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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 石田 黃旭 선생
김은정 ·본지 편집위원 (2003-12-18 10:41:14)
이 시대의 정신적 지주 황금이 정신을 앞지르는 시대, 극과 극만이 인정을 받는 이 시대에서 예술가의 위치는 어쩌면 가장 외롭고 나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각박해지는 세태에서 안일함과 향락이 난무하고, 또 정신과는 담을 쌓아버린 대중들에 있어 예술가들이 줄 수 있는 감동 즉, 정신적인 위안은 이미 물질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작가는 정신이 앞서지 못하는 시대일수록 예술가의 존재는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한 예술가의 치열한 작가정신이나 그의 뜨거운 작업에의 창작열은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고자하는 진정한 구원에의 마지막근원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한 생애를 외롭고 또 참으로 어렵게, 그 숱한 고난과 갈등을 묵묵히 지켜내면서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온 작가와 그가 지나온 자취를 접했을 때 그것은 감동 이상의 정신적 생명감을 불어 일으키게 마련이며 인간의 위대함을 겸허하게 깨닫게 한다. 石田 黃旭선생. 아혼 살의  壽를 누리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淸淨한 인품과 書藝의 至高한 경지를 그토록 깊게 지녀올 수 있었던 정신적인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石田선생의 작품을 대하면서, 또 선생의 생활철학을 들으면서 필자는 오로지 한가지 깨달음에 매달려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위대한 예술가의 진정한 작품세계란 치열한 작가정신이나 예술적 사상관에 앞서 가장 평범한 인생관 자체를 어떻게 꾸려오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澹泊軒”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지난 선비가 거처하는 마루」. 石田선생의 방안엔 오랜 세월을 겹겹이 안고있는 고가구와 古書, 선생의 손때가 묻어난 수많은 붓대, 그리고 선생의 정성으로 잘 가꿔진 蘭과 관음죽들로 꽉 차있다. 은은한 墨香과 더불어 반듯하게 앉아 계신 선생은 지긋이 눈을 내린 채 마땅치 않은 이 시대의 젊은이를 맞으셨다. 누런 빛깔이 세월로 묻어나는 두건을 쓰신선생의옴직임은정정하다못해차라리당당환 기품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을 비워야 허지, 그것이 말허기는 쉽지만 뭇대로는 잘 안되는 법이여.』 書道의 근본을 여쭸더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마다로 쏟아놓으신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너무 값싸게 나도는 이 말이 선생의 말씀으로는 어찌된 일인지 마음 한 귀퉁이를 허탈할 정도로 들어냈다. 石田선생의 독창적인 筆法은 握法이다. 선생의 이 握筆을 두고 이 시대의 書藝人 가장 뛰어나게 개척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경지의 筆法이라고 평을 하지만 정작 선생 스스로는 마음을 비우고 획 하나 하나에 자신의 혼을 실어내려 했을 뿐 그 자체가 예술의 극치인지, 혹은 지고한 서예의 독보적 경지인지에 대해선 지금껏 단 한번도 말씀해보신 적이 없다. 90의 생애동안 오로지 초야에 묻혀 書道 외길만을 이어오신 선생으로선 치열한 작가정신으로서보다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서 붓과 화선지를 대해왔을 뿐 어떤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를 깨쳐 간다든지 하는 생각자체를 선생은 일종의 사치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선생은 겸허하게, 그리고 바르게, 자신의 마음을 가꾸어 오셨던 것이다. 선생이 평생을 지녀온 인생철학은 朝鮮朝 정통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l7대에 걸친 문헌가의 후손으로 英宗시대 실학의 거창으로 많온 업적과 명성을 날린 이제(願齊) 황윤석(黃胤錫)선생의 7대손 이기도한 선생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으로도 이미 선비의 인품을 다져놓은 셈이였다. 본향인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선생이 태어난 것은 l897년, 이웃 고부에서 東學의 불씨가 오른지 삼년이 채못되는 때였다. 그 일대에선 내놓라하는 학자집안의 종가(宗家) 둘째아들로 태어난 石田선생은 여섯 살 때부터 붓을 들고漢字을배우기 시작했으며 한학이외에도 시조와 가야금 둥을 두루 익혀 훗날 書 ·禮 ·樂 ·射 ·御·數의 6禮를 고루 갖출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石田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을 인정받았는데 특히 붓글씨에는 빼어나 中國의 명필 조맹부·안진경, 왕회지, 구양순 등의 글씨를 빠짐없이 섭렵했다. 선생이 늘 강조하는「명필의 서체는 각기 달라도 法은 한가지」라는 사실을 터득한 때문이었다. 열 여섯이 되던 해는 서울의 中央高普에 유학했다가 뜻과 맞지 않아 몇 개월만에 고향을 다시 찾아 漢字에만 몰두했던 石田은 청년시절을 국운의 혼미함 속에서 보내면서 日帝의 침탈에 대한 저항감과 울분을 오로지 붓을 잡는 것으로 풀어냈다. 그러다 경술국치(庚成國恥)에 이르자 금강산으로 은둔해버렸다. 당시 선생이 亡國恨을 풀어낼 길 없어 새벽부터 오로지 매달렸던 일은 붓글씨 뿐 이었다고 들려주셨다. 石田선생은 가슴을 통할 수 있는 벗들과 수많은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爲堂 鄭仁普선생, 芹村 白寬洙선생, 仁村 金性洙선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石田선생의 또 다른 삶은 해방을 맞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열 여섯 되던 해 순창의 盧부자집 맏딸과 혼인했던 石田은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이중 장녀와 막내아들을 제외하곤 아내까지 모두 앞서갔다. 어려서 혹은 다 성장해서 하나둘 이승을 앞서가는 자식들의 죽음 앞에 石田이 해아려야 했던 일은 너무도 많았을 게다. 그래서인지 石田선생의 얼굴엔 좀처럼 웃음이 없다. 시대를 잘못 만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온갖 시련을 겪어낸 石田은 앞서간 자식들과 아내의 죽음보다도 영영 풀어낼 길 없는 깊은 恨을 안고 있다. 그의 가슴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恨은 워낙 깊어서 막내아들인 炳槿씨(전북도립국악원장) 마저도 선뜻 그 이야기를 들춰낼 수가 없다. 石田선생이 해방직후부터 오늘까지 가슴 졸이며 살아야했던 그 큰 아픔은 끝내 바로서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큰아들 炳善씨에 대한 원망과, 그 보다도 훨씬 더 큰 그리움이다. 高창高普출신으로 l7대 문헌가의 명맥을 굵게 이어주리라 기대했던 큰아들 炳善씨는 해방직후부터 좌익운동에 가담하면서 시대의 어두운 그늘에서 살아야했던 것이다. 좌익계열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큰아들은 자유당 시절, 사형언도를 받아 大邱형무소에 수감됐다. 항상 노심초사하면서도 겉으로 큰 아들을 외면하려 애썼던 石田은 아들과의 연을 잇는 마지막할 일을 위해 서울로 아예 거처를 옮겼다. 날마다 경무대 앞에서 진정서를 내고 또 답을 기다리는 일로 수개월을 보냈다. 당시 지치지도 않고 들어오는 진정서를 보고 이대통령은 화선지위에 써내려 간 글씨에 탄복, 자신이 결재한 사형수를 무기수로 재결재를 해주었다. 이를 아는 몇몇 知人들은 「石田의 글씨는 李대통령을 이겨낸 글써」란 말로, 石田글씨의 빼어남을 칭송했다. 큰아들 炳善씨는 73년 특사로 풀려 나왔지만 이즈음해서 암과 싸워오던 아내가 앞서가는 슬픔을 안아야했고 석방된 큰아들마저 내내 앓아오던 병으로 85년 선생의 서울 롯데미술관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지켜본 후 세상을 떴다. 선생의 창작열은 60대에 불붙기 시작했다.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마저 모두 잃은 선생은 그후 任實로 全州로 집마저 옮겨야했다. 아들의 뒷바라지로 많던 재산을 모두 탕진했지만 富에 대한 미련은 한치도 없다. 다만 이 아픈 시대의 희생물이 된 큰아들의 삶이 애처롭고, 저승의 아내와 자식들이 그립고, 어지러운 세상사가 한탄스러울 뿐이다. 70년이전 까지만도 평생 書道만을 고집해온 石田선생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야에 묻혀 야인으로 살아온 선생은 단 한번도 외부에 작품을 내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石田의 글씨가 알려진 것은 73년 全州에서의 첫 전시회에서였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생명이랄 수 있는 오른팔이 흔들리는 악운을 맞았을 때였는데 손이 심하게 떨리자 손바닥 전체로 붓을 잡고 筆壓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고 있는 즈음이었다. 書壇은 술렁거렸고 74년에는 동아일보사후원으로 서울 첫 전시회를 가졌으며 그 호응에 힘입어 8l년엔 동아일보사초대전을 가졌다. 80년대 초반을 맞으면서 그에겐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오른손에 마비증세가 온 것이다. 선생온 다시 붓을 왼손으로 옮겼다. 「이제 글씨의 참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의 눈물겨운 의지는 左手握筆法이란 독창적인 지고한 예술의 세계로 또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85년, 米壽를 기념해 서울롯데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대부분이 左握으로 낸 작품들이었다. 石田선생이 글씨에 붙여 꼭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다. 「如印印泥, 如劃沙維」.글씨를 쓰되 진흙 위에 도장을 찍듯이, 송곳으로 모래 위에 선을 긋듯이. 그리고 붓의 벽은 항상 적게 하라. 이러한 신념으로 붓올 들어오신 선생의 작품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있을까? 살아나 올 듯한 웅혼한 서체, 마음의 마지막 떨림까지도 허락치 않는 지고한 예술의 극치가 그의 작품세계다. 선생은 이즈음 새로운 창작의욕을 실어내고 있다. 이승에의 하직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이상해, 붓을 더 자주잡게 돼.」 또 다른 경지의 시작일까? 石田선생이 모처럼 웃으셨다. 「나는 꽃 옆에 서 사진 찍는 것이 좋아, 그러고 잘나오기도 허고」. 선생은 빠르지 않은 말씀이 끝날즈음 두건을 바로 잡아 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복을 입어서야. 큰 아이가 간 뒤로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할게야. 어지러운 세상사로 보아서도 그렇고.』 선생의 집을 나서면서 내내 한가지 말만을 떠올렸다. -예술가는 그 시대의 정신적 보루-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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