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서평]
개발과 보존, 그리고 불화
이동재 | 인천 강회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교육과,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서남(2003-12-29 17:56:07)
갑작스런 자연 생태의 변화는 자연과 인간의 삶 모두를 혼란스럽게 한다. 변화는 우주 삼라만상의 보편적 현상이지만 천재지변이나 급격한 인위적 변화는 그에 따른 희생을 동반하게 한다. 따라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급격한 변화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우주의 변화에 대하여 인간이 그러한 여유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갑작스런 천재지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그것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인간의 행위에 따른 변화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완급을 조절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원하지 않는 화를 피할 수도 있다.
지난 근대 100년 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급격한 자연적·사회적 변화의 원인은 산업화(서구화·공업화·도시화·근대화)에 있었다. 서구 근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수탈, 대립과 경쟁 속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포함한 신분 계층의 변화,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는 물론 우리가 살아온 국토 산하의 모습을 급격히 변화시켜 왔다. 산업화의 모토는 개발이었으며 그 개발이란 사실상 우리의 삶의 공간에 대한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그동안 그러한 폭력적 변화의 과정을 추적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상처를 보듬어 안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미 한국문학사의 명소로 자리잡은 「무진기행」의 '무진'이나 「삼포 가는 길」의 '삼포'는 지난 시기의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고향과 그 삶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문학사적 지명들이다. 여기에 '새만금'을 새롭게 추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가 쥐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일제에 의한, 일제를 위한, 일제의 정책이었으므로 명분과 실리가 모두 저들에게 있었을 뿐 우리에게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일제 강점기는 일제에 의한, 일제를 위한, 일제의 근대화 정책 시기였을 뿐이다. 이것이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이바지했다는 일부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의 하나다. 이런 측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일단 논외로 하고, 해방 이후에 진행되어온 우리의 근대화 정책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정권 이후에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실행한 근대화 정책의 밑바탕엔 변화된 인류사적 흐름과 세계 정세의 흐름 속에서 한 국가와 그 구성원들의 절대적인 생존과 유지 번영을 위한 명분과 실리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경제 개발' 논리로 집약된 국가의 근대화, 산업화 정책 속에는 절대적인 기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명분과 실리, 당위와 소망적 사고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구성원들의 인적 재편 작업과 물질적 재편 과정 및 국토의 기획적인 공간 배치와 변화는 개발의 논리로 정당화 되었다. 개발은 곧 선이었고 당위였다. 사십 여 년 이상 진행된 그러한 개발은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어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습과 위상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기존의 개발 논리는 많은 문제점들을 더불어 노출시키기도 했다. 조헌용의 소설이 주목 받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은 '개발' 논리 속에 숨겨진 문제점들을 통해 개발에 대한 시각과 가치 규정에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다만한 벌이가, 특히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넉넉한 바다보다 더한 벌이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의도의 백사십배 가량의 땅이 생기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그만큼의 바다를 잃는다는 것은 알지 못할까? 땅이야 주인이 있다지만 바다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어처구니없이 성난 파도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자연의 순리대로만 살아간다면 바다는 모자람이 없이 누구에게나 일한 만큼은 갖게 해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바다에 길을 묻다」중에서
개발의 논리 속에 진행되어온 국토의 대대적인 인위적 용도 변경과 구획은 그 자체가 근대화 과정의 상징으로써 당연시 되어왔다. 미지와 신비의 자연을 계산 가능한 수학적 세계로 구획하는 것이 근대화의 과정이었듯이 국토의 쓰임새를 계산 가능한 세계로 포획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적인 개발의 논리였다.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바다를 메꿔 농경지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개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자연을 좀 더 상품성 있는 현실적 용도로 변경하는 일이 개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근대적인 개발이 회복불가능한 일방적 파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개발 논리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개발' 논리에서 '보존' 논리로 점차 가치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원인은 물론 과학의 발달에 따른 사실 및 가치 인식의 변화에 있겠지만, 그동안 진행해온 개발에 따른 물질적 풍요의 결과에 힘입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젠 그렇게까지 '개발'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 것 아니냐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생각은 인류 사회 혹은 한 국가의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 문제의 상당 수는 절대적인 생산의 결핍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분배의 문제에 따른 것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생각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개발에 따른 이해 집단 혹은 인간들 간의 대립과 갈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새만금 공사가 환경단체 등의 여론에 밀려 잠시 중단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앞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새만금 공사를 믿고 차를 샀고 새만금 공사를 믿고 꿈을 꾸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사를 중단한다니 미치고 환장한 노릇이었다.
그, 그 미친 놈들이 왜 생트집이래? 아, 좁아 죽겠다는 땅덩어리 늘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디 왜 지들이 지랄이야.이 바다가 뭐, 지들거여.
어떡헌디야. 참말로 어떡헌디야이. 지들한테는 환경인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밥죽이고 생명이잖여. 아, 요즘같이 건설경기도 안 좋은디 지금 물러나면 다 굶어죽으란 얘기잖여이.
-「고래가 올 때」중에서
개발의 논리 속엔 항상 이해 당사자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개발 논리가 국가 혹은 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과 생존의 문제를 명분과 실리로 걸고 제시했다면(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상당 부분 인정을 받음), 요즘에 진행되고 있는 개발은 지역 혹은 국가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걸고 있으나 그 점 자체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개발'에 따른 이익이나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보존'에 따른 이익과 예측 가능한 미래에 더 많은 관심과 가치를 두고 있는 인류사적인 변화의 의미를 고려할 때, 국가 혹은 지방자치제의 행정적 기능은 개발공사에 따른 이해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발 자체의 실효성과 문제점을 사전에 깊이 있게 연구하고 그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겨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조헌용의 소설은 이러한 점을 조용히 역설하고 있다.
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는 연작소설 형태의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은 한작품으로 썼어야할 소설이 여러 작품으로 분산된 느낌을 갖게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지루함은 한 작품으로 썼어야할 작품을 여러 작품으로 분산시킨 결과에 따른 것이다. 반복은 강조의 효과는 있으나 변화를 요구하는 서사의 흐름엔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