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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 [문화시평]
낯설게 보기… 평범한 일상의 비현실적 묘사
강성은 | 미술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인사미술공간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2003-12-29 16:56:38)
갑작스런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이일순의 개인전을 하는 서신 갤러리를 찾았다. 크지 않은 규모의 갤러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전반적으로 휑한 느낌이 들었으며, 담담하게 그려 나갔을 법한 그림들은 작가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녀가 그림을 통해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기술에 발맞추어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 등의 기기를 이용한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 속에서 회화라는 장르를 고집하는 작가들은 많지 않다. 그 중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어법을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일순은 첨단 매체에 현혹되지 않고 꾸준히 회화작업을 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작가로 분류해도 좋을 만 했다. 또한 이일순은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명제 아래 사회현상을 반영하거나 어줍잖게 비판하지 않는다. 이일순은 그림을 통하여 애정어린 눈으로 자기 자신과 그 주변을 둘러보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어떤 어법을 가지고 그녀가 자기자신과 그 주변을 보여주고 있을까? 이일순은 그림에 그리 많은 것들을 그려 넣지 않는다. 어슴푸레한 배경에 달랑 연기 나는 굴뚝 하나, 혹은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홀로 서 있는 텅 빈 의자가 그렇듯 대부분의 그림에는 최소한의 형태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묘사된 두 세개 정도의 사물이 아주 간단한 붓질로 메꿔진 캔버스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화면의 여백 때문인지 이일순의 그림은 어딘지 초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작가 이일순이 그리는 대상들은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다.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연기 나는 굴뚝은 작업으로 밤을 세운 새벽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이었으며, 아파트 단지는 작가가 살고 있는 중소도시의 한 풍경이다. 그러니까 이일순의 작업의 소재는 바로 작가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다. 그럼 이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낯설고 현실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일순은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을 따로 떼어 낸다. 혹은 전혀 상관없는 것들과 나란히 놓아 어울리지 않는 구도를 만든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묘한 이중성을 띠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낯설게 하는 기법은 일상생활에서 그저 무의미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보아 넘기던 것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놔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낯선 것을 보면 신기하게 생각하고 이리 저리 살펴보게 되나, 낯익은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낯선 것은 주의를 집중시키고 낯익은 것은 관습적인 지각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아무 생각 없이 보아왔던 굴뚝, 나무, 의자 등은 작가가 의도에 의해 낯선 모습을 하게 되며 관습적인 지각이 아닌 호기심 어린 시선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일상 속의 사물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킨다.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는 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린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장식장에 거꾸로 처박혀서 아무도 꺼내 주지 않는 딸아이의 흥미를 잃어버린 인형을 보고 작가는 자기 자신과 동일화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무도 손 내밀어 주거나 나의 상황을 살펴주지 않는 상태, 어쩜 그것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그녀의 작품에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는 무엇과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을 찾아내고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 찾아 나가고 있었다. 이일순은 모든 것이 빠르게 빠르게 진행되고 속도가 경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주변을 살피고 잃어버렸거나, 혹은 놓치고 간 것들을 재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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