특허까지 냈지만 다른 사람이 한지수의를 만든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단다. 한지수의가 좋다는 걸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여기까지 들으니, 그에 대한 의심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비로소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한지에 대한 그의 믿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좋아서. 좋으니까. 좋다는 걸 아니까.
"한지를 종이로 보기 전에 자연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앞으로 한지산업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왜냐하면 가장 후퇴한 시점을 이미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거든요. 움츠렸던 것만큼 멀리 뛸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되는 날까지 저는 기계를 하나라도 더 부수고 자연과 하나되는 세계일류의 한지를 만들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을 겁니다. '저 놈 참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철없는 한지업자' 최성일씨의 새해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