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정철성의 책꽂이]
방 백
정철성(2003-12-29 17:28:44)
우리 동네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초등학교 앞길을 지나간다. 눈을 감고 가라고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사온 지 삼 년이 되도록 무슨 가게들이 있는지 잘 몰랐다. 몇 번을 되풀이해서 확인한 다음 겨우 순서를 기억할 수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통닭집, 문구점, 제과점, 꽃집, 미용실, 문구점, 비디오대여점, 분식집, 문구점, 개소주집, 365일 점포정리 중인 그릇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초등학교 앞이라 문구점이 셋이나 된다. 이 가게들은 길의 남쪽에 있다. 길의 북쪽에는 슈퍼라고 간판을 낸 점방, 중화요리, 새마을금고, 미용실, 현상소, 과일가게, 정육점, 비디오대여점, 제과점, 뜨개질집이 늘어서 있다. 우리 동네에는 미용실도 예닐곱 개나 있다. 좋은 동네다. 사실 북쪽은 내 발길이 좀 뜸한 편이어서 순서에 자신이 없다. 그래도 찾아가라면 잘 찾아간다.!
자, 내가 동네 지리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가 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떤 친구네 아파트는 몇 동 몇 호인지 기억을 못하면서 발이 알아서 찾아간다. 나만 아는 것이다. 누가 물어보면 알려 줄 수 없고 함께 나서서 데려다 주어야 한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답답 절벽이다. 그러니 모른다고 해야 맞다.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려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은 정신활동의 마무리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감수성이 좀 유별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적절한 표현을 얻지 못하면 말끔 헛짓이다. 쓰는 시마다 명작인 시인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니 시인 축에도 못 드는 내가 솜씨가 없어서 그렇지 속은 꽉 찼다고 아무리 자랑해 봐야 허풍이나 사기 취급을 받을 게 불 보듯 환하다.
제대로 표현하려면 오감을 동원하여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얻어야 한다. 다 얻을 수 없으면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야 한다. 유자를 흔들어 소리를 듣거나 새의 깃털을 뽑아 맛을 볼 필요는 없다. 유자는 유자이고 짐새는 짐새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잡을 수 있을까? 가만히 쳐다보아야 한다. 오래 전에 들은 시 구절이 생각난다. 정호(程顥)의 “가을날 우연히 지음(秋日偶成)”이라는 제목의 시에 “온갖 사물을 고요히 바라보면 다 스스로 얻어지고(萬物靜觀皆自得)”라는 구절이 있었다. 정말 조용히 쳐다보면 세상만사를 다 알게 되느냐?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
우리가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본능과 학습의 덕분이다. 먹을 게 흔전만전이라 별 실감이 없지만, 여러분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돈을 주고 사면 먹어도 된다고? (가공할 자본의 위력이로다.) 대개 배워서 안다. 나는 어릴 때 동네에서 형들에게 마 캐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초봄에 싹이 나올 무렵 다른 넝쿨과 구분되는 마 줄기와 이파리의 특징을 학습했다. 그리고 실습에 들어갔다. 잘못 보면 구덩이를 파느라고 힘만 빠졌다. 찔레순을 껍질 벗겨 먹기도 했었다. 쇠면 못 먹는다. 처음 보는 버섯을 먹어보는 아이는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누가 버섯을 잘못 먹고 누웠느니 하는 뉴스가 가끔 들린다. 몇 년 전에도 개당귀를 참당귀로 알고 먹은 이가 큰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토끼는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본능에 따라, 유전자에 기록된 명령! 에 따라,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이야기 속에서야 용궁 구경도 하지만 그 토끼는 토끼가 아니다. 저 산의 토끼가 풀을 보며 곰곰 생각에 잠긴다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면 누군가 풀을 보며 생각에 잠기다 포획당한 토끼탕을 먹게 될 것이다. 요즘은 호랑이 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그런데 그 많던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본능은 내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느낌이 없을 만큼 자연스럽다. 그런데 학습으로 얻은 간접지식은 서먹서먹하고 여러 번 되풀이해도 껄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냥 해보는 것과 맘먹고 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뼈와 근육에 새겨 놓지 않으면 또 배워야 한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건망증은 핑계일 뿐이다. 꼭 필요한 일이면 두 번 물어보지 않는다. 시는 타성에 빠진 학습을 넘어 직접 체험을 시도하는 것이다. 본능보다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습을 초월하여 천길 낭떠러지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렇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매양 한 가지이지만, 해가 가는 길은 매일 다르다.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올라 함지(咸池)에 빠지는가? 천동설도 지동설도 다 틀렸다. 지구중! 심설도 태양중심설도 다 사실이 아니란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태초 이전에 시간이 있었는가? 우주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나 독자가 시를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새로움을 함께 느끼지 못하면 토끼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보자. 김종삼의 「장편(掌篇) 2 」이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 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이 시를 읽고 목요일의 편지에 나는 이렇게 썼다.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를 기억하십니까? 김종삼 시인의 시이지요. 이 분은 1921년에 태어나 지난 1984년에 작고하셨습니다. 「북치는 소년」의 첫머리 ‘내용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구절보다 아름답고, 모호하고, 서글픈 시구도 드물 것입니다. 그것은 황폐한 1950년대를 음악과 순수 서정시에 의지하여 견디려 했던 시인의 마지막 도피처였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김종삼 시인의 시들은 길이가 짧습니다. 그러나 짧은 가운데 숨겨진 이야기는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을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오늘 감상할 시에는 「장편(掌篇)」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장편은 손바닥만큼 짧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스쳐 지나가면 그만일 일상의 한 장면을 이렇게 통절한 색조로 바꾸어버린 시인의 필력이 감탄스럽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 몇 명일까? 주인영감, 거지소녀 그리고 거지 장님. 세 명일까? 찬찬히 보니, 아, 네 명이다.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일컫는 말. 그렇다면 거지 장님 부부의 거지 딸과 밥집 주인 이렇게 네 명이 그림 속에 있다. 그래야 “10전 짜리 두 개”가, 땟국에 절은 손바닥에 놓인 백동전 두 개가, 찬연히 제 빛을 뿜어내게 된다. 내친 김에 「 북치는 소년」도 같이 읽어보자.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시인은 술과 음악과 시 속에서 살았다. 곁말이지만 그는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말년에는 소주에 절어서 살았다고 한다. 요즘도 이런 풍습의 흔적이 시인 동네에는 남아 있다. 꼭 그래야 시가 나오는 것일까? 제자 김진세의 누이에게 반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쓴 백석의 행적은 또 어떻게 봐 주어야 할까? 이 여인은 자야 여사와 다른 사람이다. 대답은 여러분의 몫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