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특집]
물과 나무처럼 생활 속에 숨쉬게 해야 한다
최동현 | 전북대 국어교육과와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군산대 국문과 교수로 (2003-12-29 16:30:04)
지난 11월 7일 판소리가 유네스코에서 선언하는 '인류 구전 무형 유산 걸작'(원래 명칭은 'Proclamation of 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이다.)에 선정되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매스컴에서는 연일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자치단체에서도 이런저런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좋은 일이다. 어찌 되었건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인류 구전 무형 유산 걸작'에 선정되면 유네스코에서 판소리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할 것을 기대하거나, 정부에서 판소리를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해 당장에 소리꾼들의 생활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이제 판소리가 세계로 나아가 많은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다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이제 유네스코로부터 지원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지원을 해야 하는 나라이다. 정부에서 판소리를 위해 많은 돈을 투입하려고 해도 금방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부문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 판소리를 가지고 나아가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벌어오는 일도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갖는 이러한 성급한 기대는 다 판소리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지만, 애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찬찬히 그 의미를 한 번 따져보도록 하자.
이 선언은 인류 구전 무형 유산의 중요성에 비추어 사라져 가는 구전 무형 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각 국가나 비정부단체, 지역사회 등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것이다. 유네스코가 나서서 이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유네스코가 중요한 유산으로 선언하고, 우리가 이를 잘 보호, 육성하는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들의 노력을 촉구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보면 된다. 무슨 혜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 선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선 이 목록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영광스런 일이다. 인류 문화 유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인류 구전 무형 유산 걸작'에 선정되어 얻는 효과는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해야만 하는 일이다.
도대체 구전 무형 유산은 왜 중요한가? 유네스코에서는 구전 무형 문화 유산을 "각 민족의 문화적 특성을 존속시키는 집단적 기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도대체 집단적 기억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민족의 '역사'이다. 역사는 삶의 축적이다. 따라서 구전 무형 유산은 민족의 삶의 축적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각 민족의 문화적 특성을 존속시키는" 것이다. 축적된 역사적 삶이 없다면 우리는 민족 특성을 유지할 수 없다. 민족의 특성을 유지할 수 없다면, 국가 또한 유지하기 힘들다. 민족적 특성을 상실한 민족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여진족, 거란족, 돌궐 등등 중국의 북방에서 사라져간 민족이 그 얼마인가? 판소리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뛰어난 걸작이라면, 바로 이러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우리의 걸작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어찌 소중하지 않은가? 물론 이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너무나 민족적인 특성이 강해서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기도 힘들다. 남의 민족의 집단적 기억을 다른 민족이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 나무, 갯벌, 하늘을 나는 새, 땅에 사는 곤충, 숲 속의 짐승, 물속의 물고기 등이 다 그런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그냥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 판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우선은 판소리가 죽지 않고 우리 사회 속에 그냥 잘 있으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민족적 특성을,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원천적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판소리가 우리나라에서조차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판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니 판소리를 듣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을 리 없다. 학교 교육에서도 소외되어 있다. 배운다는 게 그저 판소리 명창 이름이나 판소리 용어 몇몇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가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판소리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유산이다. 이에 동의한다면 판소리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다음에 판소리로 돈을 벌 수도 있고, 외국에 선전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판소리의 대중화'이다. 세계화는 그 다음 문제이다.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판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장단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어려운 말을 보다 쉬운 말로 고치기도 하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설을 알려주기도 해야 한다. 또 전문가가 나서 해설을 곁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특강이나 특별 교육을 실시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판소리와 판소리 사설에 쉽게 접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전주전통문화센터의 '해설이 있는 판소리'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태도이다. 판소리에 대한 애정만 있다면, 판소리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 서양의 오페라가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워 성행하는가. 교양인이라면 오페라를 알아야 하고,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공연장을 찾아다니고, 공부해서 겨우겨우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 아닌가? 오페라가 어렵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변명은 오히려 자신의 교양의 천박함만을 드러낸다는 의식과 풍토 때문에 오페라는 유지되는 것이다. 판소리에 관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판소리를 모르면 무식한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판소리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고 좋아할 수 없다는 변명이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인간과 관계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사랑 속에서만 자랄 수 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다. 자기 희생 없이는 무엇 하나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화분에 있는 작은 화초 하나 가꾸기 위해서도 시간을 쪼개어 돌보는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전주전통문화센터의 '해설이 있는 판소리'는 이런 점에서도 모범적인 예에 속한다. 수익을 생각하지 않는 무모한(?) 공연, 출연료에 연연하지 않는 출연자, 정성을 다하는 해설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소리라면 다른 일은 다 내팽개칠 수 있다는 결의로 충만한 청중들이 이룩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1월은 대개 우울하고 음침한 달이다. 그런데 올 11월은 모처럼 밝다. 판소리가 유네스코의 인류 구전 무형 유산 걸작에 등록이 되고, '해설이 있는 판소리'도 100회를 넘겨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