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문화저널]
오소리와 함께 맞는 겨울
천성순 예사랑 대표(2003-12-29 17:45:33)
하늘아!
오늘 아침은 첫서리가 왔구나. 우리 하늘이가 중학생이 된 지 벌써 3년. 이제 졸업을 하게 되는구나. 아침마다 자리에서 눈떠 보면 한결같이 책상에 앉아있는 너를 보면 대견하기만 하구나.
오랜만에 신김치에 돼지고기 조물조물 볶아놓고 한참 가을볕에 살이 오른 무청을 데쳐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 밥상을 주니, "아! 날마다 오늘 같으소서" 하고는 조촐한 밥상을 고마워하던 너...
하늘아!
엄마가 염색을 시작한 지도 여러해가 흘렀지만, 이곳 구이 시골마을에 살면서 하찮은 풀들에게도 사람들과 교감하는 에너지가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구나.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시들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고 또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개미취, 애기똥풀, 가막사리, 개망초, 사방오리... 이런 하찮은 풀들도 저마다의 오방색을 가지고 있어서 계절마다 아름다운 빛깔로 피어나서 염색하는 엄마에게는 귀한 재료가 되어주는구나.
며칠전에 과수원 아저씨가 '예사랑'에 쓰라고 호두나무 열매를 털어내고 호두껍질을 모아 두었는데, 야산에 오소리가 내려와서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모조리 물어가 버렸다는구나. 그 소리를 듣고 난 엄마는 약간 실망도 했었지만, 염색하는 사람으로서 야산의 오소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관계라는 걸 비로소 깨닫고는, 이제는 절반의 호두껍질은 야산의 짐승들에게 먼저 내어주는 아량과 베풀 줄 아는 마음도 배워야겠구나.
하늘아!
엄마가 염색을 시작하면서 버리기 아까운 천조각들이 반닫이에 쌓여가고, 그 조각천들을 모아 날마다 밤마다 조각보 바느질을 시작하게 되었구나. 처음 바느질을 시작할 때는 "엄마, 그 힘드신 바느질을 왜 하시려고 그래요, 요즘 엄마들처럼 헬스나 수영을 다니시는 게 백번 나을텐데요" 그랬지. 너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저녁마다 공부하다 말고 나와서 엄마의 바느질을 수월하게 해 주려고 한꺼번에 바늘귀에 실을 몸땅 꿰어주곤 했었지. 처음에는 조각보 백 조각을 이으려면 열흘이나 걸렸는데 요즘에는 족히 여덟시간이면 단숨에 조각보 한 장이 마무리되기도 하는 기쁨에 젖어보기도 하는구나. 그럴때면 요즘에 와서는 엄마 바느질을 바라보면서 "엄마, 저도 공부 그만두고 엄마처럼 살면 안될까요?" 하던 말, 엄마가 하는 일을 격려해주고, 오히려 너 때문에 힘든 세상 살맛 나게 하는구나.
중국의 한 시골뜨기 목수 출신인 유명한 화가 제백석은 스스로 三百石印富翁이라 호를 정해놓고, 도장을 삼백개나 가지고 있어서 부자라고 했다는데, 세상에 와서 하늘이를 자식으로 둔 이 엄마가 더 큰 부자라고 생각한단다.
하늘아!
공부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밝은 빛을 주고, 나보다 어려운 친구를 먼저 챙겨주는, 친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느덧 이곳 구이 저수지 마을은 첫서리가 내렸고, 벌레가 사방창문을 막기 시작하는 겨울의 문턱이구나. 엄마도 오소리와 함께 부지런히 겨울 채비를 해야겠구나.
그럼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