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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 [특집]
다시, 대중 속으로, 해설이 있는 판소리 100회를 넘기며
곽병창 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2003-12-29 16:45:18)
판소리, 지금 여기- 예향 전북의 자긍심을 지탱해 온 가장 큰 기둥이 바로 판소리이다. 유네스코가 판소리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한 것은 당대의 모든 소리꾼들과, 지금도 이름 모를 야산 언덕배기의 소리구멍을 통해서 절창을 흘리우고 있을 저 소리꾼 조상들과 더불어 마음껏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판소리가 우리 지역의 어느 구석에 누구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느냐를 물으면 답변은 금새 궁색해진다. 우리 지역 주민들 가운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짓으로나마 그 장단을 따를 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사설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경탄할 안목을 가진 이는 과연 얼마인가? 그 곰삭은 소리의 오르내림, 꺾이고 휘어지다가 떨어대는 ‘타루’의 현란함에 몸서리쳐 본 이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묻기조차 정작 쑥스러운 게 지금 여기 예향이 자랑하는 판소리의 현실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중층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판소리가 무대공연물화한 탓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판소리는 무대 위에 올라서기 시작했으며, 관객은 저만큼 아래의 어느 자리에, 때로는 컴컴한 암흑 가운데 편안하게 앉아서 소리꾼을 그윽히 감상하는 포즈에 익숙해져 왔다. 그나마도 일반대중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소리꾼들을 볼 수 있는 기회란 축제가 열리는 현장의 가설무대이거나 아니면 이른바 완창발표회 등을 포함한 개인 발표회 자리가 전부인 상황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화려한 의상과 조명 장식을 곁들인, 그나마도 열 중 아홉은 황급히 채널을 돌리는 텔레비전의 국악프로그램에서였다. 이 기이한 현상, 아무도 판소리를 제대로 된 상업적 공연물의 재료(material)로 보지 않지만, 공연 이외의 상황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어려운 이런 현상이 오늘 판소리의 현실인 것이다. 대중들로부터는 아스라이 멀어져 가면서도 경연대회 자리에서는 이른바 패밀리의 사활을 걸고 불꽃을 튀기던 그 형국이, 지금, 여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이건 바람인가, 수사인가?) 모습이다. 흘러온 길 100년쯤-. 그리고 양날의 칼에 대하여-. 돌이켜보면, 흩어져 있던 구한말의 소리꾼, 재인, 광대들을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축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불러 모으던 그 때로부터 판소리의 근대화는 시동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유랑소리꾼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아 일제히 동원되어 나온 이 시간은 기실 이후의 역사에 의미심장한 전조가 될 만하다. 역설적으로, 나라가 이렇게 불러 모은 천하의 명창들에게, 나라는 아무런 대안도 혜택도 줄 수 없었다.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그 때 모였던 이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신파극, 신극 등의 문화적 충격에 대한 응전 전략으로 이른바 ‘입체창’을 거쳐 창극이라는 전대미문의 형식을 창출해 내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이후에도 판소리와 창극은 이른바 저자에서의 생존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왕성한 현장예술로서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발전해왔다. 어떤 이는 창극이 판소리를 ‘베려 놨다’고 하고, 어떤 이는 판소리를 한 단계 진일보해 낸 공을 들기도 하나, 우리 같은 비가비에게야 그 암담한 식민지 근대화의 시기를 그야말로 맨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 생명력 자체가 두루 다 경탄할 만한 용틀임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고도 오히려 식민지의 끝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물가물해지려던 판소리의 면모를 또 다시 일신한 것도 또 다시 나라였으니, 판소리와 창극의 부침은 허풍 좀 섞어 말하자면 나라 맘먹기에 달려 있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60년대 들어 출범한 국립창극단(첫 이름은 국립국극단이었다)과 그 이후에 8-90년대를 지나며 앞 다투어 출범한 각지의 관립국악단들, 역시 비슷한 시기를 거치며 정착한 문화재제도, 그리고 각종 경연대회 등에 힘입어서 판소리/창극은 비약적인 전기를 맞는다. 이 비약적 전기가, 과연 구한말 이전 전주가 대사습으로 철마다 들썩이던 때의 활력이나 2-30년대의 찬란한 전성기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는 판소리의 오늘을 진단하고 앞날을 가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전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하나로 묶으면 결국 관의 개입과 지원이라는 양날의 칼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양날의 칼이란 곧 이런 의미이다. 이 세 축의 지원정책이 없었더라면 판소리/창극은 궤멸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칼은 분명 利器이다. 반면에 구한말이나 2-30년대의 왕성한 현장 적응력을 좀처럼 되살리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소리 없이 강하게 그 기반을 잠식해 온 凶器일 수 있다. 이 양면성이 곧 오늘 여기에서의 판소리를 규정하고 있는 원인인 셈이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거의 모든 소리꾼들은 관립단체에 몸담고 있거나 관이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여러 형태의 경연대회, 축제 등의 형식을 통해서 그 생존을 이어간다.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은 전공자의 길을 접거나 후진 양성을 통해 그 자존심과 현실적 경제를 지탱해 나간다. 물론 극소수의 몇몇은 이 모든 과정과 형식들을 두루 망라하여 가히 귀족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판소리가 대중과 호흡하며 청중의 추임새와 더불어 그 애환을 나눠 온 토속성악예술로서의 장점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왕성한 상호 의사소통의 와중에서만 고도의 예술적 쾌감이 소름처럼 뻗쳐오르던 그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되살릴 수 있는가? 해설이 있는 판소리의 시작은 그런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눈높이를 맞추자 - 해설 판소리 100회,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판소리 공연장을 채워주었던 노년층은 큰 걱정이 아니었으나, 무엇보다도 당대의 중장년층 청중들, 잠재적 귀명창들인 청년층의 발걸음을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니 가장 먼저, 어렵다는 하소연들을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길고 지루하다는 선입견도 불식하기 위해서 사이사이에 해설을 곁들였다. 자막을 주석까지 동원해서 꼼꼼하게 제시하는 것은 순전히 최동현 교수의 노고이다. 자리를 무대로부터 대청으로 옮기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듣도록 한 것은 소리꾼과 청중 사이의 장벽(the forth wall)을 걷어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다리, 허리가 아프다며 몸을 뒤채던 대학생들이나, 자막만 쳐다보고 꽃단장한 자신을 안 쳐다본다며 푸념하던 소리꾼이나, 이제는 너무 일찍 끝나는 걸 아쉬워한다. 낯선 외국인들까지 덩달아 'ALL-C-KU'하고 끼어들 때면 소리꾼도 스탭도 살맛이 났다. 이제 백 회를 넘겼으니, '무대가 너무 셔’하며 손사래를 치던 소리꾼들까지 다 포함해서 이 나라에서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두 번 이상 다녀가야 이백 회를 맞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은 멀다. 대중으로부터 살 길을 찾아내는 것이 다시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 누구나 세계화를 부르짖는 만큼, 진정으로 들고 나갈 상품이 되려면, 사설의 번역이나 공연 형식의 다변화 등을 포함한 각고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소리꾼들과 기획자들, 연구자들, 지도자들의 눈높이가 관으로부터 대중에게로 내려올 때에만 가능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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