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문화시평]
전주시민들이 즐겨온 풍류는 아니었다
-제36회 풍남제-
문경민 전북일보 기자 사회부(2003-09-24 09:19:42)
매년 단오절은 전주시민의 날이자 풍남제가 시작하는 날이다. 올해는 6월13일이 음력으로 치면 5월 초닷새였고 풍남제는 12일 밤 전야제로 막이 올랐다. 잔치마당은 8일 동안 계속됐으며 풍남제의 열기 탓인지 내내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올 풍남제는 36번째였다.
단오절이 전주시민의 날로 정해진 것은 1959년부터였다고 한다. 단오는 예부터 우리민족의 고유명절이었으며 특히 농경사회가 창출해 낸 축제문화였다.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며 무병장수를 빌었다. 농사짓기에 관한한 예나 지금이나 으뜸으로 여기는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가 시민의 날을 단오절과 일치시킨 까닭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었다.
단오절, 즉 전주시민의 날을 기념해 벌이는 축제의 이름을 풍남제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8년부터였다. 1968년은 풍남문이 중건된 지 2백주년 되는 해였다. 풍남제가 36회째라 함은 이때부터의 연수이다.
8일 동안이나 계속된 이번 제36회 풍남제는 다채롭고 풍성한 행사로 도내 최대규모의 시민 축제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특히 행사를 전반적으로 관장한 전주시는 사실상 관이 주도하는 마지막 풍남제라는 점을 인식했음인지 예산과 인력을 최대한 지원했다. 특히 완산 덕진 양구청의 직원들은 필수요원들만 남긴 채 아예 행사장으로 출근했다. 아쉬움 없이 치르려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풍남제는 전주시민의 날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강해 그동안 전주시가 행사를 도맡았다. 민간기구인 풍남제전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했으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풍남제전위원회가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남원의 춘향제는 말할 것도 없고 진해의 군항제 강릉의 단오제 등등 풍남제와 유사한 시민축제는 민간기구가 주관하고 있다. 진정한 시민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시민들이 축제를 주도해야 하고 이는 또「문민」을 강조하는 시대의 추이에도 걸맞다. 풍남제도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제 길을 찾아 나섰으니 퍽 다행스럽다.
따라서 올 풍남제는 주관처가 관에서 민으로 넘어가는 바통터치의 의미와 함께 각종 행사를 점검하고 실험 해 보는 성격이 가미됐다. 그동안 풍남제에 선보였던 모든 행사들이 프로그램에 삽입됐다. 일부 새로운 행사가 추가되기도 했다.
외형적인 규모면에서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방대했다. 전국대회만해도 전국대사습놀이 전국대회를 비롯 전국 서화백일대상전, 전국노래자랑, 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 한시백일장, 체급별 장사씨름대회 겸 천하장사 씨름대회, 전국 아마바둑선수권대회, 전국 장기왕 선발대회 등 8개나 됐고 크고 작은 40여개의 행사가 진행됐다. 민속문화예술체육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됐으면 한동안 중단했던 시가지 퍼레이드로 펼쳐졌다.
8일 동안 행사진행에 쓰여진 공식경비만도 3억2천8백여만 원. 전주시는 이번 풍남제에 참여한 연인원이 1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집계했다. 덕진 종합경기장내에 터놓았던 난장에서는 하루 평균 4백 톤 가량의 수돗물이 사용됐고 쓰레기만도 매일 27톤씩 수거됐다.
이같은 대형 놀이마당으로 펼쳐진 풍남제는 긍정적 효과도 많았지만 개선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 보였다.
우선 풍남제를 단오절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느냐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민속명절인 단오절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에 우위를 선점당해 풍남제의 단오행사는 오래전부터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역의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창달돼야 할 시점에서 다른 지역에서 이미 「특허권」을 갖고 있는 단오를 전주시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독창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음력 5월5일인 단오절은 항상 초여름 절기여서 풍남제와 같은 대형 축제를 벌이기에는 날씨가 적절치 못하다. 이번 풍남제 기간에도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분위기를 위축시켰다.
단오절이 나름대로 뜻이 있다면 시기는 일치시키되 일정을 다소 조정하는 운영의 탄력이 필요했다. 야간 행사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덕진 공원 야외무대에 펼쳐지는 초여름 밤의 판소리 경연은 생각만 해도 흥이 돋는 일이다.
풍남제의 고유 브랜드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통쾌한 대답이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백화점식 진열로 겉으론 푸짐했지만 행사 전체를 꿰차며 응집시키는 주제가 없었다. 가짓수만 많았지 전주시민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감치는 반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무슨 반찬이 됐던 전주음식임을 알아 챌 수 있도록 독특한 맛을 냈어야 했다는 점이다.
「세계로 가는 열린 잔치」라며 내세운 주제도 올해가 「한국방문의 해」이자 「국악의 해」임을 적절해 섞어 만든 전시용어에 불과했다. 모든 행사의 기획과 진행은 「세계로 가는 열린 잔치」와 전혀 무관했다. 풍남제는 항상 고요하고 일관된 이미지를 가져야 하고 해마다 시의 적절한 소주제를 선택, 그 주제에 맞도록 특징 있는 행사가 기획돼야 생명력과 개성을 갖춘 지역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는 행사」로 일관돼 있다는 점도 개선 방안을 모색해야 할 숙제다. 풍남제 행사의 대표격인 대사습놀이를 비롯, 서화백일대상전 시조경창대회 바둑 및 장기 선수권 하시백일장 등 전국규모의 경연대회와 각종 공연 등은 사실 해당 분야에 나름대로 조예를 가진 이들을 위한 잔치마당이었다. 물론 차원 높은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으나 평범함 보통시민들이 풍남제를 즐길 권리도 무시돼서는 안 될 일이다. 각 행사장의 관객 대부분이 노년층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풍남제인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반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즐기는 프로그램의 다양한 개발이 요구된다.
이러한 면에서 난장의 개설은 타당했다. 매일 10만 가까운 인파가 몰려든 난장은 전주가 왜 맛과 멋의 고장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징표였다. 생리적으로 풍류를 아끼고 사랑해온 이 고장 사람들이 그동안 이같은 놀이판 문화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를 짐작케 했다.
30도를 넘는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난장은 한낮에도 북적거렸다. 낮에는 전주지역외의 사람들이 밤에는 직장일을 끝낸 시민들이 난장을 찾았다. 계모임이 난장에서 이뤄지는가 하면 직장의 회식장소도 난장으로 정해졌다. 난장에 가봤느냐가 풍남제 기간의 인사말이었다. 난장은 일종의 문화현상이었다. 풍남제는 난장이 개장하면서 시작됐고 난장이 폐장하면서 끝났다. 풍남제에서 난장이 차지하는 지위와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풍남제의 이름을 난장제로 바꿔보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난장에는 타지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 관광상품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난장의 모습에도 실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난장은 볼거리가 넉넉해야 하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함께 해야하나 그게 아니었다. 이번 난장은 전국 노점상 대회를 방불케 했다. 조잡하고 비위생적인 물건들이 난장을 가득 메웠고 몇 개의 토산물 판매장이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었다. 고유 음식을 팔도록 지정된 음식코너도 제멋대로였다. 난장에 가서 전주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을 제대로 맛보기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외난장까지 지정했으나 노점상들은 실력으로 하루 만에 장내까지 진출했고 주최측은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난장은 결코 난장판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난장판 이상도 아니었다. 잊혀져가는 전통 풍속을 재현한다거나 난장에 걸맞는 놀이마당을 펼쳐 뭔가에 목말라 난장을 찾은 시민들의 갈증을 시원히 풀어주는 노력이 없었다. 난장에 야외특설무대가 설치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제몫을 하지 못했다. 특설무대에서는 예정에 없던 영화를 상영했는데 관람객들이 의외로 많았고 반응이 그만이었다. 전주시민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 즉 야간 프로그램이 난장터에 준비돼야 함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올 풍남제는 대체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각종 대회의 참가자가 매년 줄어들고 간판 행사들의 방송매체 종속화 현상이 심화되는 등 당초의 취지가 다소 상실돼 간다는 우려는 낳았다. TV중계를 위해 실내체육관에서 벌어진 대사습놀이 노래자랑 씨름대회는 「열기」로 가득했다. 날씨가 더운데다 뜨거운 조명은 내리쬐고 관객들이 뿜어내는 체열 등이 뒤섞여 숨이 턱턱 막혔다. 이는 적어도 전주시민들이 즐겨온 풍류가 아니었다.
풍남제가 진정한 전주시민의 축제마당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획과 운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풍남제전위원회가 상설전문화해야 한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년부터 민간기구인 풍남제전위원(위원장 宋基合)가 제목소리를 갖게 된다니 시민들이 기대를 가져도 좋을 듯하다. 그동안에도 제전위원회는 존속했으나 독자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행사에 필요한 경비 인력은 물론 기획과 운영 등 모든 것을 관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올해 새롭게 위원을 보강하고 집행부를 교체한 제전위원회는 풍남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기금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내년까지 사단법인체로 홀로 서면서 풍남제를 민간주도의 진정한 시민축제로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송위원장은 제전기금으로 1억원을 희사하는 등 아주 적극적인 의욕을 보이고 있다.
내년 제 37회 풍남제가 벌써부터 준비되고 있는 셈이다. 전주의 문화를 총괄하고 대표하고 집약하는 진정한 시민축제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