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문화저널]
화음(和音)으로 어우러지고 싶다
김영배 | 1953년 전주 출생. 전북대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해오다 지난 2000년 전(2003-12-29 17:31:34)
지금껏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내 하는 일의 성격 탓에 여러 기관이며 단체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고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관계가 많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순수한 열정과 애정으로 만나온 이들은 역시 노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장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열심히 한 일도 역시 그 터를 가꾸어 온 일이라 말할 것이다.
이제는 내 젊음의 열정과 청춘이 다 녹아들어, 떠나고 싶어도 등 돌려 떠날 수 없고, 던져 버려도 다시 되돌아오고 마는 질긴 숙명의 사슬처럼 그렇게 화인(和人)들은 내 삶의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다.
70년대 초, 건지벌 교정의 교양학부 잔디밭은 언제나 막걸리통과 통기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날개가 있어도 하늘이 없는 새들처럼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있었다. 우리는 시국의 긴장감을 술잔에 쏟아놓고 분노하였으며, 불확실한 미래와 부자유한 젊음에 비틀거렸다. 누군가는 한구석에서 오열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때 유일하게 우리를 달랠 수 있었던 게 바로 노래였다. 분노와 슬픔에 지치면 우리는 무리지어 기타소리에 맞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트윈폴리오와 윤항기의 노래가 압도적이었던 것 같다.
교회 장로님이신 교수님의 권유에 의해 멋모르고 선택한 학과여서 교양학부 시절부터 연구실에서 실험을 도와야 했기에 연구실과 실험실의 삭막한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던 나에게, 대학 잔디밭은 유일한 돌파구였다. 아무리 나를 누르고 있어도 노래와 막걸리 생각이 더 간절했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서슬퍼런 선배들의 눈을 피해 연구실을 뛰쳐나와 친구들과 함께 잔디밭의 가족이 되어갔던 것이다.
당시 전석환의 노래 운동 덕에 가락을 알고, 예배당 성가대 덕에 화성의 맛을 처음 본 나는 아편 중독자처럼 노래에 미쳐 있었다.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기웃거리고 끼어들려 했다. 그러나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다루는 악기 하나 없고 형편없는 노래 실력 때문에 번번히 웃음거리가 되어 외톨이가 되었다.
결국 친한 친구 두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푸른 노래회'라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합창 서클에 들게 되었다. 그것도 친구 만나러 왔다는 명분으로 매일 매일 연습장소에 찾아가 '나홀로 관객'으로 그 긴 연습시간들을 죽치며 견뎌낸 정성으로 어물쩡 회원으로 인정받게 된 것인데, 이것이 내 인생을 전환시킨 대 사건이 된 것이다. '푸른노래회' 회원이 되었다는 우쭐함과 기쁨으로 신이 나서 열심히 노래 공부를 했다. 술만 마시면 두 친구들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최대의 성량으로 남성 트리오 연주를 자주 했다. 고성방가라는 괘씸한 죄목으로 가끔씩 파출소에 끌려가 계도장을 받기도 했는데, 찬송가 부르는 것도 이해 못하냐며 항변한 적도 있다.
한 사람만 찾으면 당연히 두 사람은 함께 있던 황금의 삼총사 시절이 끝난 것은 동만이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였고 바로 이어 나도 논산 훈련소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혼자 남았던 상균이는 졸업 후 해병대 장교가 되어 복무하게되었기 때문에 결국 복학 후에도 삼총사는 다시 이루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졸병시절 전방에서 보초를 서면서 바라보던 밤하늘에는 항상 노래하던 친구들의 얼굴들과 회원들의 노래 소리가 어우러지다 눈물로 변했다. 고된 행군길에도 헤어질 때 함께 불렀던 보리밭 노래가 발자국을 따라왔다. 휴가를 미루어 놓았다가 수련회 때에 맞춰 변산바다로 달려갔다. 노을지는 해변을 손잡고 걸으며 노래하던 추억을 한움큼씩 만들어 와야 복귀해서도 그 고단함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신을 짜릿하게 떨게 하는 그 합창의 화음이 좋아 복학 후 노래모임을 찾았으나 이끄는 사람이 없어 흐지부지 흩어져 버린 뒤였다. 나는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게 되었고, 다시 모아진 칠팔 명의 단원들과 함께 합창단을 일구고 키워냈다. 그랬던 것이 이듬해에는 80 명이 넘는 단원들이 되어 전국무대에 당당히 서는 대 합창단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4년제 대학 40개 이상이 참가한 전국대학생 합창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피아노를 부상으로 받았으며, 그 후부터는 매년 전국대회에서 모든 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전북대학교 합창단의 전통을 후배들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만나는가?', '왜 우리는 함께 노래하는가?'
그 시절, 당시 모교에는 음악과가 없어 교육대학 김성지 교수님을 모시러 다니고, 연습장 구하러 다니고, 악보 인쇄하러 다니느라 땀흘리며 돌아다니는 중에도 이 답을 찾아야 단원들이 떠나지 않고 합창을 계속하리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었다.
그래서 장고 끝에 떠올려낸 "和"라는 글자 하나에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고민했던 것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아직도 후배들에게 훈으로 전해진 것이다. 1학년이 37기임에도 지금도 후배들이 이 단훈을 버리지 않고 전통을 이어주는 것이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합창의 기본은 화음이다. 합창은 조화이다. 자기의 개성을 줄이고 여럿이 한 목소리를 만들어야 함으로 냉정한 절제가 필수이다. 마음들이 모아지지 않으면 목소리는 모아지지 않는다. 합창은 절대 인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합창을 하려면 먼저 사람부터 친해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한다. 인생의 최대 목표는 행복추구이다 행복은 조화에서 온다. 합창을 하는 이는 함께 사는 지혜를 안다. 그래서 합창이 있는 곳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이렇게 온갖 감언이설로 후배들을 꼬여냈다. 나는 지금도 어린 후배들을 조직원(?)으로 학습시키는 교재로 이 말을 활용하고 있다
그 덕인지 우리의 결속력은 대단하여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또한 선후배의 술좌석에 술주정 없는 기풍은 아직도 여전하다.
이렇게 나는 내 젊음과 열정을 전북대학교 합창단의 터를 닦는데 바쳤다. 천 명이 다되는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나의 후배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재산이다.
세상의 소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노래소리라 믿는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목소리들이 완전한 화음을 이룰 때의 그 공명의 감동은, 귀뿐만 아니라 가슴을 뒤흔들고 영혼을 일깨우며 맑게 해준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거나, 어떤 단체와 연관을 맺을 때면 왜 우리가 만나는지, 어떻게 함께 노래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가 되기를 바란다. 혹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 음정이며 박자가 맞지 않아서 화음을 깨뜨리지 않을까... . 먼저 생각해 보려 한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몸바쳐 키워낸 것들이 결국은 나를 키워내고 살찌웠다는 사실을 오늘 문득 가슴 저리게 깨닫는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김영배씨는 지난 12월 입적하신 성륜사 청화대종사의 맏상좌이자 미국 LA 삼보사 주지인 용타 큰스님을 추천했습니다. 필자는 15년 전 백장암의 동사섭 프로그램에서 용타 큰스님을 만나 인연을 맺었습니다. 용타 큰스님은 현재 김제 귀신사에 머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