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 [문화칼럼]
‘공간’을 상실한 문화
박명규 |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2003-12-29 16:12:56)
새해를 맞을 때면 늘 감당하기 어려운 결심을 해놓고 연말이 되면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에 스스로 민망해지는 경험을 너나 없이 종종 한다. 올해는 그런 우를 피할 요량으로 큰 욕심 없이 새해를 시작했는데 지난 2학기 새로 작심하고 시작한 '문화사회학' 강의 때문에 연말을 맞는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새로운 과목을, 그것도 마땅한 교과서도 있기 어려운 과목을 선뜻 해보려던 당시의 결심이 과욕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강의 초반에는 자신만만했다. 문화에 대한 최근 논의들도 살펴보고 내가 겪었던 여러 가지 사례들도 강의에 써먹으려 준비했다. 활발하게 토론도 하고 때론 격론도 벌이면서 재미있게 진행될 강의를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강의를 해갈수록 무언가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론적인 논의가 아닌, 주변에서 경험하는 사례를 이야기하는데도 예상과는 다른 서먹한 느낌 때문에 강의가 영 힘이 든다. 그러니 강의 끝에는 늘 씁쓸한 느낌이 몰려온다.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같이 학생들과 진솔하게 오가는 대화를 생각해온 나로서는 모처럼 작심하고 시작한 강의에서 화선지는커녕 비닐코팅이 된 종이 위에 애써 붓글씨를 써대려는 느낌을 갖는다.
이런 나의 곤혹스러움을 들은 집사람이 정색을 하고 "그런 강의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애초 무리"라고 못을 박는다. 딸아이 역시 제 엄마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게임도 영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기들 좋아하는 연예인 소식에도 무관심한 채 골치 아픈 책만 주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문화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음이 분명했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그대로 수긍하기에는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문화를 대중문화 중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노래도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고 옛날 전통에 대해서도 꽤 관심이 있는 나의 문화적 소양(?)이 이렇게 무시당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문화라는 것은 다양하고 나도 꽤 문화에 대해 아는 게 많다"고 강변했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풀릴 리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1월호 ‘문화저널’은 이런 내게 위안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등장한 표지에서부터 그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번 문화저널은 내게 평안한 문화, 문화의 일상성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결코 만만찮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신 없이 바뀌는 젊은 세대의 감각, 튀는 용어들, 유행과 상술이 결합되어 나날이 기승을 부리는 소비문화의 현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일상의 삶 속에 자리잡은 문화를 고즈넉하게 맛보게 하는 이 분위기야말로 내가 문화라는 내용 속에 담아 강의하고 싶었던 것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뻤다. 동시에 이런 분위기를 중심으로 문화를 가르치고 토론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강의가 힘들어질수록 내게 이 질문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한가지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문화의 공간성에 관한 것이다. ‘문화저널’은 전북이라는 지역, 삶의 현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내 강의는 아무런 공간적 함의를 갖지 못한 것이라는 데 내 생각이 가 닿았다. 나의 강의는 문화의 다양한 면모와 특성들을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인 장소성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학생들과의 교감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대간의 차이나 갈등이 아무리 커도 그런 상호작용이 벌어지는 현장에 뿌리를 내리면 소통이 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문화가 작동하는 삶의 공간에 대한 관심을 이번 강의에서 소홀히 하고 있었다.
물론 강의에서 공간성이 드러나기 어려웠던 것이 꼭 내 탓만은 아니다.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는 공통의 공간감각을 갖기에 너무 크고 실제로 공유할만한 문화적 상징도 약하다. 게다가 오늘의 젊은 세대는 탈공간화를 지향한다.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희구하고 '유목적' 인 삶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세대에게 특정한 장소성에 바탕한 문화이야기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조차 한다. 실제로 문화의 공간성이 지나쳐 배타적인 지역주의나 민족주의의 덫에 빠질 경우는 폐해가 적지 않다. 오늘날 문화연구가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공간성에 대한 거부감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고정된 경계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공간도 넘나들 수 있다고 믿는 디지털 세대에게 변함없는 것, 일상적인 것, 지긋한 것의 묘미를 권유하기는 쉽지 않다.
평생 전북지방의 사회사 연구에 헌신하다 얼마 전 타계하신 고 송준호 교수는 전통적인 유림문화가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도시화로 인해 삶의 공간성이 변화한 데서 찾으려 했다. 오늘날 세계화와 정보화는 우리에게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더욱 부추기고 떠다니는 삶, 매이지 않는 생활을 더 바람직한 것으로 강조한다. 여전히 전통적인 터전과 문화가 강하게 존속하고 있는 일본에 비해 훨씬 가볍게 옮겨다니는 한국인의 성향을 어떤 학자는 유목적인 특성이라 지칭하고 이것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긍정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탈공간화된 문화는 유연하고 가변적이어서 급변하는 지식정보시대에 적합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변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간성을 상실하면서 삶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잃고 대신 그 자리에 시장논리가 자리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숨길 수 없다. 실제로 전 세계의 문화양식과 내용들이 특정 공간을 뛰어 넘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다양성과 혼종성을 확대시키고 있는 현상 뒤에는 문화적 기호를 상품화하는 시장논리가 또렷하게 자리잡고 있다.
12월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 정권의 출범 당시에는 젊은 세대의 문화감각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해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문화란 공동체의 삶이라는 실체적인 기반을 떠나서는 힘을 갖기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라크 파병논의, 정치권의 이합 집산, 청년실업, 가족해체위기 등으로 부산스럽게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현장, 공동의 공간성에 대한 감각을 다시금 재확인해볼 일이다. 무조건적인 탈주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현장을 향한 발걸음으로, 고립적인 유목화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진 공생의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