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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6 | [문화저널]
작품과 나 연기자 숫자에 맞춰 쓰여진 대본들 -내가 겪은 연극의 뒷얘기-
문치상 전북일보 광고국장, 연극인(2003-09-23 15:53:01)
언론분야에서의 내 직업은 누가 뭐라 해도 기자(記者)다. 현재 광고국장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공개경쟁 시험을 거쳐 기자로 입사해서 24년을 기자로 생활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4년여 동안 광고국이라는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기자라는 직업이 내 것이 아닌 양 느껴지기도 하고 특히 남들이 기자로 봐 주질 않는다. 반면 문화예술분야에서의 내 전공은 너무 애매하고 빈약하다. 연극인, 희곡작가, 연출가, 연기자 등등 제멋대로 불리워 지고는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수용치 못할 동호인에 불과하다. 고등학교 때 시작된 연극부활동이 밑받침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텝과 캐스트로는 참여는 했다. 그러나 연극을 전공하지 않고 취미 활동에 머물렀으니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동안 「벽골단야」「시장안 여인들」「소재소 풍경」「인생살이」「방향감각」「만복사저포기」「경노우대증」등등 10편의 습작을 내놓긴 했다. 10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70년 중반 비사벌 예술학교 연극반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연극반원 대부분이 출현할 수 있도록 작품이 구상되고 쓰여지고 연출과정에서 첨삭된다. 그게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겐 희곡작가라는 이름도 걸맞지 않다. 내가 연출을 처음 맡은 건 1968년 창작극회 12회 공연인 박승희작 「아리랑 고개」를 시작으로 1970년대까지 20편에 달한다. 이 가운데 「용감한 사형수」「왕교수의 직업」「알젓는소리」「버드나무촌」등 너 댓 편과 자작극 너 댓 편을 뺀 나머지 모든 작품은 모두 박동화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외딴주막」「망자석」「이유있다」「느티나무골」「사는 연습」등등이 해당되는데 당시만 해도 작가가 참여하는 가운데 연습을 하기 때문에 작품의 손질이 불가능했다. 박 선생의 작품은 거의 장편이었다. 공연시간으로 계산해도 2시간 반 내지 3시간짜리 였으니 연출자 입장에서는 절반 아니면 최소한 3분의 1이라도 잘라 내는 게 통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막공연과 박 선생이 객석에 계실 경우는 원작대로 무대에 올려야만 했다. 그래서 연출자는 한 작품을 두 가지로 만들고 또한 연습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 있었다. 결국 연출자는 자기의도대로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공연마다 박 선생을 모시고 정종집에서 시간을 메꾸기도 했다. 연출한 작품 가운데 박 선생의 「느티나무 골」은 도내 최초로 전북일보사 주최의 시군 순회공연을 가졌고 박경창씨의 「버드나무촌」은 전국새마을 연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버드나무촌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극중인물 가운데 이장(里長)역을 맡은 연기자가 공연전날 아무 연락도 없이 저녁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서울의 여관방에서 연출인 내가 대역을 맡아 밤새워 연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투숙객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겨우 20여 편의 작품을 '틀에 박힌 수법'으로 무대에 올렸다고 해서 연출가라는 이름이 간혹 괄호 속에 붙긴 했지만 그 또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초 연극분야에서 전공을 하려고 했던 것은 연기자였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졸업한 이후에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열심히 무대에 섰다. 「멕베드」로 시작된 연기경력은 「마지막 잎새」「고래」「여운」「차질」「왜싸워」「두주막」「공사장」「이열치열」「나룻터」등 수없이 많았지만 작품으로 기억되는 건 박동화 작 「차질」이다. 정년퇴직한 노교수와 교장선생의 여정을 그린 내용인데 지금도 그 작품이 보고 싶지만 당시 교수와 교장 두 사람이 출연하는 단막극으로 프린트도 못한 채 먹지를 대고 대본을 3부 만들어 연출과 두 배역이 나누어 연습하는 바람에 공연이 끝난 후 소멸되고 말았다. 거기다 연습도중 연극부 남녀 2명의 신입 배우를 출연시키기 위해 식모와 신문배달을 등장 시켰지만 그들의 대사는 '차에요'와'신문이요'두 마디뿐이어서 대본도 주어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자 연기자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보통의 여대생이 무대에 선다는 건 엄두도 못냈고 육군병원 간호사로 야간대학을 다니는 하회생활경험자를 대상으로 여자연기자를 구하거나 아니면 방송국 성우들 중에서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왜싸워」라는 작품에는 수다쟁이 매파가 중요한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여자 연기자를 구하지 못해 복덕방 노인으로 둔갑시켜 출현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박동화 선생의 작품은 연습과정에서 많은 배역이 바뀌고 내용까지 수정되기도 했으며 공연예정일이 정해지면 확보된 연기자만으로 소화 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안 여인들」같은 작품은 연습과정에서 그나마 여고생들이 자꾸만 출연을 원하니까 첨삭이 많고 나중엔 극중인물의 이름도 만들지 못해 '가나다라' 또는 'ABCD'등으로 표기하면서 삽입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벽골단야」「만복사저포기」등의 작품은 국악과 접목시키기 위해 시도된 작품으로 우리고장의 얘기를 소재로 구성했고 「벽돌단야」전주 풍남제 기념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졌지만 「만복사 저포기」는 춘향제 기념작품이라는 목적아래 쓰여졌을뿐 공연되지 못했다. 내가 연기자로서 도저히 성장할 수 없음을 눈치 챈 것은 군대를 갔다 와서였다. 그 이유는 신체적 조건 때문이었다. 키가 작고 몸집마저 왜소해서 무대인으로는 적합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내게 주어진 배역은 노인역이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성격배우 노릇밖에 할 수 가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텝진영을 선호했고 그 분야에 열성을 다했지만 연기 지망생들이 많지 않은 시절이어서 어떤 작품이나 연습과정에서 빈자리가 생기면 그 역을 메우는 땜장이 구실을 많이 했다. 내게 청탁된 제목이 「작품과 나」이라는 것이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을 내세울 수가 없어서 중언부언하다보니 인생역정만을 나열한 것 같다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작품 뒤에 숨겨진 어쩌면 영영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얘기들이기에 '옛날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하면서 작품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음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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