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문화시평]
시골 다방에서 벌이는 속고 속이는 반전
류경호 | 1962년 전북 완주 출생. 조선대를 졸업하고 극단 황토를 거쳐 현재 창작극회 (2003-12-29 16:58:26)
블루스는 예전의 인간성이 무시된 노예시대에 비해 개인적인 생활을 인정받게 된 흑인들의 솔직 담백한 감정 표현의 하나다. 블루스에는 비통한 심정을 나타낸 노래가 많으나, 그 가운데서도 기쁨을 표현한 것도 있다. 이번에 전주시립극단에서 발표한 <꽃다방 블루>는 이러한 연유에서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의 애환을 위트와 행복한 반전을 동원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한 공연으로 평가된다.
<꽃다방 블루스>라는 제목을 보면 청춘남녀의 연애지사나 인심 후한 벽지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여러 사람들의 사랑방을 연상케 하는 '꽃다방'과, 여기에 '블루스'를 붙여 시골사람들의 애환과 정담을 음악적 용어에 결부시켜 척박하게 살아가는 농심과 착한 것은 승리하고 악한 것은 실패한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을 시간의 흐름과 결부시켜 정리한 '코믹물'이다. 여기에 늘 속고만 살아온 엄니의 기지가 돋보이기는 하지만 훤히 알만한 짓거리로 없는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사기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가 이 작품의 볼거리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대는 그야말로 7∼80년대를 상징하는 뮤직박스에 테이블이 세 개 그리고 카운터와 빨간색 전화기, 벽에 걸린 야한 그림의 캘린더가 전부이다시피 특별한 장식은 없다. 여기에 동리 한 귀퉁이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장양이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안대를 하고 출근을 하고 춘자는 아침 청소를 하다 언니뻘인 장양에게 대들며 한바탕 시비가 붙는다. 그러나 이내 화해하며 평상을 되찾지만 사람의 '살이'라는 것이 그렇듯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던가? 장양의 전화는 모든 것이 해프닝처럼 보이고 속없이 넉넉한 우리의 누이를 연상케 한다. 저녁내 싸움으로 눈두덩이가 멍이 들어도 다음날 전화 한 통화에 눈 녹듯이 앙금이 사라지는 것에서 푸근한 정서를 보이는 것이다. 이어지는 엄니와 준석의 맞선에 농촌총각 장가보내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가 하는 시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농촌총각 장가가기가 문제인가 하면 구태의연하달 수도 있겠지만 농촌엔 여전하게 문제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인 것을 어쩌랴. 늘 속고만 살아온 엄니지만 이번만은 그래도 잘난 색시하나 맞이하는가 싶어 장농에 싸둔 거금 2백 만원을 지참하고 선을 보러 나왔지만 정작 이번에도 결혼 사기꾼을 만난 것은 돌고 도는 우리 인생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하다. 춘자는 내심 준석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연자와 선을 보는 자리에 심기가 불편하다. 마침 차 배달 주문에서 다시 만난 동삼은 다름 아닌 준석엄니를 사기친 장본인이다. 동삼은 돈 자랑을 한답시고 춘자를 꼬이지만 춘자는 그 돈을 가지고 터미널로 줄행랑을 친다. 여러 갈등 속에서도 춘자는 사기범이라면서 경찰에 신고하여 동삼은 잡혀오는데 꽃다방에서 재연되는 덕구의 속임은 발각된다.
수많은 인간 군상을 대표하여 결혼을 빙자하는 사기꾼 동삼, 그리고 그의 공범이자 애인인 연자는 이번 사기 결혼을 통하여 한 밑천 잡아보려 또 다른 속임을 준비하고, 건달이자 읍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양의 남편 광수는 나이든 단골 고객 박사장이 장양의 손금을 보아주겠다며 손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성희롱을 했다며 우격다짐 끝에 경찰에 신고하겠다니 박사장은 숨겨둔 수표 한 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그 역시 위조수표인 것을 어찌하랴. 항상 사기꾼들에게 피해만 당하여 이제 복수의 방법으로 스스로 선택한 결혼빙자 사기꾼 덕구 역시 지루할 만 할 때 등장하여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역시 어설픈 사기꾼에게는 시작부터 우연이라는 방법으로 일이 꼬여 발각되고 마는 것이니 바로 연극적 타이밍이라는 것인가. 마침 연자를 꼬득이는 덕구는 경찰에 잡혀온 동삼을 만나는 바람에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준석과 엄니의 대질심문에서 죄상이 드러나지만 춘자의 절도죄에 대한 엄니의 반증이 작가적으로 계산된 반전이 되어 극은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짓는다. 속고만 살안 온 엄니는 돈 다발의 앞뒤에 만 원짜리 한 장씩만을 묵고 백지를 돈으로 속여서 건네었던 것이다.
꼭 일이 성사되려면 우연이라는 것이 찾아와 일을 망치는 모습은 관객을 웃음으로 이끌지만 못내 서운한 점이 바로 우연에 기댄 개연성의 부족이다. 물론 희곡이 갖고 있는 하루 동안의 일기는 적재적소에 사건을 배치하여 공연의 흐름을 규정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극의 반전을 통하여 끌어안고 있던 문제는 어떻게 해결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덕구와 동삼의 우연한 만남으로 결말은 그렇게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가 매듭지어진다. 또 엄니의 기지가 보이는 돈 다발은 녹녹한 시골할머니가 아니라는 것과 춘자의 절도죄를 면하게 하는 흐뭇한 결말로 다가온다. 희곡이 갖는 독특한 구성 외에 몇 가지 연출적 기법을 동원한 부분이 눈에 띈다. 춘자의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를 노래로 표현한 것은 극중의 변화를 모색한 것 같고 박사장의 위조수표는 한 사건에 대한 인물의 마무리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도 사투리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 전북의 지역정서도 대변할 겸해서 어느 정도 사투리를 조정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도사투리를 지역적으로 어디까지 규정할 것인가는 숙제로 남지만 전라도 사투리가 전남북의 지역을 아우른다면 적절한 윤색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잘 사용되지 않는 언어의 발굴이 주된 목표였다면 모를까 <꽃다방블루스>는 내용과 현실에서 남도의 한 벽촌에서 사용되는 말의 정서가 우리 정서와 부합하면서도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불렀다. 마치 서울에서는 지역색의 특색을 잘 갖춘 공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여기 전주에서는 창작극 속의 번역극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모처럼 시립극단의 위상과 걸맞게 관객들에게 떡과 막걸리를 나눠주며 신선한 웃음과 어렵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다가선 부담 없는 연극이 되었다.
그러나 지역연극이 고급문화에 밀려 절박한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야 할 일이다. 상임연출의 부재로 서울에서 '잘 나가는' 젊은 연출가를 초빙하고 서울에서 흥행한 편안한 작품이 전주 시민에게는 '잘 만들어진' 연극으로 반영되었다고 보기엔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일단 한번 검증된 작품이라 해서 편안하게 무대화한다는 것은 '쉽게' 만들어진 연극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