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문화시평]
소외된 이웃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안의 메시지
양진규/한신대에서 신학을, 같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전주새누리교회 목사이며,(2004-01-28 10:39:37)
소외된 이웃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안의 메시지
자활근로자를 위한 연극 <통북어>
글 양진규 전북기독교사회복지연구소 소장
우리지역 모 자활후견기관의 김영배 관장님이 단장을 맡아 기획한 자활근로자를 위한 연극작품 '통북어 전'이 전국 10개 지역을 순회하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지난 12월3일에 전주에서 그 5번째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고마운 사람 덕에 작품을 보게 되었다. 나는 김대중 정부의 소위 '생산적 복지'정책으로 빈곤층의 생활지원을 위한 생활보호법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바뀌는 과정과 그 대표적 프로그램인 자활사업의 진행을 시작부터 지켜보아오던 터였다. 이 연극을 못 보았으면 후회할 처지였는데, 이렇게 관람 소감까지 쓰게 되니 황송하다.
공연이 있었던 날 예술회관은 평소 연극관람에 오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전라북도에 있는 자활근로자들과 그들을 돕는 후견기관의 직원들이 주 관객이었다. 연극이라는 다소 고급한 문화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지역 자활사업관련자들의 어우러짐 마당을 열어 놓은 듯한 느낌은 단장님도, 안내하는 이도, 관객들도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식전 행사에서 인사말과 감사의 말들이 오가는데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의 후원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대박 인생역전 '로또'복권에서 후원을 했다니 그 묘한 어울림(?)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재벌회장 통북어씨와 그 주변의 가난한 이들의 삶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었다. 통북어 회장이 죽으면서 "자식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을 놓고 자활근로자들이 일하면서 설왕설래하는 장면도 나오고, 몸져 누워있는 통회장의 주변에서 아들들이 재산차지를 위한 설전을 하는 장면, 노점상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줄에 묶어놓고 일하다가 노점상 단속의 북새통에 아이를 잃어버리는 상황, 아이를 찾아 헤매는 엄마, 그 엄마가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고 둘째 아들의 효성으로 살아가는 모습, 통북어 회장의 "돈이 모잘라, 자식들이 한 것을 세상에 갚으려면..."이라는 인상적인 멘트 등이 생각난다. 또 자활사업 현장에서 반장이 걸핏하면 그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야!"를 남발하며 제도적 문제제기를 희화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슬픈 술판, 가난의 대물림에 대한 푸념과 울음 섞인 욕지기 대화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자활공동체 창립에 대한 강조는 계몽적 냄새가 짙었다.
이 작품의 기획의도가 궁금했다. 김영배 관장님을 인터뷰했다. 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 분이 자활후견기관의 관장을 맡으면서, 그 기관에 소속된 자활근로자들을 모시고 서울로 연극을 보러 간 일이 있었고, 그 때 들은 말 중에 '50평생, 60평생에 연극이라고는 처음 구경한다.'라는 말이 맘에 걸려서 이 연극을 기획하였다한다. 마침 가깝게 지내던 김갑수씨의 도움이 컸고, 김갑수씨는 이제 사회복지의 전도사가 되어서 보람을 느낀다는 말도 해주셨다. 자활근로자분들께 돈만 줄 것이 아니라 문화적 혜택도 주어야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김갑수씨도 언론 인터뷰에서 "생전처음 보게 될지도 모르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연극을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역시 그도 문화적 혜택의 소외자들에게 연극이라는 제대로 된 문화상품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히 있었다.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 권리가 있는 자활근로자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기획의도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기획목적이 그렇다면 이 연극공연은 성공하였다. 제대로 된 무대, 조명, 배우가 있었고 더구나 자활근로자 중에서 배역을 맡겼으며, 행사장 전후에 그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하였으니 그 분들을 주인공으로 한 최고의 문화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하루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공연이었다. 그동안 자활사업에 한 축 끼어 있었던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독특하고 창조적인 발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내가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일부 실천하면서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병주고 약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병을 주었으면 약이라도 주어야지, 약도 주지 않는다면 더 몹쓸 일이다. 현 제도하의 사회복지는 딱 그만큼이다. 병을 고치거나 병이 들지 못하게 예방하는 것은 아직 너무 멀다. 사회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 사회의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이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이다. 이미 사회가 경쟁구조로 되어있고, 누군가는 탈락할 것을 전제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실업자가 그렇고, 노숙자가 그렇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연극의 주인공인 자활근로자의 예로 이야기를 해보자. 그들은 노동시장에서 퇴출되고 실업상태가 오래되어서 현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던 재산도 없어진 상태가 되어야 자활사업대상자가 된다. 그들도 이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이미 탈락한 사람들이다. 이 탈락이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 때문으로 보느냐, 사회구조적이니 문제로 보느냐는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만약 어떤 제도가 한 사람이라도 탈락할 것을 용인하지 않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면 개인의 문제가 다 클 것이다. 하지만 사회제도가 누군가는 탈락할 것을 전제로 되어있는 것이라면,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 제도인가? 자본주의 경쟁이 기형적으로 발달하여 '너 죽고 나 살자'의 의식이 제도화 되어있다. 그럼 이 자활근로자들은 이 사회의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는 이 사회구조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을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게 적반하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그들에게 월 약5-60만원의 봉급을 주고 일을 시킨다. 그냥 돈을 주면 복지병이 생긴단다. 그것도 모자라 쉬운 일 하고 돈을 주면 안 되니까 '자활공동체'를 만들어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으라고 다그친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 분들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만큼 못살아서 서럽고, 왜 못살게 되어서 국가의 짐이 되느냐고 눈치를 받아 더 서럽고, 이 상태를 벗어날 아무런 희망이 없어 암담한데, 자식들에게 이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니 몸과 마음의 한(恨)을 풀 길이 없을 것이다.
난 종교인으로서 '종교는 아편이다.'는 말을 들을 때 민망하다. 현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여 현 상황을 변혁하려는 의지를 원천봉쇄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편의 긍정적 기능에 대하여 억지 생각을 짜내었다. 소생의 소망이 없는 병자에게 고통을 줄여주는 역할, 또는 단기간에 고통을 잊게 해줌으로써 현재 진행되는 치료에 도움을 주는 기능은 긍정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편도 필요한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사회복지도 현 자본주의 사회의 아편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이냐, 아님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힘을 내기 위한 긍정적인 것으로 기능하느냐는 그 담당자들에게 달렸다. 아편을 권하는 사람이 마약상이냐 의사냐에 따라 그 기능이 달라지듯이 말이다.
공연된 연극 '통북어'가 우리 희망을 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자활근로자를 비롯한 나라의 많은 서민들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고 본다. 그럼 이제 사회복지종사자들이나 정책입안자, 사회운동가들의 몫이 남았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분들이 연극을 보고 잠시 편안한 마음으로 안식을 취하고 있을 때, 우리는 희망을 만들고 보여주어야 한다. 이 기나긴 실업이 끝날 수 있는 희망, 이 지겨운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을 희망, 멸시가 아닌 위로와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소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난 2004년도에는 그 희망이 우리 눈에 선연히 보여질 것을 기대한다. 그래야 수많은 아편쟁이들이 중독으로 맥없이 죽어가지 않고, 건강하게 회복되어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