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교사일기]
선생님이랑 결혼 한다구?
전혜련 성남혜은학교 교사(2003-12-29 17:43:38)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교실에 앉아 여기 저기 남아있는 아이들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교실 바닥 한 가득인 지우개 가루와 의자 밑에 떨어져 있는 녹색 색연필, 색칠하다 만 밑그림 종이, 사물함 밖에 던져져 있는 교과서, 과자 부스러기들과 종이 쪼가리 몇 개...... 아이들이 하루 동안 생활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빈 교실에서 아이들과의 시간을 돌이켜보고 앉았노라니 웃음이 나기도 하고 좀 더 참을 걸 하는 아쉬움도 함께 마음 안에 찾아든다.
오늘은 사건이 많기도 했다. 오늘 하루의 삶을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실랑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듯 싶다.
등교지도 때부터 신발을 갈아 신지 않겠다고 버티는 용이 녀석과 씨름이 시작되었다. 무사히 교실까지 올라와서도 알림장을 꺼내게 하고, 가방을 의자에 걸게 하고 신발주머니를 제자리에 놓게 하고 자리에 앉게 하기까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시작된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못했다.
오전에 있었던 비상 대피 훈련 시간에도 지시한대로 엎드리며 열심히 지시를 따라주는 대부분의 아이들과는 달리, 아무 대책이 없는 이 녀석은 힘 좋은 남자아이들의 손에 붙들려 훈련에 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불이라도 나면 이 녀석을 어떻게 이동시켜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져 버린다. 늘 특별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 이런 답답한 마음과의 씨름이 있을 때마다 내 자신이 참 무능력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나 싶어져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의욕을 상실하고 자괴감에 빠져들어 버리곤 한다.
오늘 점심시간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용이 녀석과 한판 전쟁을 치르고 말았다.
"송용, 밥 먹으러 가자. 우리 반 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 녀석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교실 구석의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용아, 밥 먹어야지, 너 밥 먹는 거 좋아하잖아. 가자!"
밝게 웃으며 말하는 나를 옆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내가 그 앞에 가서 일으켜 세워보고 소리를 질러봐도 꼼짝하지 않는다. 좀 더 단호하게 무서운 기세로 다가서자 그제야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는 이 녀석과 함께 힘들게 식당에 도착했는데 내가 잠시 다른 녀석 살피는 사이 이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이 철렁해져 급한 마음으로 교실에 뛰어 올라와 보니 알 수 없는 소리를 발성하며 신이난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식당으로 가자는 말에 또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틸 태세를 갖춘 이 녀석에게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누가 봐도 정말 화가 난 모습으로 씩씩대며 다가서자 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마구 뛰어내려간다.
"니밥 먹을 거면서 도대체 왜 안 내려간다는 거야? 선생님 위해서 밥 먹냐?"
"밥도 많이 먹을 거잖아 너. 도대체 니밥 먹을 거면서 왜 그러냐구?"
저만치 뛰어내려가는 녀석 뒤에서 서러움과 화가 복받쳐 울먹이는 목소리로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러대고 말았다. 그렇게 나를 힘빠지게 해놓고서 밥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너 또 밥 먹고 힘내서 말 안들을려고 그러지? 그럴 거면 밥 많이 먹지마"
흘겨보며 말하는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는 이 녀석을 바라보며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전쟁하듯 보낸 몇 분이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여 그만 픽 웃음이 났다.
석표 녀석은 또 직업 시간에 다른 반 친구의 신발을 학교 담장 너머로 던져서 배상 문제며 원인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반 선생님과의 어색하고 답답한 관계를 나에게 선물했다. 아이들 문제로 다른 선생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걸 배우게 되거나 친분이 쌓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학부모에게 전달해야 하는 문제라든가, 책임 문제 등을 이유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된다.
"석표야 도대체 왜 그랬니? 왜 그 친구 신발을 던졌니?"
"그냥요"
"다른 친구 신발을 그냥 집어 던졌어? 그냥? "
"네, 그냥요. 몰라요... 그냥 던졌어요"
여러 번 묻는 걸 싫어하는 이 녀석 오히려 나에게 짜증을 부린다.
"뭐, 친구 신발을 그냥 던져, 그냥? 그거 나쁜 짓인 거 알아 몰라?"
"알아요. 나쁜 짓이에요. 몰라요. 그냥 던졌어요"
끝까지 그냥 이었다는 이 녀석의 대답에 손바닥을 5대나 때려주고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 의자를 들고 앉아있게 했다. 미술시간에 종이 접기를 하는데 내 표정이 심각한걸 보고 유구녀석 애들한테 조용히 하라고 티나게 눈치를 준다.
"선생님 아퍼? " 활짝 웃으며 애교를 떠는 유구에게
"응 선생님 감기 걸렸어.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대답했더니
온몸을 떨어가며 애교 작전을 펼친다. 결국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등뒤로 와서 어깨를 두들겨 주며 안마 세례를 퍼붓는다. 유구를 보고 다른 애들도 일어나 안마를 해주겠다고 달려들자 애들을 다 밀어내며
"아...안돼. 선생님은 유구꺼야. 겨...결혼. "
"뭐? 너 선생님이랑 결혼한다구? 선생님 남자친구 있는데?"
"안돼. 싫어. 헤...헤어져. 유구. 유구랑 해요" 하면서 이쁜 표정으로 나를 웃게 한다. 이제 안 아프다고 선생님 기분 좋아졌다고 함께 웃어 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가 애들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순간의 행복한 마음에 감사해 하면서도 또 몸도 마음도 애들 앞에 감추지 못하고 약한 모습 드러내버린 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종일 버럭버럭 소릴 질러댄 기억뿐이다.
마지막 하교 지도 시간에도 용이는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지 않고 실내화 주머니를 든 채 스쿨버스까지 돌진을 해버린다. 스쿨버스에 오르려는 순간에 등덜미를 낚아채서 다시 신발을 갈아 신으라고 윽박지르는 내게 '이번에도 내 작전에 말려들었군요, 난 선생님이 헉헉거리며 쫓아와서 나한테 화를 낼 줄 알았어요, 선생님' 그런 표정으로 신나하는 이 녀석의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고 매서운 표정을 짓다가도 결국엔 웃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천진난만한 이 녀석의 웃음에 나의 이 안달이 너무 아무것 아니게 느껴졌고, 이 녀석의 눈빛과 웃음을 아는 사람은 이 녀석을 정말로는 미워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면서 말이다.
하루동안 애들과 씨름하며 행복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던 이 교실에 앉아 내일은 좀 더 나은 모습의 나를 꿈꿔보는데... 좀 우아하고 따뜻한 예쁜 교사의 모습을 꿈꿔보는데... 사실 오늘과 별반 다름없을 것임을 그리고 내일도 이 반복되는 실랑이 속에서 난 또 행복과 좌절의 극과 극을 오가게 될 것임을 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