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6 | [문화저널]
저널여정
농민군 관군과 최초접전, 그 승리의 함성
황토재
강영례 문화저널 간사(2003-09-23 15:39:03)
신태인을 출발, 말목장터가 있는 이평에서 버스를 내려 주변 소나무 숲이 울창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30여분을 걸으면, 1894년 백산에서 의기투합한 농민군들이 최초로 관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둔 황토재에 닿는다. 황토재는 황토현 기념관보다 조금 위쪽으로 갑오동학 기념탑이 정상에 세워져 있고, 멀리 고부들판과 두승산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지명 탓이었을까...군데군데 내비친 밭두렁은 분명 불그스름한 황토빛이다.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일대에 있는 황토재는 해발 37미터의 낮은 구릉지이다.
황토재는 1894년 음력 4월 6일 밤부터 농민군 토벌부대 사이에 최초의 격전을 벌여 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곳으로, 편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농민군들이 정규군을 상대로 벌인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무장정비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황토재로 가는 길 양옆에는 청홍색 고운 연등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근래 백주년 기념행사로 분주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길가에 매달아 놓은 청사초롱은 이곳을 찾은 우리를 환영하는 기나긴 행렬처럼 느껴졌다. 황토현 전적지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갑오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을 경축하는 대형 구조물과 무대세트였다. 탁 트인 고부들판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랐다. 갑오동학기념탑은 계단의 수만큼 숨이 가파올 즈음, 그 거대한 형상을 드러낸다.
황토재는 조선말부터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구전으로 농민군들의 승전의 이야기들이 전승되다가 갑오년 항쟁이 반봉건 반외세로 주목되기 시작한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1963년 관주도의 ‘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그해 10월 황토재 마루에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이후 늦게나마 활기를 띤 동학농민혁명 관련사업이 이 일대에 진행되어 1976년 4월 ‘만석보 유지비’가 세워지는가 하면 1970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19호로 지정된 바 있던 전봉준장군고택은 1981년 12월 사적 293호로 지정되어 전면적 보수 정화사업이 이루어졌다.
지금 들어선 황토현 기념관은 1983년 황토현 전적지 일대가 기념사업부지로 되면서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사적 295호로 지정된 황토현 기념관은 당시 제대로의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못한 바탕위에서 만들어낸 정권의 치졸함이 엿보이는 대표적인 곳으로 꼽힌다.
황토현 기념관내의 몇몇 전시물은 그 진위 여부가 학계의 시비가 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놓지 않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라 하여 그런대로 정비되고 관리체제가 갖춰진 곳은 황토현 전적지가 유일한 곳임에도 그곳의 관리 사무소에서 갖추어놓고 있는 유적지 안내장이란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명확히 전달하기는커녕 학계에서 이미 검증을 마친 ‘전봉준 출생지’(전봉준 고택이 아님)와 ‘백산성에서 동학도 봉기’(동학농민군은 무장에서 봉기하고 백산에서 진영을 확대 개편함)등의 부분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역사적 기념관으로서의 그 모양새에 큰 흠집을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 정비가 완료된 유적지의 안내문이란 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한 예로 전봉준 고택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고부현의 군수」라는 구절이 있어 보는 이의 쓴웃음을 자아낸다. 현의 수령은 현감이었고 군의 수령은 군수였다. 또 그 당시 고부는 군이었지 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졸속함이 엿보이는 사업일망정 안내판이나 기념판도 87년 유적지 정화사업 안에 들었다는 이유로 얻어진 혜택(?)이고, 당시 유적지 정화사업에서 제외된 나머지 지역은 아예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니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기념관내에서는 누구나 쉽게 지나쳐가지 못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바로 관군과 일본군에게 압송되는 전봉준과 그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보여지는 효수사진이다. 하지만 이 충격적 사진의 효수머리는 전봉준 장군과 상관없는 외국인 선교사라는 설이 있다. 그 사진속의 얼굴골격이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의 그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시물의 진위시비나 안내문의 엉터리 설명들은 백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기념행사나 다른 여타의 무엇보다 먼저 개선되어야 옳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역사를 이야기하고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황토현 주변 넓은 잔디밭에는 휴일이여서인지 야유회를 즐기는 단체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기념관을 둘러보는 가족의 행렬이 많이 눈에 띄었다. 자가운전으로 이동하는 답사자들은 꼬박 하루면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며 주변의 많은 동학관련 볼거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이 쉬어갔다는 말목장터, 이평면 장내리의 전봉준 장군 고택, 이평면 팔선리의 만석보 유지비 등이 모두 이곳에서 20분내외의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래 지도에 나타난 농민군 집결지 백산, 조병갑이 학정을 일삼던 고부관아, 사발통문을 모의하던 신중리 주산마을 등의 유적지들도 모두 길어야 40분 거리여서 약간의 사전 지식을 준비한다면 매우 흡족한 기행이 될 것이다.
백 년 전, 바로 이 곳에서 농민봉기는 분산적인 민란의 한계를 넘어 전반적인 갑오농민전쟁으로 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창으로, 법성포로 나주, 영광으로 농민군은 곳곳에서 승리의 전과를 올리며 남으로 계속 진격하여 호남전역에 그 위세를 떨치고, 그해 5월 보무도 당당하게 전주성에 입성하게 된다.