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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 [특집]
책으로 만나는 판소리, 읽는 만큼 들린다
최기우 전북일보 기자·교육문화부(2003-12-29 16:42:56)
“나라마다 비슷한 형태의 전통음악이 있지만 판소리처럼 보존이 잘된 음악은 없다. 그러나 음반이나 관련 서적이 턱없이 부족해 아쉽다” 지난 7월 한국을 방문한 음악인류학 연구자 키스 하워드 교수(47·런던대학)가 지적한 판소리의 현실이다. 한국 전통음악의 권위자로 한국 사람들보다 한국 음악을 더 잘 아는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도 밝혀지지 않은 채 수 백년 동안 전승돼온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문학인 판소리는 민요·민담·가면극·인형극 등 조선시대 다른 민중예술과 달리 문자로 정착,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현재 인터넷 서점을 통해 검색되는 '판소리' 관련서적은 50여종. 이중 절반쯤은 절판된 상태여서 실제로 나와있는 판소리 관련 책의 수는 훨씬 적다. 일반인들의 관심이 부족한데다 학술적 연구 내용이 중심인 판소리 책을 찾는 층도 워낙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보면 판소리 연구서로서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추임새 하듯’ 쉽게 책장을 넘기며 판소리를 접할 수 있는 책이 적지 않다. 일반 독자들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문학동네·문학과지성사·창비 등 주류 출판사의 참여가 이어지면서 출판계의 변화도 예고된다. 판소리 연구서이면서도 논문 모음집 수준을 넘어서는 책도 많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중심으로 더늠·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관련 개념들을 쉽게 설명한 『판소리의 세계』(판소리학회 편·문학과지성사)는 충실한 개설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전라문화연구소의 『판소리단가』도 판소리에 대한 보다 쫀쫀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책. 『판소리의 전승과 연행자』(최혜진·역락)는 유성기 음반 사설과 20세기 여성 명창의 활약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다. 지난 달 전라북도가 펴낸 『전북의 판소리』(㈔마당) 역시 판소리의 미학적 가치를 바탕으로 전북지역 판소리의 발생과 전승, 역사적 의의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판소리의 변화와 전망까지 판소리의 모든 것을 담아낸 충실한 이론서이자 현장 실습서다. 여타의 사족을 깨끗이 배제하고 오롯이 ‘전북’과 ‘판소리’에 집중한 기획이 돋보인다. 이들 모두 전문성과 필진의 글 맛이 적절하게 융화돼 읽는 재미와 소장할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다. 실기와 이론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판소리를 익힐 수 있는 과정을 소개한 『생활 판소리 교실』(이용수·유림)은 판소리 서른 대목을 엄선해 해설을 덧붙인 점이 이채롭다. 곰삭은 문체로 한반도 땅 구석구석에 담긴 소리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연합뉴스 전성옥 기자의 『판소리 기행』(㈔마당)은 너른 들녘에서 나오는 넉넉함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판소리 필독서로 꼽힌다. 현재 발행된 판소리 관련 책의 저자는 대부분 국문학 연구자들. 그 중에서도 군산대 최동현 교수를 필두로 천이두(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이기우 (전 전북대교수) 정양(우석대교수) 김익두(전북대교수) 임명진(전북대교수) 등 이 지역 연구자들의 저술활동은 단연 돋보인다. 가람 이병기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판소리 연구는 국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주도돼 문학적 접근이 많지만, 최근에는 음악·연극 등 공연예술 영역으로 확장되고있는 추세. 최근에 발간된 『판소리, 그 지고의 신체 전략』(김익두·평민사)은 공연예술로서 특성과 가능성을 밝혀낸 대표적인 예다. 판소리의 희곡적 특성을 탐색한 『판소리창본의 희극정신과 극적 아이러니』(홍순일·박이정출판사), 시인(詩人)의 감성으로 소리꾼의 더늠을 쫓은 『판소리 더늠의 시학』(정양·문학동네) 등 창조적 비평서들이 늘고 있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특히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판소리와 풍속화의 공유지점을 탐구한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 세계』(김현주·효형출판)는 판소리는 시각적 감각체계를 풍속화에서 빌려왔고, 풍속화는 삶의 생생한 역동성과 율동적 구성을 판소리로부터 배웠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복간(復刊)이 그리운 책도 많다. 토끼전의 서민의식과 풍속성을 인상적인 기술한 『판소리의 이해』(조동일 편·창비), 소리꾼 19명의 흔적을 쫓은 『판소리 답사기행』(이규섭·민예원), 사설을 세밀하게 기록한 『한국의 판소리』(정병욱·집문당), 사설 연구를 한층 더 총체화시킨 『판소리 사설 연구』(설중환·국학자료원), 1996년 당시 전북지역의 판소리 연구 동향이 엿보이는 『판소리의 세계』(천이두 외·한국문화사), 전북대 국어문학회에서 펴낸 『판소리와 국어국문학』(한국문화사) 등이다. 판소리해설가 최동현 교수의 『판소리 이야기』(작가)는 판소리 CD를 함께 엮어 2년전 복간된 이후 일반독자들의 손길이 잦아지고 있다. 판소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판소리에 대해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답답해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안 들리던 판소리 사설이 들리거나 추임새 한 자락이 금새 쏟아 질리는 없지만, 읽는 만큼 알게된 만큼 들리고 보일 것은 확실하다. 판소리가 있는 소설과 산문 '이 때가 어느 땐고? …. 입이 있어 말하는 짐승들이라면 서로 이르되, '대도무문(大盜無問)'의 시대라. 성군(聖君)이 나라를 열어 언필칭 연호(年號)를 선포하는 경우가 더러 있으나 대도무문이야 어디 연호의 발꾸락 때만큼이라도 가당헐쏘냐?’(21세기문학 2002년 봄호, 이병천의 「반달곰뎐」 시작부분) 이병천의 「반달곰뎐」은 판소리문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중편소설이다. 구어와 문어가 어우러지며 판소리 가락을 타듯 소리와 의미가 서로를 당기고 풀면서 깊은 사유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특유의 문장은 독자에게 잠시도 긴장의 이완을 허락하지 않는다. 최인석의 『방디기전』(민중)과 김지하의 『문학타령』(창작과비평사)도 마찬가지. 소설가 문순태는 전남 광양 백운산 아래 한 농사꾼이 전라도 사투리로만 쓴 『오지게 사는 촌놈』(서재환·전라도닷컴)을 읽고 “꿈틀거리면서 뻗어 가는 사투리의 말 줄기가 우줄우줄 춤추는 것이 꼭 판소리 한 대목을 듣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설이나 산문에서도 책을 읽으면 절로 운율이 붙어 판소리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은 작품들이 많다. 민중의 애환을 풍성한 입말로 대변해 온 소설가 이문구도 질박한 토속어를 유려하게 구사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것으로 유명하다. 긴 문장이지만, 판소리 사설이 연상되는 끈끈하고 유장한 문체는 흥겨운 리듬과 절묘한 호흡으로 입에 착착 달라붙어 맛깔스럽다. 완주출신 소설가 유영국도 근대 민중들의 한 많은 삶을 판소리의 사설가락으로 걸쭉하게 우려낸 첫 장편‘만월까지’를 통해 문장마다 판소리 가락이 농울 지는 듯, 밀도 높은 언어미학을 보여줬다. 소리꾼 모흥갑 등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역사와 삶을 오롯이 되살린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푸른 역사)과 영화 <서편제>의 구성진 가락이 더해져 우리를 슬프게 했던 이청준의 단편 「선학동 나그네」(열림원)는 소리꾼의 족적을 쫓았다. 문화유산답사를 소재로 한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창작과 비평사) 『답사여행의 길잡이』(한국문화유산답사회 편·돌베개) 『내가 읽은 책과 세상』(김훈·푸른숲) 등에서도 판소리의 흔적이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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