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3.12 | [문화와사람]
당신은 ‘쓸 데 있는’ 사람인가?
김선경 객원기자·JTV 전속작가(2003-12-29 17:02:34)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다. 진돗개 '금이'는 손님이 주눅 안 들 정도로만 컹컹 짖었다. 처마 밑엔 곶감 몇 줄이 흔들거리고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띠리리리링, 풍경소리가 청아하다. 댓돌 옆에 흩어진 신발들과 반쯤 열린 문. 금방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아 한참을 서성거려도 끝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눌렀다. 집에서 오십 미터만 내려오면 밭이 있단다. 밭으로 오라는 것이다. 헐렁한 작업복에 푸른색 모자를 쓰고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 저 이가 농부 전희식(46)씨다. 이거 어쩌죠? 오전에는 이 일을 다 끝내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놀림은 전혀 바쁠 게 없다. 인터뷰를 하고 싶으면 기다리든지, 기다리기 싫으면 가든지... 당신이야 아쉬울 게 없다는 투다. 나는 농부의 작업에 어색하게 끼어든다. 밭고랑엔 우리 밀 종자가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쇠갈퀴로 흙을 살살 덮어주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다. "사실 직파를 해야 하는데 저 놈의 까치들이 어떻게나 주워먹어 대는지, 하는 수 없이 고랑을 파고 흙을 덮고 있어요. 그래도 저 놈들이 파먹기는 하지만... 허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유쾌하게 웃을 줄 아는 이 사람. 설령 까치가 밀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먹어 버린다 해도 절대 화낼 것 같지 않은 농부다. 직파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요? 달리 물어볼 말도 생각나지 않아 한마디 건네본다. "직파를 하면 이 종자들이 단단한 땅 속으로 뚫고 들어가 수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습니다. 그래야 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 과정을 거쳐서 살아나기 때문에 얼마나 강해지는지 몰라요. 웬만한 병해충에는 끄떡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올해 고추농사도 남들 다 걸리는 탄저병 한번 걸리지 않고 훌륭하게 거뒀다고 자랑이다. 이 농부는 지금 나에게 '생명농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7백평 가까이 되는 밭농사.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 한 점 뿌리지 않고 오로지 거름과 땀과 흙과 바람과 물로만 9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이 사람. 갑자기 또 질문이다. "밀은 원래 입동 전에 파종을 해야 하는데, 왜 제가 입동 지나서 파종을 하는지 알아요?" 당연히 나는 묵묵부답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입동 지나면 날씨가 더 추워지니까 밀 종자가 더 강해지나?'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말한다. "하하하! 그야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요. 좀 바빠서 이 밭에만 씨를 미처 못 뿌렸어요!" 그러고 보니 아랫배미에는 벌써 밀싹이 검지손가락 만큼 파랗게 올라와 있다. 조금 더 자라면 데쳐서 나물로 먹어도 좋고 된장국을 끓여도 좋단다. 숙련된 농사꾼의 손이 몇 차례 오고가자 밀 종자는 흙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 푹신푹신한 왕겨를 덮어주는 작업이 시작된다. 왕겨는 까치가 파먹는 걸 막을 수도 있고 보온효과도 높여준다. 온 밭이 노란 왕겨로 덮였을 때야 나는 농부의 수레를 밀고 황토집으로 돌아왔다. 농기구를 실은 수레는 생각보다 무거워서 양어깨가 뻐근해질 정도였다. '그 정도 힘은 써야 내가 인터뷰 해주지.' 앞서가는 농부의 등이 내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다. 황토집은 그가 손수 지은 집이다. 노동운동, 사회단체, 정당활동을 두루 거친 그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농한 것은 지난 95년. 고향인 함양을 제치고 완주군 소양에 자리잡은 것은 이쪽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지인이 소개해 준 빈집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그 집을 비워줘야 할 처지가 되자 할 수 없이 지은 집이 지금의 황토집이다. 방 2개, 거실겸 주방, 다용도실, 세면실, 다락이 있는 20평 집이다. 그는 이 집이 너무 넓어서 편치 않다고 한다. 밭에 나가면 하루종일 비어있을 방들이 '아깝다.' 소용없는 것들이 놀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이 사람. 어쨌든 그는 황토집 잘 짓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집짓기 강의도 나가고 생태텃밭 가꾸는 일에도 전문가급이다. '전주귀농학교 총동문회장'이라는 이력은 농부인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그 외의 타이틀은 도무지 이이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노동운동 이론가였고, 사회활동가였고, 명상기공 수련가이고, 인터넷 사업체 사장이고, 인터넷 신문 기자이고, 글을 쓰는 저술가이고...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최근에 그는『아궁이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역사넷)라는 책을 펴내서 신문과 방송에 연일 오르내린 적이 있다. 한 줄로 꿰기 힘든 이력을 받아들고 난감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귀신사 용타스님이 제 성격 테스트를 해보더니 저더러 '통합형 인격'이라고 말하면서 놀라더라구요. 논리적인가 하면 감성적이고, 분석적인가 하면 통합적이고, 배타적인가 하면 수용적이고... 보통 사람은 이게 아니면 저것인데, 저는 이것과 저것의 한가운데 있다고, 참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하데요. 저 스스로도 그런 것 같아요. 저는 필요에 의해 컴퓨터도 배우고 사회단체 일도 하고 기공수련도 하고 농사도 짓습니다. 그런 것들은 내 안에서 서로 보족적 관계이기 때문에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좀 헷갈릴지 모르겠지만... 하하!" 사람들 골탕먹이고 즐겁다는 투다. 나도 다른 것은 몰라도 인터넷 사업은 영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노동운동 이론가였다는 걸 알고 의문이 풀렸다. 그는 익명의 이론가였다. 늘 타자기를 붙들고 살았다. 유인물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궁이불...』이 첫 저서인 줄 알지만, 이미 그는 노동운동 이론서를 한 권 저술했고, 『컴퓨터를 배워야 할 텐데...』라는 제목의 컴퓨터 입문서도 펴낸 적이 있다. 타자기에 비하면 가히 혁명이라 일컬을 만한 컴퓨터가 보급되자 그는 거금을 들여 컴퓨터를 구입했고 그때부터 컴퓨터에 '빠삭한' 이론가가 됐다. 무엇이든 원리부터 따지고 드는 그에게 컴퓨터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귀농을 한 이후에는 정보의 공유가 더욱 절실해졌기에 인터넷은 그의 꿈을 펼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한 가지 타이틀로 자신이 불리는 걸 내켜하지 않는다. "그 한가지 것이 사람을 규정지어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유명세를 타면서 마을사람들이 걱정이다. 그저 '농사꾼 히시기'로만 알고 있던 동네 분들이 노동운동가네 기공수련가네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그것도 엄살인 것 같다. 이미 그는 마음 속에 다른 집을 짓고 있다. "한 곳에 십 년을 산다면 너무 많이 산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긴장이 풀어지고 처음의 목적과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세 번째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인생이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이었다면 두 번째 인생은 귀농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인생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애써 집까지 지었으니 여기에 눌러 살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농사가 끝이 아니었나요? 그럼 어떤 삶을 원하고 계시는지요? "보다 근본적인 삶에 다가서려고 해요. 지금도 너무나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어요. 이 집도 너무 크지요. 덜 소비하고 '쓸 데 없는 것이 없는' 삶. 모든 것이 다 소용 닿는 그런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게조차 "당신은 쓸 데 있는가?"를 묻는 이 사람. 나는 그와의 인터뷰가 '쓸 데 없는' 것이 될까봐 두렵다. 나의 속을 읽었는지 그가 말한다. 가실 때는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가라고. 참치호박된장찌개에 점심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인터뷰를 끝내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농부 전희식은 오늘의 인터뷰보다 나의 설거지가 더 '쓸 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