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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남한의 스미스들, 그리고 네오
신귀백(2003-12-29 17:33:42)
전 세계가 한날 한 시에 개봉을 했으니 가히 레볼루션이라 할 만하다. 자본의 이익을 좇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 시스템,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다. 동과 서, 철학과 종교, 미래와 실존이 뒤엉켜 쏟아지는 현란한 화면들을 소화하기에 철학은 멀고 탐미는 가까웠다.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는 부양술과 장엄하게 쏟아 붓는 파괴의 미학 뒤에 붙는 철학적 담론을 현학의 허세라고 그냥 내치기엔 달고 싶은 댓글이 있다. 여기 레볼루션에 몸을 던진 한 남자가 있다. 허리를 눕혀 총알을 피하는 그는 오리아나 팔라치의 『남자』나 게바라가 준 감동과는 다른 미학으로 다가온다. 주어진 매트릭스에 반기를 들고 자유의지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키아누 리브스. 고기 잡던 어부가 베드로가 되고 세무공무원이 사도 바울이 되듯이 컴퓨터 회사원이던 앤더슨은 네오(메시아?)가 된다. 하늘을 난다해도 그 역시 칼에 베이면 피가 묻어 나오는(피투성이요, 被投性인), 네오가 원한 것은 레볼루션이 아닌 '피스'였을 뿐. 합리성의 효율에만 집착하는 우리 남한 매트릭스에도 네오는 있다. 신자유주의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네오는 크레인 위에도, 떨어진 장갑으로 삼보일배하는 길 위에도 있다. 우리의 시스템은 항상 버벅거린다. 예수도 그랬다. 제자들도 버벅댔다. 열심당원에게는 식민지 극복이 주과제였을 거고 영혼의 치유 등 요구사항이 많았을 것이다. 남한 매트릭스도 파병이네 핵폐기장이네 하면서 끊임없이 버벅댄다. 시스템의 함장으로 뽑힌 그에게는 요구사항이 끝이 없다(아니, 원래 옵션 없이 계약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이제 조직적으로 복제된 스미스가 되어 특검을 하자고 난리고 럼스펠드는 알아서 하라며 눈에 힘주고 돌아갔다. 이 이상한 파토스를 내어놓는 스미스들은 사회적 통제력을 벗어난 채, 빨간 안경을 끼고 백분토론에 나와 손석희가 "정리해 주세요"라고 아무리 달래도 할 말을 다한다. 뿐인가. 각종 프로그램을 밀거래하는 이 트레인맨들은 여의도에서는 조명발을 받지만 지하주차장에서 돈다발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 한 네오가 있다. 아키텍쳐(매트릭스의 설계자)가 예측하지 못한 존재로 바로 한진 85호기 크레인에서 살아 넉 달, 죽어 한 달을 견딘 "그"가 있다. 이 디지털의 시대에 고공에서 벌인 아날로그 식 고행도 '그들'에게는 그저 방정식의 가벼운 변수로나 생각됐을까. 그래, 트리니티의 공중부양 발차기 정도로나 생각했겠지. '그들'과 기자들은 그의 인내심을 그리고 아랫것들 사이의 갈등을 즐겼을 것이다. 겨우 팔십 몇만원을 실수령액으로 받는 노동귀족은 <매트릭스 2>가 끝날 때쯤 농성을 시작했고 <매트릭스 3>가 히트하는 시점에 겨우 묻힐 수 있었다. 몸에 불을 놓은 배달호도, 크레인 위에서 생을 마감한 김주익도 토요일은 아이들에게 <해리포터>도 보여주고, 쓰끼다시 많이 주는 식당에서 삼겹살이라도 먹고 싶었을 것이다. 동료들과 룸살롱은 못 가도 노래방은 가고 싶었을 것이다. 크레인에서 냉면이 먹고 싶었을 것이고 1타 3피의 즐거움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는 희망 없는 싸움이라고 낮게 탄식했을 것이고 또 자신을 네오처럼 '믿고' '선택'한 일하고 싶어하는 동료와 자신을 타일렀을 것이다. 어디, 그라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절제력을 갖고 있어서 위원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절규를 매미가 할퀴고 간 뒤에 '강심장'이라고 간단히 한 줄로만 보도한 '그들'의 수준과 관심은 한국주류사회의 윤리의식을 대변한다. 그 가십에 담긴 질감이나 감정표현은 우리 사는 이 매트릭스가 눈과 귀로만 느끼려 하지 심장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결국 태풍 뒤 신문의 냉정과 그의 죽음에 따른 열정사이에 손배소와 가압류를 취소하고 정상조업이 이루어졌다. 세상 많이 변했다 한다. EBS 교양강좌에는 홍세화도 진중권(논의가 많겠지만?)도 나온다. 이들이 갑자기 내린 눈처럼 '짠'하고 나타난 것일까. 아니다. 다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날아가 눈을 앗긴 네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레볼루션>을 혁명 아닌 순환으로 보자는 견해를 말한다. 일리가 있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인간과 기계가 혁명 말고 공존이나 화해 정도면 어떠냐고 묻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말이다. 보온이 잘 된 통유리에서 난닝구만 입고 대장금을 보며 야식을 시키는데, 서울의 교회에서 중국동포 5000명이, 제발 일만 좀 하게 해 달라고, 농성을 한단다. 우리 사는 매트릭스에 칼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닌데 말이다.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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