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문화저널]
싱건지 한 사발, 무수 한 조각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 사투리| 방언 연구가(2003-12-29 17:42:00)
런던의 겨울은 밤이 참 길다. 오후 4시쯤 거대한 땅거미가 피어올라 서녘에 머문 노을을 꽃이라도 받치듯 그렇게 잠깐 아름다운 조화로움을 이루다가, 이내 기어이 저물어 그 바람 많고 기나긴 겨울밤을 맞는다. 내가 살던 집 뒤뜰에는 머리채 풀어헤친 것 마냥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성기게 늘어뜨린 자작나무들이 조그만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밤 내내 몰아치는 비바람은 자작나무의 머리채를 휘둘러 놓고 그 가지에서 이는 바람 소리는 그렇잖아도 서러운 이방인의 심사를 흔들곤 하였다. 바로 그렇게 ‘으짓잖은’ 객창감에 젖을 때마나 나는 내 유년의 겨울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곤 하였다.
우리의 가옥 구조가 다 그러했듯이, 내가 살던 집도 기다란 부뚜막에 네모난 ‘부석짝’을 갖춘, 그리고 그 부엌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훈짐’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가였다. 우리에게 가장 그립고 정겨운 풍경은 아마도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고향의 정경일 것인데 그 역시 ‘부석짝’에 불 지피고 저녁 준비하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서부터 바깥 세상이 끝나기만 하면 달려와 안기던 어머니의 품, 부엌의 그 따스함으로 길들여진 우리이다. 장년의 귀가든 노년의 귀가든 그 어느 남정네에게든, 동네 ‘입샅’에 들어서기만 하면 묻어나는, 저녁 연기 속의 ‘밥내, 낸내’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심장의 피돌기마저 녹진거리게 만든다. 바로 그 부엌의 ‘훈짐’은 우리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는 토종 정서의 원형이다.
겨울밤, 전라도의 겨울밤은 아랫목, 윗목, 사랑방의 정서가 각각 다르다. 유년의 나로서는 그저 장판 ‘노릿노릿’ 눌어있는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할머니 이야기 듣는 일이 으뜸가는 호사였으며, 종종 옆집 아주머니들 마실 나와 ‘군입종’하는 재미도 싫지 않았다. 그런 겨울에는 ‘마룽’에 나가는 것조차도 ‘꺽정스런’ 일이었지만, 그 ‘꺽정스러움’을 무릅쓰기만 하면 겨울밤 새중간에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상쾌한 추억들이 묻어난다. 그때야, 가마솥에 밥 눌던 시절이라 ‘깜밥’은 지천이고, 가끔 고구마 삶아먹거나 밤 구워 먹는 일은 ‘마룽’ 위에 디딘 발 밑으로 얼음이 쩍쩍거릴망정 마다않고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살얼음 살짝 떠 있는 싱건지 한 사발과 눈 쌓인 ‘무숫구데기’에서 방금 빼온 ‘무시’ 조각 순번 타서 받아먹는 그 상쾌함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전설로 남을 그리움이다.
제, 그 아릿한 추억의 장면 속에 살아있던 방언형들, ‘싱건지 한 사발, 무수 한 조각’에 담긴 역사성에 관하여 공부하는 자세로 들여다보자. ‘싱건지’는, 형용사 ‘싱겁다’가 관형형 어미 ‘-ㄴ’과 어울려 ‘싱거운’을 만들고 거기에 ‘김치’의 전라도 방언형 ‘지’가 어우러져 형성된 단어이다. ‘싱건지’는 글자 그대로 ‘싱거운 김치’라는 뜻이다. ‘김치’의 전라도 방언형 ‘짐치’는 중세국어 ‘딤?’에서 이른바 구개음화 현상을 거쳐 ‘짐?>짐치’로 변화한 형태이다. 그에 비해 표준어 김치는 ‘짐치’ 형태에 이물감을 느낀 서울, 경기 지역 사람들이 ‘짐치’의 변화 이전 형태로 잘못 찾아간 결과 ‘김치’라는 발음을 유포시킨 데서 비롯된 형태이다. 이것을 국어학에서는 오분석(誤分析)이라는 용어로 명명하여 잘못 분석하여 이루어진 형태들을 일컫는다. ‘짐치’와 더불어 존재하는 ‘지’는 직접 대응할 만한 중세국어 형을 찾을 수 없으나 ‘짐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는 독립된 단어로 사용될 만큼의 자립성을 가지며, 게다가 앞뒤에 다른 단어를 거느려, ‘무수지, 싱건지, 짓거리’ 등과 같은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단어 형성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짐치’와 ‘지’는 언어 변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지금껏 전라도 방언의 단어 체계 속에 존재해 오던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오분석된 서울말 ‘김치’의 권위에 밀려 촌스럽다는 누명을 쓰게 됨으로써 그 결과 곧 그 삶에 종지부를 찍을 운명에 놓인 단어이다. 이러한 과정과 운명은 표준어 ‘무’의 전라도 방언형 ‘무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수’의 중세국어 형 ‘무?’는 ‘겨? 무?는 밥과 半이니’<두시언해 초간본 권 16, 70> 등에서 확인되는 데, 중세 국어 시기에 사용되던 ‘ㅿ’ 이 근대 국어 시기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탈락하여 ‘무우’가 되고, 전라도를 비롯한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ㅿ’의 음가가 살아남아 ‘무수’ 혹은 ‘무시’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봄직한 일은, 방언은 이른바 자연언어(natural language) 즉, 모든 인류가 일정한 공간에서 개인적,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형성하고 사용해 온 자연스러운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방언이 궁벽한 시골
지역에서 곤궁한 사람들만 사용하는 이상하고 촌스러운 단어 몇 개가 아니라, 우리가 통상 언어라고 부르는 그것이 모두 방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는 국가의 통치와 교육을 위해 제정된 하나의 표준어-그러므로 표준어는 규범언어이고 인공 언어이며-와, 수많은 방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방언은 그 많은 한국어의 하위 변종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나름의 완벽하고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언어이다.
아파트 생활과 소가족 중심의 도시 생활에 보편화된 요즈음, 우리의 밤은 밤으로서의 정서를 잃은 지 오래이다. 길마다 가로등이 켜지고 거리에는 온갖 조명들로 화려한 채 잠들지 못 하는 밤을 맞는다. 인간에게 밤은 이성으로 무뎌진 감성을 회복하는 시간이며, 지친 영혼을 편히 쉬게 하는 시간이다. 날이 추워질수록 따스한 인간관계를 원하며, 그것의 품위와 깊이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움으로 남는 그 무엇일 것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그리운 정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부엌과 온돌로 이어지는 전통적 정서의 원형으로서 싱건지와 무수 한 조각을 마련한 셈이다. 그 소중한 분들을 그리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