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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6 | [문화시평]
종합예술의 진가 발휘해 보인 웅장한 서사시 -뮤지컬 '징게맹개 너른들'을 보고-
김정수 편집위원, 연극인(2003-09-23 16:00:02)
바로 엊그제 일로만 생생히 떠오르는 '80년 5월'이 어느새 14년이란 시간의 물결에 밀려 저만치 가 서 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그러니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라는 질문도 튀어나온다는 사실은 좀 심한 일이었다 치더라도, 5월18일 광주에서 당한 상황을 재현극으로 꾸며 보인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그 치떨리는 현장이 이제는 극으로 재현될 만큼 '80년5월'이 역사의 한 장으로 눌러앉고 있구나 하는 조금 다른 각도의 감회가 들었다. 동학농민형멱 백주년, 그 역사적 의의가 보다 생생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백년이 주는 의의가 보다 생생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백년이 주는 거리감이 여전히 크다고 생각해왔지만 '80년5월'이 가져다 준 시간차는 이 생각을 수정하기에 넉넉했다. 백년도 잠깐이요, 백 년 전의 일도 바로 엊그제 일어났던 우리들의 일이 아니던가. 그동안 역사극에서도 소외되어온 입지를 단번에 만회하겠다는 듯이 올 들어 갑오농민혁명 소재의 연극들이 앞을 다투어 창작되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 다. 질적인 문제는 뒤로하고, 연극판에서 역사를 진지하고 바른 자세로 살펴보려는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고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장기적으로 단단한 역사인식에 근거한 민족극 전통 확립에도 발전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5월부터 6월에 걸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와 민예총이 혁명의 중심도시 전주에서 주최하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 연극한마당도 그런 의미에서 주시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극적 관심들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돋보이는 작품 하나가 뮤지컬『징게맹개 너른들』(노경식 작 / 김효경 연출)이다. 이 작품에서 대한 일차적 시선 집중은 민간극단도 아닌 서울예술단에서 농민혁명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을 파격적으로 선정했다는데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소재 연극과는 쉽게 결부되어 연상되지 않는 미국 상업연극의 전형인 뮤지컬이란 장르를 통해 대규모 물량을 투입, 제작했다는 사실 또한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서울예술단은 이 작품으로 전국순회공연중인데 전북지역 1차 공연이었던 5월2일 군산시민문화회관 공연은 총 출연진 120여명과 세트를 무대사정상 반으로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객석을 넉근히 압도하는 감동의 무대를 만들어 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변주가 객석을 넘실대며 무대 가득 김제 만경의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누런 벼이삭의 들녘이 깔리고 자막을 통한 짧은 배경설명 뒤 녹두장군의 얼굴이 들녘을 가로질러 떠오르는 첫 장면이 압축해 보여주듯, 이『징게맹개 너른들』은 농민혁명에서 전봉준의 활약을 중심으로 다뤘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을 도화선 삼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쳐든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활약과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전모를 형상화한 이 작품은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 보여주기 위하여 동원 가능한 여러 가지 극적 기교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총 2막 8장으로 구성된 이 극의 사이사이에 배역을 겸한 해설 역으로 하여금 사건의 진행을 함축시켜 설명하게 함으로써 사건 전개에 기본적인 역사 이해를 도모했으며 각 막의 시작부분에서는 자막을 통해 개요를 서술했다. 또한 무대 배경의 빠른 교체와 장면 전환을 부드럽게 가져가기 위해 반투명막을 사용, 동시 진행을 시도했으며, 뒤쪽 무대는 이중구조로 국부조명에 의한 사건 진행의 차별화와 공간적 거리감을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모습은 역동적이고 서사적인 군무와 여리고 서정적인 사랑이 함께 녹아들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끝없는 절망을 딛고 불끈 솟은 푸른 죽창과 핏빛 깃발이 윤무 하는 궁중 장면은 출연진의 수만큼이나 폭발적인 힘과 그 힘의 아름다움을 과시해 보였으며, 2막에서 원평과 순창 댁의 사랑 이야기는 애절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 작품에 관객을 끝까지 붙들어 두는 역할로는 음악을 무시할 수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넘실대는 기악곡들과 독창, 합창곡들은 순간순간 정지화면처럼 전개되는 무대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데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강한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갖춘 인물로 형상화된 전봉준 역의 박철호가 부르는 '들풀의 노래'나 순창댁의 독창'들꽃이여'는 가슴 절절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압권이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힘있으면서도 유연한 안무였지만 서구식 춤에 더욱 익숙한 서울예술단원이어서 인지 우리 고유의 춤사위가 살아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유사한 죽창춤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 이였다. 1막의 박진감 넘치는 진행에 비해서 2막 중, 후반부가 다소 늘어진다는 점도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 중에 하나였다. 더불어 음악 전체도 국악으로 작곡되었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징개 맹게 너른들』에서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비판은 없다. 이 극의 성격상 무리였을 것이다. 다만 작가도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거나 창조하는 것보다 기존에 잘 알려진 녹두장군을 정면으로 더욱 부각시켜 관객들에게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인식을 확대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을 때 이극은 근래 보기 드문 대작의 면모를 보였다. 땅에 뿌리를 둔 전봉준의 힘, 그리고 그의 인간적 고뇌와 좌절, 역사의 고비마다 의연히 들려오는 민중들의 숨소리, 민족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징게 맹개 너른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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