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6 | [문화저널]
판소리 명창
왕대밭에 왕대난다
명창 이일주 3
최동현 군산대교수 판소리연구가(2003-09-23 15:58:43)
오정숙에게 공부를 시작하고서도 이일주가 오정숙을 진정으로 선생으로 모시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공부는 한다고 따라다녔으나, 그 때는 오정숙이 한참 판소리발표회를 하던 무렵이었다. 이일주는 당연히 선생의 뒷수발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나서 오정숙에게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정숙은 사람을 보내 이일주를 찾았다. 그러다가 1975년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부활되고, 오정숙은 이 대회 첫 번째 장원의 영예를 안게 된다. 오정숙은 이일주에게도 대사습 출전을 권유하게 되었다. 이일주도 이제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게 되어,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대사습 출전자는 전승 다섯 바탕소리 중 한 바탕 이상을 완창할 수 있는 자로 자격을 제한하였기 때문에, 그동안 배운 도막 소리 가지고는 출전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부활되어 판소리계에 끼친 가장 큰 영향중의 하나는, 완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판소리 명창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게 한 데 있다. 그 때까지는 이일주처럼 좋은 도막소리를 배워 그것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에 들어가면서 오정숙 소리의 진면목을 대한 이일주는 (자연히 항복이 되어, 무릎을 꿇고 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두 손을 꽉 잡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 소리를 배운다고는 했지만, 스스로 내심에서 우러나와서 한 것은 아니었으며, 나도 할 만큼은 한다는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일주는 오정숙으로부터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우고, 전주 대사습에 도전을 하여 도전한 지 4년만인 1978년 마침내 대사습 장원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결과 1984년에는 판소리 (심청가)로 홍정택과 함께 전라북도 최초의 도지정 무형문화재가 되기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그 제자들 중에 민소완, 조소녀 등은 벌써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 동안의 공로로 이일주는 1980년 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8년부터는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의 창악부 교수로 초빙되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이상 거칠게나마 이일주의 생애를 판소리 수업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일주의 수업 과정을 보면, 그 과정을 몇 개의 단계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단계는 판소리의 기초를 닦는 과정으로, 부친으로부터 소리 공부를 하던 때이다. 이 시기는 대체로 이일주의 십대에 해당하는데, 이 때에 이일주는 판소리 창자로서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일주는 그 후 늘 아버지의 판소리를 모범으로 삼고, 그 소릿제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일주가 오정숙의 소리를 듣고 반가와했던 것도, 그 소리가 자신의 부친 소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일주 판소리의 방향은 이미 이 때에 정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십대 후반에 해당하는데, 박초월과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여류 명창들에게 사사를 받고 도막 소리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이다. 이때 특히 박초월로부터 받은 영향은 후에 이일주 판소리의 특징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일주는 늘 자신이 구사하는 목은 박초월 선생님으로부터 딴 것이 많고, 오히려 오정숙 선생님으로부터는 별다른 목을 따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일주가 오정숙으로부터 배우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독특한 목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창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중요한 것은 선율보다도 오히려 목이라고 할 수 있다. 목은 자신의 판소리의 특색을 결정해 준다. 그러기 때문에 똑같은 스승 밑에서 같은 선율을 익힌 창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구사하는 목에 따라 각각의 예술적 색채는 다른 것이다. 이일주 판소리의 맛이 오정숙보다는 차라리 박초월의 판소리의 맛과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일주가 오정숙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히기 전에 배운 바 있는 박초월의 목을 더 많이 구사하기 때문이다.
이일주 판소리 수업기의 마지막 단계는 삼십대에 오정숙을 통해 김연수제 판소리를 익힌 시기이다. 이일주는 오정숙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히기 전에도 이미 상당한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명성은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 판소리계에서는 이미 도막소리의 시대가 가고, 완창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완창 능력이 명창의 조건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이일주가 오정숙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영원히 도막소리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막 소리로 이름을 날리다가 완창 판소리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진 수많은 소리꾼들에게 판소리를 익히고, 마침내 오정숙을 만나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간략하게 일생을 조감하다 보면, 고비고비마다 겪어야 했던 숱한 어려움들은 증발되어 버리고 만다. 어려서부터 소리의 길에 들어서 판소리가 절멸지경에 이르렀던 1980년대를 거쳐, 판소리로 명성을 얻고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된 지금까지 이일주가 겪어야 했던 숱한 어려움은 우리 전통 예인들이 한결같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화이후 우리 민족이 걸었던 역사적 도정과 다르지 않다. 그 어려운 고비마다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역시 대가의 후예라는 자존심과 판소리로 어떻게든 인생을 완성해 보겠다는 끈질긴 집념이었다. 대가의 후예로서 부끄럼 없는 경지에 이른 이일주를 보면서, 역시‘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의 참뜻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